왕혼

 

1. 왕창#s-2의 아들
1.1. 생애
1.1.1. 오나라 정벌 이전
1.1.3. 오나라 정벌 이후
1.2. 미디어 믹스
2. 왕융의 아버지


1. 왕창#s-2의 아들



'''『''''''진서''''''』''' '''「왕혼등전(王渾等傳)」'''
'''왕혼'''
왕준#s-1
당빈
王渾
(223 ~ 297년 7월 21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자 서진#s-1의 장군, 대신. 왕창의 맏아들이며, 왕륜의 형이다. 자는 현충(玄沖).
아내는 종염이고, 아들은 왕제 등, 딸은 왕영숙 등이 있다. 그의 조카로는 왕승(王承)[1]이 있고 그의 후손으로 왕승(王承),[2] 왕술(王述),[3] 왕탄지(王坦之),[4] 왕유(王愉),[5] 왕수(王綏)[6] 등이 있다.

1.1. 생애



1.1.1. 오나라 정벌 이전


아버지의 작위인 경릉후를 이어받았으나 조상 막하에 초빙되었던 전적이 문제되어 고평릉 사변 직후 잠시 면직된 바 있었으며, 사마소의 참군사가 된 후로 황문시랑, 월기교위 등으로 승진했다가 서진 개국 후에는 양렬장군의 관직을 더해 서주자사로 전임되었다. 서주자사를 지내면서 기근이 들자 백성들을 구휼해 식읍 1천 8백호가 증가해 받았다.
동중랑장 감회북제군사, 정로장군 감예주제군사 등 예주 방면의 군을 통솔하다가 안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가 되어 회북의 동오 전선을 맡았는데, 손호의 폭정 때문에 차츰 진으로 넘어오는 오나라 사람들이 늘어났다. 278년에 환성에 있던 오나라의 군사들이 진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양주자사 응작을 파견해 거점과 물자를 불태우고 수천 병사와 군선에게 손해를 입히는 전공을 세웠다.

1.1.2. 오나라 정벌


본격적으로 동오 정벌이 개시되자 강서로 나아갈 것을 명령받았고 양주자사 주준, 사마 손주를 앞세워 오의 승상 장제와 대장군 손진을 죽이고 수급, 포로를 도합 7800여구 얻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혼이 남하 공략에 열중하던 와중에 서쪽으로부터 장강을 타고 온 왕준의 군세가 때마침 불던 순풍을 타고 석두성(건업)으로 육박해 손호를 사로잡는 데 성공하자 왕혼은 사전에 합의한 바를 어겼다[7]며 분개해 왕준이 손호를 자기 진영으로 거쳐 가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소하여 왕준이 공과 재물을 탐해 계획을 어그러뜨렸다는 글을 올렸다.
2대에 걸쳐 군공을 쌓은데다 왕혼의 아들 왕제사마염부마라서 조정에서 왕혼의 위세는 가충과 견줄만큼 지대했기에 이 탄핵에서 감히 왕준을 변호하는 이는 몇 없었으며, 사마염조차 직접 왕준을 책망할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왕준은 죽는 날까지 왕혼과 몹시 불편한 사이가 되었는데, 어쩌다 왕혼이 찾아왔을 때는 신변을 염려해 집 안팎을 삼엄하게 경계했다고 한다.

1.1.3. 오나라 정벌 이후


천하통일의 공적으로 작위가 경릉공으로 올라가면서 식읍 8천 호가 증가되었고 한동안 옛 동오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에 힘썼으며, 이 때 왕혼의 집에 빈객이 끊이질 않았고 동오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킨 후에 중앙으로 복귀했다.
279년에 사마유가 당시 조정에 인질로 왔던 남흉노의 왕자 유연을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이니 미리 없애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이미 유연이 왕혼과 친분을 맺은 사이라 왕혼은 단지 의심만으로 인질을 해쳐 흉노와 불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8]
282년에 사마염의 동생인 제왕 사마유순욱풍담 등이 시기해 봉지인 산동으로 돌려보내라 청하고 사마염이 이를 재가하자 이를 반대해 제왕을 태자태보로 삼자고 건의했지만 사마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 왕제도 사마염에게 간곡히 호소했으나 거꾸로 노여움만 사 벼슬이 국자좨주로 깎였고, 이 때부터 사마염의 총애를 잃은 왕제는 실의에 빠져 왕혼보다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285년에는 상서좌복야, 산기상시의 작위에 올랐으며, 290년에 사도가 되었다가 혜제 등극 후 시중을 겸직했다. 양준 일파가 주살당한 뒤 특별히 병사를 지니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문관이 한때의 총애에 의지해 병권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이를 반납했으며, 초왕 사마위가 사마량과 불화해 밀명을 받자 왕혼과 손을 잡고자 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천여 병사를 집 주변에 풀어 방비한 채 은둔했다가 사마위가 주살되자 그 병사들을 이끌고 관에 출두해 녹상서사의 관직을 더했다.
이처럼 팔왕의 난 전반기까지도 군권을 호령하며 뛰어난 처세를 자랑하는 노대신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재상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점점 그 명성이 잦아들었다고 하며, 왕제를 비롯해 아들들이 모두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경릉공으로 있다가 297년에 7월 21일에 죽으면서 손자인 왕탁이 작위를 이었다. 시호는 원공(元公)이다.

