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낙랑국
1. 개요
'''崔氏樂浪國, 樂浪國'''
원삼국시대에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국가로, 추정되는 위치나 이름 때문에 한사군 중 낙랑군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문헌에서 등장하는 '최리'라는 낙랑왕 때문에 편의상 '최씨낙랑국'이라고도 부른다.
자세한 연혁은 모르지만, 사서에는 고구려 대무신왕 때 호동왕자를 보내 '낙랑국'을 멸망시켰는데 낙랑국왕을 '최리'라 했다. 이때의 멸망 과정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일화가 유명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공주가 고구려의 왕자를 사랑한 나머지 (전쟁 경보체계로 추정하는) 자명고를 찢었다. 끝내 태만하던 낙랑국의 군사들은 고구려군에게 참살되었고, 낙랑왕 최리는 공주를 제 손으로 죽인 뒤 항복했다.
이 나라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 시기는 전한 - 신나라- 후한의 교체기인데, 옛 고조선의 중심지에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에서도 대륙의 혼란을 틈타 서기 25년, 토인(土人, 고조선계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王調)가 일어나 독립했다가 서기 30년 왕준의 후한 군대에 항복하는 등 격변의 시대였다. 거의 같은 시대인 낙랑국의 정세와도 연관있을 가능성이 크다.
2. 기록
2.1.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조의 기록으로 '''옥저 지역'''을 유람하던 호동왕자와 최리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 관련된 낙랑국의 멸망에 대한 내용으로써 자세한 내용은 호동왕자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후략)…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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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조 #출처
2.2.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의 첫번째인 기이편의 고대 국가들을 대략적으로 논하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낙랑국의 내용으로써 삼국유사에서는 낙랑군, 낙랑국을 따로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이러한 별도의 구분이 없는 서술로 보아 일연 스스로도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을 구별하지 못한 것 같다.前漢時 始置樂浪郡 應邵曰 故朝鮮國也
전한(前漢) 때에 처음으로 낙랑군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를 “옛 조선국이다.”라고 하였다.
新唐書注云 平壤城 古漢之樂浪郡也
신당서(新唐書)의 주석에서는, “평양성은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다.”라고 하였다.
國史云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又第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王 伐樂浪滅之 其國人與帶方[北帶方] 投于羅
국사(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인들이 와서 신라에 항복하였다.”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키자,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사람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又無恤王二十七年 光武帝遣使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據上諸文 樂浪卽平壤城 宜矣 或云樂浪中頭山下 靺鞨之界 薩水今大同江也 未詳孰是]
“무휼왕 27년에 광무제(光武帝)가 사신을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이 한나라에 예속되었다.”[이상의 글에 의하면 낙랑이 곧 평양성이라는 것이 마땅하다. 혹자는 말하길, ‘낙랑의 중두산(中頭山) 아래가 [[말갈|말갈(靺鞨)]]의 경계이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대동강(大同江)]]이다.’라고 하지만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又百濟溫祚之言曰 東有樂浪 北有靺鞨 則殆古漢時樂浪郡之屬縣之地也 新羅人亦以稱樂浪 故今本朝亦因之 而稱樂浪郡夫人 又太祖降女於金傅 亦曰 樂浪公主
또 백제 온조왕(溫祚王)의 말에,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으로 말갈이 있다.” 하였으니, 아마도 옛날 한나라 시절 낙랑에 속해 있던 현(縣)의 땅일 것이다. 신라인들도 낙랑이라 불렀기 때문에, 지금 우리 고려에서도 이에 따라 낙랑군부인이라고 부른다. 또한 태조께서 따님을 김부에게 시집보내면서도 역시 “낙랑공주#S-2”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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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 외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진한은)낙랑의 사람들을 아잔(阿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동쪽의 사람들이 我[우리]를 阿라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의 남은 무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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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진한은 낙랑을 아잔(阿殘)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는 위의 진흥왕을 비롯하여 지속적으로 낙랑군공, 낙랑왕 등의 낙랑과 관련된 책봉호를 받거나 칭한 바 있다는 점에서 신라와의 친연관계가 부각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1] 이는 위의 삼국유사의 낙랑국의 기록과 이어지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역사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부와 관련이 있음을 유추하게 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26년 봄 2월,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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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낙랑군과의 관계에 대한 학설
최씨낙랑국과 낙랑군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설은 크게 둘로 나뉜다. 고전적인 시각은 최씨낙랑국 = 낙랑군으로, 이병도 등도 이 설을 따랐다.
