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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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국성으로 고려 왕조 개창 이후 474년 동안 번성하였던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이다.
2. 시조가 누구인가
일단 시조는 고려 태조의 증조부 국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왕씨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국조의 손자 세조 이후로 보인다.[1]
국조와 세조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왕건의 조상이 왕씨 성을 썼는진 확신할 수 없다. 고려사 고려세계엔 태조 왕건의 조상이 누군지 알기 어렵다며 편년통록, 편년강목과 이제현의 논평 두 주장을 모두 실었다.
두 가지 주장을 요약하면 편년통록, 강목은 세조 용건 혹 태조 왕건 대부터 왕씨 성을 썼다고 한다.[2] 반면 이제현은 국조 대부터 이미 왕씨 성을 써왔다고 주장한다.[3] 현실적으론 태조 왕건이 신라계 귀족이 아닌 일개 지방 토호이란 걸 감안하면 원래 가문에 성씨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편년통록, 강목은 당 숙종이 고려 ''''의조''''의 친부라 하고, 이제현의 논평은 당 숙종이 고려 ''''국조''''의 친부라고 한다. 결국 둘 다 고려 왕실이 당나라 황실의 직계 후손이란 걸 드러내고자 하는데, 오히려 이 부분이 태조 왕건, 나아가 세조 용건, 의조 작제건 등 왕씨의 조상들이 원래 성씨가 없는 비(非) 귀족 출신이란 걸 보여준다. 귀족이 아닌 평범한, 더 세게 말하면 그냥 그런 가문 출신이니 어떻게든 미화해야 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3. 역사
3.1. 고려시대
호족과의 결혼으로 엄청난 수를 자랑했던 왕건의 자손들 상당수가 혜종~경종대 왕위 다툼, 특히 광종대 숙청에서 대거 살해되기는 했으나,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4] 의 자손이나 왕건의 손자 현종이 살아남았고 특히 현종의 자손들은 매우 번창하였다. 왕씨들은 고위 귀족과의 정략결혼이나 왕씨 일족간 근친혼을 하였고 이는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상당한 수로 늘어났으리라 여겨진다.
3.2. 조선시대
3.2.1. 탄압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개성 왕씨에게 약 20년에 걸친 시련이 닥친다. 태조 2년까진 도당과 대간이 왕씨를 주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에도 태조의 보호를 받아 무사했으나 태조 3년의 박위의 점괘 사건으로 유력 왕족들은 백수십명이 삼척, 강화, 거제에서 처형되고 방계들은 성을 바꿔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칠남 무안대군 이방번의 처가였던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5] 과 그의 두 아들이 고려 왕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었지만 왕우가 병사하고 두 아들 상장군 왕조(王珇)와 대장군 왕관(王琯)이 무인정사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 왕우의 대는 끊기게 된다. 거기다 왕우의 장녀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이방번의 아내였는데, 자식도 없이 남편이 무인정사 때 사망하는 등 왕우의 자손들은 불운이 연달아 터진다.
다행히 조선왕조가 안정된 태종 때부터 왕씨들에 대한 탄압을 풀어주기 시작해 세종과 문종을 거치며 복권되었다. 이중에 이름이 남은 이들이 후일 숭의전 부사로 고려 왕실에 올리는 제사를 맡게 되는 왕순례(王循禮)[6] 와 개성 왕씨의 동양군파 중시조인 왕미(王亹) 등이다. 왕미의 경우 그동안 외가 성인 민씨로 행세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26일 기사를 보면 왕손이 아닌 왕씨는 외가 성을 따르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3.2.2. 복권
태종 13년부터 왕씨들이 드러나도 처벌하지 않은 채 덮으며 넘어가고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조의 왕족에게 고려 왕실의 제사를 지내게 해주고 그에 따른 물품 등을 지급하는 식으로 예우해 주기 시작하면서 차츰 복성하였다. 세조는 생일 잔치에 왕순례를 초대해 2품에 준하게끔 우대받았다.
단종~세조 시기부터 개성 왕씨는 사족의 일원으로 조선 사회에 완전히 녹아든다. 사족들은 중앙에서 벼슬한 쪽과 지역 향촌사회에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한 쪽으로 갈리는데 개성 왕씨는 후자쪽.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89년 편찬된 왕씨족보를 참고하면 전라도 지역, 구례와 여산, 조선 왕실의 본향이기도 한 전주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구례 지역에선 왜란-호란 시기 의병활동을 바탕으로 확고한 지배 사족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철학왕국인 조선 사회에서 내세울만한 이름난 학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1789년 그때까지 전해오던 가전기록을 바탕으로 왕씨 세보를 다시 편찬했고 왕건이 수도로 정한 개성을 본관으로 하고 태조의 15대손 왕원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망한 지 거진 400여년 만의 일로 정조 대에도 개성 왕씨를 찾아내 본성을 쓰게 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과 교분이 있었던 왕희걸은 왕씨 문중에서 최초의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었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선조 때 왕의성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순조 4년에 지평(持平)·도승지로 증직되었다. 흥선대원군 대에는 대원군이 왕씨 인물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동부승지를 지낸 왕정양 등이 벼슬한 인물로 이름을 오르내렸다.