1.2. 미디어 믹스


[image]
삼국지 11
[image]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전반적으로 아버지보다는 떨어지는 능력치. 무력에선 우위를 점하나 정치, 매력에서 밀린다. 또한 왕준을 모함한 전적 때문인지 왕준보다 능력치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행적에 비해서는 매력이 높은 편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2/무력 77/지력 72/정치력 68. 돌파, 제사, 몽충, 정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77/지력 72/정치력 74/매력 70으로 전능력치가 70을 넘었고 아버지 따라 명사 특기를 들고 나온다. 동오 정벌에 공헌한 점을 반영하였는지 제독 특기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엔 특기가 별 게 없어서 활용도는 미묘. 무력이 77이면 나쁘진 않지만 막상 일기토에 쓰기엔 특기도 2개(기합, 삼단) 밖에 없고, 통솔 75에 무력77이면 나름대로 준수하지만 전장에서 쓸 특기는 혼란, 진정 밖에 없다. 그나마 매력도 70은 찍어주고 징병특기가 있으니 징병셔틀로는 그럭저럭 쓸만하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징병, 진정, 혼란, 기합, 삼단, 명사, 제독. 총 7개다.
삼국지 11의 특기는 잉여급으로 불리는 수장이나, 역사 시나리오에서 왕혼이 활약할 무렵엔 오나라 진영에 그만한 능력치를 갖춘 장수들이 거의 없을 테니 수상에서는 무적을 자랑하게 된다. 물론 영웅집결 시나리오 같은 경우는 그냥 그만그만하게 굴릴 만한 장수 수준이지만, 왕창처럼 육성으로 강화시켜 운용하는 재미를 기대할 수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삼국지 12 파워업키트에서 다시 등장했다. 근데 지력이 63으로 전작에 비해 너프되고 전법이 좀 약한 기동력약화이라서 좀 안습. 일러스트는 손가락을 위로 올리면서 오군을 깔보는 모습으로 보인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74/71/63/74. 특기는 상업 2, 순찰 1. 전수특기는 상업이고 전법은 창병속공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8, 무력 76, 지력 72, 정치 74, 매력 70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4, 무력이 5, 지력이 9 상승했다. 개성은 소탕, 수전, 교련, 주의는 할거, 정책은 수군육성 Lv 3, 진형은 어린, 안행, 투석, 전법은 분전, 견제, 투석, 구축, 강습, 친애무장은 없고 혐오무장은 왕준이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남승우로 나온다. 아버지의 캐릭터였던 사나다 시로와도 살짝 비슷하다. 부장[9]으로 강하균을 데리고 있다.

2. 왕융의 아버지


王渾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서진의 인물. 자는 장원(長原).
낭야 임기 사람으로 죽림칠현으로 알려진 왕융의 아버지이며, 재주와 덕망이 있었고 상서와 양주자사를 지냈다고 한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 산도 등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서 그가 상서랑으로 있을 때 아들 왕융은 왕혼이 머물던 낭사에 거주했는데, 왕혼은 완적과 친했지만 완적이 왕혼과 동료였기에 찾아오면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완적은 왕융의 방에 들어가 담론을 나눴다고 한다. 완적이 왕융과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면 왕융을 칭찬하면서 왕혼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또한 그가 죽자 역임했던 아홉 군에서 그의 은의를 입은 사람들과 친구들이 그의 은덕을 기리어 서로 다투어 수백만 전의 부의금을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왕융은 이 부의금들을 한 푼도 받지 않았는데, 우예의 진서에 따르면 이로 인해 왕융은 이름을 드러나게 되었다.

[1] 서진#s-1에서 동해태수를 지냈다가 동진에서 종사중랑을 지냈다.[2] 왕탄지의 조부. 동해태수의 승을 지냈다.[3] 왕탄지의 아버지.[4] 자는 문도(文度). 동진 때 명신으로 중랑장을 지냈다.[5] 왕탄지의 차남으로 자는 무화(茂和). 동진 때 보국사마, 강주자사, 상서좌복야를 지냈다.[6] 왕유의 아들로 자는 언유(彦猷). 동진 때 중서령, 형주자사를 지냈다.[7] 왕준이 건업 근처에 이른 것을 알자 글을 보내 함께 석두성에 입성하자고 전했다. 왕혼의 부장 주준과 하운이 왕준에게 선공을 양보할 것을 타진했지만 듣지 않았다.[8] 그 유연이 훗날 서진을 멸망시키고 오호십육국의 막을 연 주역이 된다(...). 비록 본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평생 서진을 위해 싸운 공신이 그와 더불어 멸망에 일조한 셈이니 역사의 아이러니.[9] 이 기세를 몰아 건업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걸로 봐서 주준이나 하운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