3.1. 동일설(기존설)
기존설의 지지자들은 외방의 군에 살던 토착주민들이, 기존의 군 체제를 빼앗아 독립하여 최리를 '왕'으로 내세웠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낙랑국을 기록한 대무신왕 시대에 중국은 왕망의 신나라가 실정을 거듭해서 혼란기였으니, 중앙 권력이 없을 때 낙랑군과 같은 외지의 군이 독립하고 왕국을 자칭하는 일은 개연성이 있다.
원래 한나라의 군국제 체계에서 중앙에서 파견한 태수가 다스리는 군(郡)과 왕의 영지인 국(國)은 봉헌한 왕이 있는가? / 행정관이 태수인가, 국상인가? 하는 차이를 빼면 거의 같은 행정체계였다. 이성규(2006)에 따르면[2] 실제로 한대의 문헌 및 금석문에서 군을 방(邦) 또는 국으로 적은 예는 많다.[3] 또, 태수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함께 가지니 중앙권력이 무너진 혼란기에 가장 큰 이점을 얻었다. 어차피 신-한 교체기에는 '황제'를 자칭한 지방 군벌도 많았으니, 낙랑만큼 본토에서 먼 곳에 '낙랑국왕'을 자칭한 독립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여기에서 미천왕 때 한사군 중의 낙랑군을 병합했기 때문에, 만약 이 둘이 같다면 낙랑은 2번 멸망해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의 기사에
라고 적었으니 미천왕 시대에 멸망한 낙랑군=광무제가 재설치한 낙랑군이라고 보면 기록상의 오류는 없다.27년(서기 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했다.
즉, '''이전의 낙랑군 → 독립해서 최씨낙랑국 → 고구려에 멸망 → 광무제의 재정벌과 재설치 → 미천왕 때 비로소 멸망'''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논리면 백제 온조왕과 근초고왕 때 각각 멸망시킨 마한[4] , 대무신왕 시기부터 광개토대왕 시기까지 도대체 몇 번을 발렸나 모르는 부여 등도 있다. '멸망한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네염' 또는 '멸망에 준하는 타격을 주었으니 이 쯤이면 멸망한 것으로 친다'라는 논리일 수 있다. 애초에 복속이라는 말이 멸망일 때도, 그냥 깨갱일 때도 있어서...
사실 광무제의 낙랑 정벌을 어떻게 볼지는 이 기존설에서도 애매하다. 중국 기록에서 광무제의 낙랑 정벌은 낙랑에 살던 토착민 '왕조(王調)'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낙랑태수를 죽이고 독립한 탓이며, 서기 30년의 일이니 시간적으로도 14년이나 차이가 난다. 만약 모든 기록을 그냥 긍정하는 상태로 취합한다면
이라서 정신없는 시간표이다. 또한 최리의 반란, 대무신왕의 낙랑 함락, 44년의 광무제의 재정벌 등은 중국 기록에 없고, 미묘하게도 삼국사기는 낙랑국을 서기 32년[7] 부터 처음 말한다. 관련 기록들의 의문[8] 을 어떻게 다룰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또한 44년 광무제 재정벌 후, 거의 200년 이상 역사 기록에서 단절된 후에 미천왕에 멸망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둘을 연속성이 있는 하나의 나라 혹은 군으로 볼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둘은 서로 다른 별개로 봐야 한다.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
→ 기원후 25년, [5]
왕조가 반란을 일으켜 낙랑태수를 자처→ 30년, 광무제가 이를 정벌
→ (아마도) 최리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자처
→ 37년, 대무신왕의 낙랑 점령[6]
→ 44년, 광무제의 재정벌, 낙랑군으로 되돌림
→ 313년, 미천왕 때 멸망
3.2. 별개설
만화 바람의 나라가 채용하였다. 고대 중국에서 각지에 번군을 세운 적은 많아도 그 번군의 수장을 '왕'이라 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9] 낙랑군 태수들 가운데 최리라는 이름의 사람도 없었으니, 낙랑군이 아닌 다른 나라로 봐야 한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인 신채호는 낙랑군과 낙랑국을 같게 본 잘못이 다음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상고사에는 '평양 부근을 낙랑이라 불렀으며, 서한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진번, 임둔, 낙랑, 현토 등의 지역을 공격하고 병합하여 그 자리에 각각 진번군, 임둔군, 낙랑군, 현토군을 만들 계획이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하지만 각 지역을 병탄하기 위한 병사들은 모두 동명왕에게 패퇴해 결국 그 땅에 4군을 설치하진 못하고 번조선이 있던 자리에 지리멸렬하게 현토군,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을 세워 자기만족했다'라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신채호 개인의 주장을 마치 사실처럼 말하였다는 사료적 비판이 있으며, 실제로도 그의 주장은 고고학적이나 문헌상 근거가 사실상 없다. 더구나 이 설은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시각 아래 세워졌으나, 고고학적으로 평양에서 중국의 유물이 나오면서 폐기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낙랑을 공격했을 때 고구려는 아직 약소 국가였고, 반면 당시 한나라의 지도자였던 광무제 유수는 사실상 동한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인데 이 시기에 고구려가 한나라군을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 있다.
