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시제

 


'''묘호'''
없음
'''시호'''
무순왕(武順王)
'''능호'''
패릉(霸陵)
'''연호'''
경시 (更始, 23년 ~ 25년)
'''성씨'''
유(劉)
''''''
현(玄)
''''''
성공(聖公)
'''생몰 기간'''
? ~ 25년
'''재위 기간'''
23년 ~ 25년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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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나라의 임시 황제. 왕망신나라를 멸망시킨 뒤 한나라를 부흥시키고 황제가 된 사람이지만 짧은 재위 기간인 2년 만에 죽임을 당하고 정권이 몰락해서 정통 황제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잠시 재건한 한나라 정권을 그의 이름을 딴 현한(玄漢)이라고 부른다.

2. 생애


경시제 유현은 전한(前漢)의 황제인 경제(景帝)의 6대손, 장사정왕(長沙定王)의 5대손, 용릉절후(舂陵節侯)의 4대손이며, 후한을 세우는 광무제 유수의 족형이다.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 사람이다.
유수의 형 유연은 신나라에 대항해 거병하고 평림병·신시병과 세력을 합쳤는데, 나중에 이 반란군 연합이 황제를 추대하려 할 때 유연과 평림병 소속의 유현이 후보로 거론됐다. 둘은 같은 장사왕 후손이긴 하지만 유현 쪽이 큰집으로, 유현은 후작을 계승한 용릉대후 유웅거의 증손이고 광무제는 유웅거의 동생인 울림태수 유외의 증손이었다. 그렇다고 유현이 이 집안에서 가장 좋은 혈통이었냐면 그건 아니고, 유연 쪽에는 용릉절후의 적손 유지[1]가 있었으며 평림병·신시병 쪽에도 유지의 사촌 동생인 유가[2]가 있었으나 이들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평림병과 신시병이 유연을 꺼려 나약한 유현을 밀어주자 유연 측에서 이를 받아들여 유현이 황제로 추대됐다.[3]
이후 경시제의 휘하에 있던 유연의 아우 유수(훗날의 광무제)가 곤양대전에서 왕망이 거느린 대군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고, 이는 왕망이 멸망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하여 남양 호족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유연의 위세가 드높아지자 경시제는 이를 경계한 나머지 결국 유연을 토사구팽하여 죽여버렸다. 다만 유수는 곤양전투의 최대 공로자로 인망이 높았을 뿐 아니라 형이 죽은 후에도 경시제에게 복종하는 제스쳐를 취했으므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못하고 다만 다른 군벌들을 토벌하라는 명목으로 하북 땅으로 보내버리는 선에서 그쳤다.[4][5]
곤양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왕망이 살해당하고 그 세력이 붕괴하자 경시제는 완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적미의 농민반란군들도 경시제에게 복속해왔다. 이후 경시제는 재위 2년(24) 2월에 또다시 장안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일족의 공신들을 왕후로 삼는 등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 왕조를 부흥했다는 안도감에 취한 경시제는 천도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방탕과 안일함에 빠져들었을 뿐 아니라, 왕망의 전횡 및 오랜 내전으로 황폐화된 지방 향리의 질서와 민생을 회복시킬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이에 실망한 적미의 우두머리들은 한고조 유방의 손자인 유장의 후손 유분자를 추대하여 천자로 삼고는 서기 25년 9월에 이르러 장안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경시제 휘하의 관원들이 모조리 배신을 때리고 적미에게 붙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경시제는 홀로 말을 타고 탈주하였으나, 결국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는 10월에 적미에게 항복하면서 황제의 자리를 유분자에게 바쳤다. 그러나 후환을 두려워한 적미의 지도자들은 그해 12월에 경시제를 교외로 불러내서 그를 암살해버렸다. 이후 장안 일대를 중심으로 약탈과 전횡을 일삼던 적미적들 또한 광무제 유수에 의하여 쓸려나가게 되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된 광무제는 한나라 왕실을 부흥하여 후한의 시조가 되었다.

3. 기타


'경시(更始)'는 시호가 아니고 그의 재위 기간에 사용했던 연호이다. 후한을 비롯한 후대 왕조에서 정통 황제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황제로서의 묘호와 시호를 받지 못했다. 대신 후한 광무제 유수가 그를 회양왕(淮陽王)으로 추증하고, 무순(武順)이라는 시호를 올려서 작위와 시호를 합친 명칭인 회양무순왕(淮陽武順王)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의 무덤을 황릉처럼 능호를 주어 패릉(霸陵)이라 했다.

4. 둘러보기(계보)


'''유한의 역대 황제'''
15대 정안공 유자영

'''임시 경시제 유현'''

16대 세조 광무제 유수
유분자(적미)
'''현한의 역대 황제'''
1대 왕망

'''1대 경시제 유현'''

후한#s-1 1대 광무제 유수
유분자(적미)



[1] 광무제를 계속 섬겨 나중에는 성양왕의 작위를 받았다.[2] 훗날 경시제의 한중왕이 됐으나, 경시제 정권이 붕괴되면서 원래 수하였던 연잠이나, 적미나, 공손술 등의 위협을 받아 생존을 위해 분투하다 광무제에게 투항했다.[3] 이는 아마도 비교적 성격이 유약한 유현을 내세우며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만만한 놈을 황제로 세워놓고 실속은 자기들끼리 챙겨 먹으려는 속셈이었다는 것.[4] 사실 이때에도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고 그냥 싸우다 죽으라는 식으로 내던져 버린 것에 가까웠다. 실제로 유수는 당시에 온갖 위험을 겪었으나 결국 이를 진압하고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5] 유수는 형이 죽었음에도 유현에게 아무런 유감도 표시하지 않고 평범하게 사람들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형의 죽음을 슬퍼해서 울면서 유현을 원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