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궈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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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쑤주(苏铸, Sū Zhù; 소주). 화국봉이란 이름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화'''구'''국'''선'''봉'''대(中'''華'''救'''國'''先'''鋒'''隊")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가명이다.[1]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무원 총리로 마오쩌둥의 직계 후계자. 그러나 1978년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후 당 고위직에 머물긴 하지만 권력은 없었다.
2. 생애
2.1. 정가 입문
1921년 산서성 교성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상업 학교에 재학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에 입당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으며, 국공내전에도 참전했다.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하자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성 샹인현 당서기가 되었다.
후난성에서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점점 직위가 상승했으며, 1958년에는 부성장까지 이르렀다. 1959년 펑더화이가 실각하자, 마오쩌둥을 열렬히 지지하면서 펑더화이를 비판하고, 펑더화이의 고향이기도 해서 펑의 입김이 셌던 후난성에서 펑더화이의 부하들을 몰아내면서, 마오쩌둥의 눈에 들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주창했다가 대실패를 한 대약진운동 직후인 1961년 마오쩌둥에게 인민의 몸무게가 줄고 있으며 가축들까지 굶주린다고 직언했는데 마오쩌둥은 진실을 말하는 것은 화궈펑 뿐이라며 그를 칭찬하며 신임했다.
마오쩌둥 노선의 열렬히 지지하였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열심히 문혁 정신(?)을 퍼뜨렸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고향 후배[2] 였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면담할 때는 표준중국어가 아니라 후난 사투리로 말할 정도였다.[3] 이렇게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계로 발탁되어 공안 부장, 그리고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
1976년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덩샤오핑과 장춘차오를 제치고 온건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국내 정쟁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져 총리 대리에 올랐고, 마오쩌둥이 지명하여 마오의 공식 후계자가 되며 마오 사후 공산당 주석, 국무원 총리,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이란 당 / 정 / 군의 최고위직 3자리를 모두 거머 쥔다. 이 세자리를 모두 가지고 있던 사람은 화궈펑이 유일한데, 마오쩌둥은 행정부 수반인 국무원 총리를 저우언라이에게 양보했고, 덩샤오핑 역시 그에게 밀려 총리를 지내지 못했으며, 덩샤오핑 이후에는 아예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를 겸직하지 못하게 된다.
2.2.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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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기를 높이 들고, 강철의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마오쩌둥 사후 1977년 2월에 만들어진 화궈펑 우상화 포스터. 화궈펑은 마오쩌둥 대신 스스로를 우상화하려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에 의해 제동이 걸린다.
1976년 4월 30일 마오쩌둥은 뉴질랜드 총리 로버트 멀둔과의 회담 직후 화궈펑에게 "천천히 하고 서두르지 말라. 과거의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네가 일을 하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최고 지시를 붓 글씨로 남겨주었다.[4] 화궈펑은 이 붓 글씨를 내세워 자신이 마오의 신임을 가진 절대적인 후계자라고 내세웠다.
화궈펑은 당시 무명이었기 때문에 4인방에 휘둘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으나, 마오 사후 한달만에 화궈펑은 예젠잉과 합작하여 4인방 분쇄 사건으로 4인방을 정치판에서 단숨히 제거하는 기염을 토한다. 갖은 언플과 무리수로 국정을 농단하던 4인방은 축출되면서 화궈펑이 대권을 손에 쥐는가 싶었는데...
2.3. 양개범시
화궈펑은 사인방 실각후 위의 "양개범시" 론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물론 문혁 시대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문혁을 청산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마오쩌둥 흉내를 내면서 당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당내에는 화궈펑보다 경력이 화려하고 카리스마가 대단한 원로들이 줄줄히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먹힐리 없었다. 당시 신화적인 대장정에 참가한 당원로만 해도 당내에 수십명이 살아 있었다. 화궈펑은 엄밀히 말해서 당시 55세로 72세인 덩샤오핑은커녕 관록과 명성 자체가 그 심복인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 정도의 레벨이었다.兩個凡是(양개범시) - 무릇 마오주석의 결정은 반드시 옹호해야 하고, 무릇 마오주석의 지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게다가, 마오 시절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당에 복귀하여 점점 세력을 강화하면서 아이러니하게 그를 사면해 준 화궈펑의 권력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화려한 혁명가의 커리어에, 워낙 당과 군에 신망도 높았고, 무엇보다도 건국 후에 충칭 시장을 맡으며 발군의 행정 능력을 보여 저우언라이에 의해 발탁되어 중앙 정계로 떠올랐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혁명가로서나 행정가로서 지지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무난한 지도력과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라는 명분을 갖췄어도, 실질적인 권력 기반이라고는 후난성 한 곳밖에 없는 화궈펑이 덩샤오핑을 상대하기는 너무나 힘겨웠다.