한편, 경북대학교 사학과의 주보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절충적 가설을 주장하였다.
아래에서 언급하듯이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서는 낙랑국 점령의 기사가 낙랑 점령의 기사보다 5년 일찍 별개의 기사로 나온다. 낙랑군과 낙랑국이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문제나 낙랑 태수중에 보이지 않는 '최리'라는 이름 등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낙랑국과 낙랑군은 엄연히 다른 정치집단이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모두 평양 부근이었으며, 아마 둘이 공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낙랑군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 국가 체계도 정비한 나라가 중국 기록에 전혀 안 나온다는 점을 풀어야 하는 난점이 있다. 낙랑군의 바로 옆이라는 점 때문에 이 문제가 두드러지지만, 사실 낙랑군의 바로 옆이 아니라도 같은 문제가 있다. 중국측 기록에 마한에 속하는 작은 나라의 이름들까지 나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단순히 한반도에 관심이 적었다거나 거리가 멀어서 교류가 없어서라고 하기는 어려워서다. 그러므로 이 가설이 옳더라도 아마 그다지 오래 존속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추정한다. 신라사 전공이라는 점에서도 마이너스를 받는다.
3.3. 낙랑군에서 이탈한 반독립적 소국설
자명고 설화에서 낙랑국왕 최리를 만난 곳이 옥저라는 점[10] , 그리고 한사군의 영동 7현 (낙랑군 동부도위, 구 임둔군의 일부) 지역의 군장들이 광무제 시기 이탈했다는 점 등을 들어 최씨낙랑국은 낙랑군 중 가장 지배력이 부족한 영동 7현 즉 현재의 낭림산맥 동쪽 함경도 지역의 주요 군장세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11]
이러한 설에 따라 최씨낙랑국을 추정한다면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하던 옛 임둔군 7개현(영동 7현) 중 유일하게 옥저 세력권에 편입된 함흥 일대의 '''부조현(夫租縣)'''이 유력하다. 관련기사 이 설을 따른다면 대무신왕 대 고구려의 동남부 일대 점령[12] 과도 지정학적으로 연결되며, 또한 32년의 낙랑국 점령과 37년 낙랑군 정벌을 분리하여 설명 가능한 이점이 있다.
당시 옥저는 왕이 없어 각 부족들이 군장인 삼로(三老)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옥저를 하나의 중앙집권적 국가를 지칭한다기보단 지명이나 종족을 이르는 것으로 보는 사학계의 관점으로 볼 때, 낙랑군으로부터 반독립적 자치를 누린 '옥저 일대'의 부조현은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만족한다는 점에서 매력 있는 가설이다. 또한 존속 기간이 짧았고 당시는 낙랑군도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므로 중국측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쉽게 설명된다.
따라서 56년 고구려의 동옥저 병합 기록은 이러한 가설에 비추어 볼 때, 함흥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하던 동옥저가 그 중심을 잃은 뒤 태조대왕 대인 56년에 고구려에 그 일대를 모두 점령당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반독립적으로 활동하던 군장 중 가장 강한 세력이 낙랑왕 칭호를 지역 내에서 사용했으리라는 가설은 충분히 설득력있지만 이를 증명할 별도의 문헌적/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4. 기타
현대 한국어 발음은 [낙랑국→낙낭국→낭낭국]이다. 폐쇄음 ㄱ으로 인해 유음 ㄹ이 비음 ㄴ으로 비음화된 후,[13] 그 비음 ㄴ으로 인해 폐쇄음 ㄱ이 비음 ㅇ으로 비음화된다고 본다.
반면 북한에서는 '락랑국'이라고 적고 [락랑국→랑랑국]이라고 읽는다. 유성음 ㄹ로 인해 무성음 ㄱ이 유성음 ㅇ으로 유성음화되지만, 비음 ㅇ으로 인해 유음 ㄹ이 비음 ㄴ으로 비음화되진 않는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자음동화 참고.
관련유물로는 국보 89호 평양 석암리 금제띠고리가 있다. 낙랑국이 백제나 신라못잖게 섬세한 세공 기술을 지녔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
자매품으로는 대방국이 있다. 책계왕의 장인이 다스리던 나라라고 하는데 그당시 대방군의 수장은 왕으로 불린 적이 없으므로 혼동하기 쉬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