3.3. 현황
하여간 왕미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 동양군(東陽君)파[7] 이외에도 계속 살아남아 근근히 씨족을 이어간 평양공(平壤公)파, 양양공(襄陽公)파[8] , 안경공(安慶公)파[9] , 시중공(侍中公)파[10] 등등이 존재한다. 현재 존재하는 개성 왕씨 인구 2만 명 중에 동양군파 외의 나머지 파인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2천 명이니 이 성씨가 얼마나 조선 시대에 근근이 이어져 내려왔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이걸 거꾸로 얘기한다면 족보를 위조하거나 구입해서 가문에 편입된 사람이 적다는 얘기도 되지만... 사실 개성 왕씨가 공식적으로는 복권이 상당히 늦게 되어서 가문에 편입해봤자 메리트가 딱히 없었을 것이다. 즉 개성왕씨인 사람들은 대부분 진짜 고려왕실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지금 수백의 본이 이어지는 조선의 전주 이씨나 신라의 경주 김씨와 밀양 박씨, 가야의 김해 김씨와 비교해본다면 그야말로 안습일 따름이다. 다만 순수혈통을 이어나갔다는 점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에는 그만큼 유교사회에서 가문의 정통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전화위복의 극단적 사례인 셈이다.
다만, 왕씨 복귀가 허용된 이후로도 복귀하지 않고 외가의 성이나 바꾼 성을 그대로 쓴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개성 왕씨 유명인으로는 연예인 전지현[11] , 왕영은(초대 뽀미 언니), 왕종근, 왕석현, 왕상은 등이 있다.
4. 기타
- 왕씨 일가의 대부분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왕씨를 변형시켜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의 다른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려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인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서 동일인이 성만 바꾼게 확인되는 옥씨(의령 옥씨 단일본)를 제외한 나머지 성관은 일방적인 주장외에 근거가 전혀 없다. 개성왕씨세보에 유씨, 이씨 외가성으로 개성했다는 기록이 남은 왕씨들이나 태종 13년 왕거을오미가 외가성인 이씨성으로 살고 있었던 사례를 감안하면 개성을 해도 외가성을 썼지 성씨를 만들어내는 사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옥씨는 문헌 기록 외에 왕씨 집성촌이 경남 의령에 있었을 정도로 관계가 깊다.
- 왕서방의 임팩트 때문인지 해괴하게도 중국(화교) 성씨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왕씨가 중국 성씨라면 고려 왕조는 얄짤없는 중국 성씨가 한국을 지배한 역사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편견의 희생 성씨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83년 초반에 삼양식품에서 왕서방면이라는 중국식 우동맛을 살린 라면을 내놓았는데 왕서방면이 유행을 타는 과정에서 개성 왕씨 성을 가진 어린이들이 놀림거리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개성 왕씨 문중에서 항의를 해 동년 4월에 중화 우동면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MBC의 타임머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왕서방(?) 열 받았다!(7회, 2001년 12월 30일 방송분)"는 제목으로 극화한 바가 있으며, 타임머신 제작진이 삼양식품의 홍보 팀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왕서방면에서 중화 우동면으로 상표를 바꾸는 데만 비용이 무려 1983년 당시 거액이었던 7억 원이 들어갔다고 한다.[12]
5. 관련 문서
[1] 이상 국조의 족보관계는 고려사가 인용한 이제현의 논평 기준이다. 편년통록, 강목은 또 다르다.[2] 의종 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인용.[3] 실전된 기록 '왕대종족기'와 '성원록'을 인용.[4] 어머니는 유금필의 딸 동양군부인 유씨. 효은태자 본인은 광종때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그 아들들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고 강조의 정변 이후 복권되었다.[5] 신종의 7대손이자 충렬왕의 외현손자로 공양왕의 형제였다.[6] 제우지라고 성을 숨기고 살았으나 사촌과 밭 경계를 놓고 다투다 사촌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해서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이 때 왕씨인 것이 들통났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 했지만, 문종의 어명으로 복권되었다.[7] 광종 때 피살된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로부터 파생되었다. 정사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개성 왕씨 족보에는 왕원(王垣)로 기록되어 있다.[8] 신종의 차남 양양공 왕서(王恕)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그의 6대손이 공양왕이다.[9] 고려 고종의 차남 안경공 왕창(王淐)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사실 임연의 압력으로 인해 형 원종의 양위로 잠시 왕위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5개월 정도 왕위에 올랐다가 원나라의 압력으로 원종은 복위하고 물러났다. 영종(英宗)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중요한 것은 묘호가 아니다! 고려사 안경공열전 말미에 後追謚爲英宗(후에 시호를 영종이라고 추증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묘호가 아니라 시호가 영종인 것이다. 즉, 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죽은 후 시호를 내린 것이다.[10] 충정왕의 서자 왕제(王濟)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충정왕 항목 참조.[11] 본명 왕지현. 상술했듯 현대 대한민국에는 왕씨가 드물기 때문에 전지현도 화교설이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부인했다[12] 참고로 1983년 당시 강남의 60평(약 200㎡) 아파트가 5000만 원 하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1983년 당시 7억 원을 2020년 화폐 가치로 환산하자면 24억 6,54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