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낙랑군)

 


'''王調'''
? ~ 30년

1. 개요


낙랑군 출신의 토착 호족[1]이자 반란자. 신나라 - 후한 교체기에 자립을 꾀하였다.

2. 생애


경시제가 패망할 무렵인 25년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살해하고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를 자칭했다. 당시 중국은 신나라가 막 멸망하고 후한이 들어서는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광무제는 머나먼 낙랑군까지 신경을 쓸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30년, 광무제는 낙랑태수 왕준(王遵)을 파견했고 왕준은 요동에 이르게 된다. 이때 왕조에게 협력했던 군삼로 왕굉(낙랑군)과 군결조리 양읍(楊邑)이 왕조를 배신하고 그를 살해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3. 기타


왕조가 낙랑군이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낙랑군의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직접 지배가 아닌 옥저, 동예의 군장들이 다스리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만 언급되는 최씨낙랑국최리가 이러한 낙랑군의 혼란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나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1] 후한서 원문에는 토인(土人)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