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라
1. 개요
중국 역사 속에서 신이라는 국명을 사용했던 국가를 뜻함. 둘 다 분열된 시대의 원흉이라는 부분도 동일하다.
2. 목록
2.1. 申
사실상 춘추전국시대의 원흉.
주나라#s-1의 서주(西周) 시기에 있었던 국가. 백이의 후예라고 하며 성씨는 강(姜), 작위는 후작. 현재의 남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나라의 태자가 외손자였기 때문에 권력의 실세로 자리잡았으나, 태자가 물러날 위기에 처하자 증#s-4, 서융, 견융 등을 불러들여서 이들과 연합하여 주나라를 공격, '''춘추전국시대의 계기를 제공한다'''. 이윽고 춘추시대 초기였던 기원전 688년에 초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2.2. 新
2.2.1. 개요
중국사 통일 왕조 중 '''최단명 국가'''이자 '''독자적인 시대로 구분되지도 못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무려 고작 '''1대 15년'''이라는 처참한 역사를 자랑한다.
위의 신(申)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원흉이라면 이쪽은 어떻게 보면 (동탁과 십상시를 넘어) '''결과적으로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시대의 진정한 원흉이라고 볼 수 있다.'''[1]
전한과 후한 사이에서 잠깐 있었던 '''단명 왕조'''로 일반적인 역사 구분에는 역대 왕조에 포함되지 않지만[2] , 전한과 후한 사이에 공백이 있기 때문에 서술한다. 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쿠데타를 통해서 건국했다. 당시의 문제였던 호족 지배를 타파하고자 급진적인 토지 제도와 정책을 시행했으며, 흉노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 때문에 각계각층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를테면 왕망은 신을 건국하면서, 모든 관료의 '''봉급을 없애고''' 순수 봉사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왕망은 '''모름지기 관리란 백성에게 봉사할 마음으로 해야지 돈 벌 목적으로 해먹으면 한나라 꼴 난다''' 생각하여 이렇게 관료제를 개편한다. 신 왕조에 빌붙으면서 그래도 개국 공신인데 좀 챙겨주겠지 설레발 치던 신나라 처음이자 마지막 관료 계층은 문자 그대로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뇌물에 의존하게 되었고[3] 이는 신을 말아먹는 직격탄이 되었다. 농민은 농민대로 망한 것이 유교제당, 유학소 등의 몇몇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유재산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고, 은주 시대의 정전제(井田制)를 강제로 시행하게 했다. 그나마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후닥 끝내버려서 호족, 평민 할 것 없이 엄청난 혼돈에 빠지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호족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 방법이 너무 막가파라서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하고 혼란만 가중된 셈.
흉노나 선비, 고구려와 같은 주변국 지도자의 칭호를 제멋대로 고치고, 특히 고구려 군주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의 유리명왕, 대무신왕과 충돌하였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관계 악화로 이어져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대외 원정을 위한 물자 공출까지 더해지자, 관료들의 엄청난 수탈+사유 재산 불허+호족의 반발 등 모든 국가 막장 테크의 징조가 더해져 각지에서 적미군과 같은 반란이 속출, 훗날 후한 초대 황제 광무제가 되는 유수(劉秀)에게 곤양대전에서의 대참패, 결국 왕망은 경시제의 군대에 의해서 붙잡혀 죽음을 당하고 신도 멸망한다.# 특히 왕망의 최후는 대단히 끔찍해서 그야말로 천참만륙을 당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장안이 함락될 당시에 농민군들이 먼저 왕망을 발견했고, 경시제가 왕망을 죽이는 자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했기에 공적을 탐한 농민군은 왕망의 몸뚱이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팔다리까지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초의 항우도 비슷한 이유로 산산조각 나긴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최후를 맞은 왕망은 훗날 '''역적의 대명사'''로 두고두고 가루처럼 까이게 된다. 망탁조의 문서 참조. 심지어 1,800여 년이 지난 청나라 때까지도 까인다. 그래도 '''닥치고 놀자식의 폭군은 아니었고''' 호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과 시도만큼은 좋았기에 이 부분은 현대에 와서 어느 정도 평가를 받는 편이다. 실제로 신나라를 무너트리고 세워진 후한은 입김이 세진 호족들과의 연합 정권에 가까워서 외척의 힘이 강화되었고, 그럼에도 꽤 오래 가긴 했지만 결국 그런 점 때문에 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실제 왕망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물론 상당히 부정적인 서술이긴 하다) 왕망을 단순히 왕조 뒤엎고 폭정을 일삼은 암군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왕망에 대한 평가는 주로 후한서와 같은 사서와 많은 전근대 문인들의 글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는데, 충과 효를 최고 가치로 놓는 유교의 영향 아래에서 반역을 일으킨 왕망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극도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왕망은 물론이고, 그가 세운 신 왕조 역시 흑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당시 전한의 상태가 꽤나 막장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왕망은 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어쨌든간에 혼란한 시대를 보며 개혁을 단행한 것은 맞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 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도 왕망의 정책들은 그 취지에서 상당히 진보적이고 이치에 맞는 점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 이후 실행이 개판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뜻은 좋았으나 그걸 실현해내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인물이 세운 단명 왕조였다고 볼 수 있다.
2.2.2. 역대 황제
2.2.3. 같이보기
[1] 다소 비약처럼 들리지만 현대 사학계에서도 왕망의 행적 때문에 후한의 정세가 불안정해지고 외척과 환관의 대립 끝에 결국 십상시가 탄생해 중국사에서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시대가 나오게 되었다는 주류 의견이 제기될 정도면 결코 과장이 아니다.[2]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삼국지가 삼국시대가 시작하기 36년이나 이전인 황건적의 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신나라 전체 역사는 물론 전한 말의 왕망의 찬탈 과정부터 후한 건국 과정에 집어넣어도 무방하다.[3] 이는 현대 행정학의 인사론에서도 가르치는 부분인데, 개인에게 바랄 수 있는 공명심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에게 적정 수준의 봉급과 노후보장을 제공하지 않으면 공무원은 필연적으로 뇌물을 받게 된다는 것.[4] 삼황오제.[5] 삼황오제.[6] 전제(田齊) 군주 재위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