게다가 중국 대중들이 몇십년동안 찌들은 가난, 그리고 문화 대혁명 때 마오이즘의 만행에 환멸을 느껴서 마오의 노선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마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문혁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화궈펑도 덩달아 인기가 폭락했다. '''화궈펑에게 문혁 부정이란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양개범시라는 말로 완만히 문혁을 청산하려 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반발만 높이고 말았다.
그에 비하여 덩샤오핑은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이끈 건국의 영웅 중 한 명인 데다가, 그의 지지자들이 문혁 중에 대거 숙청되었다고 해도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의 상당수가 건재했다. 특히 국공내전 시절 덩샤오핑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제2 야전군 출신들이 군 상층부에 대거 포진해 있어서 군부의 지지가 덩에게로 쏠리게 된다. 거기다가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이 식량 자급 자족, 차관 전액 상환 등의 우수한 실적을 내면서 화궈펑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사실 양개범시는 자신은 마오의 정통 후계자이니 문혁과 마오사상은 옳지만 사인방이나 극좌파처럼 과격한 숙청과 폭력적으로 하지말고 온건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노선을 걷자라는 생각이었다.
2.4. 정권 선양
결국 화궈평이 권력을 잡은지 2년만인 1978년 12월 덩샤오핑이 당을 장악하고 사실상 중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화궈펑은 1979년 문화 대혁명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자아비판을 하고 사임하였다. 화궈펑은 차례로 1980년에는 국무원 총리직, 1981년에는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직을 내줌으로써 완전히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고 국정을 어지럽힌 사인방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등 나름대로의 역랑을 보여주었지만, '''시대 흐름을 완전히 잘못 타서 실패한 사례이다.'''
그러나 권력 의지가 약했는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이용해 덩샤오핑과 권력 투쟁을 벌이지 않고,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선양을 했기 때문에 덩샤오핑에 의해 예우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화궈펑은 문혁을 대놓고 연장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강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덩샤오핑을 다시 중앙 정계로 불러들여 기용했고, 그의 개혁안을 상당히 받아들여 그가 성과를 내는 것을 허용한 것에서 보이듯이, 아주 보수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남의 아래 머무는 것에 만족할 사람도 아니었고, 본인도 덩샤오핑을 제어할 만한 정치력이 없었다.
이후 실권은 잃었지만, 하야한 후 박해를 당해 문혁 기간 목숨을 잃었던 류사오치나 펑더화이와는 달리 덩샤오핑에 의해 일정 대우를 받았다. 그 이전엔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면 얄짤없이 대가리 뎅겅이거나 설사 목숨을 건져도 시골 오지로 귀양 혹은 친인척 전원 추방이었지만, 이 때부터 실권없는 명예직으로 밀려나는 정도로 그치게 된다. 반대파를 굳이 숙청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체제가 안정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5][6] 그래도 2000년대 후반에 그나마 최고령 선배 정치인이었으며, 장쩌민도 정치적 선배 형님이었던 화궈펑을 전직 국가원수로 예우하였다.
그래도 사람됨은 좋았다는 평. 화궈펑이 마오지지자인 걸 빼면 시대의 흐름을 알고 순순히 선양했고, 온건한 인물이었다는 게 중평이다. 1차 천안문 사태도 사인방의 윽박으로 저질른 건 흠이지만.
2.5. 노후 및 사후
화궈펑은 정년(70세)이 되는 1991년까지 당 중앙 위원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에도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 점지한 중앙 위원은 정년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2000년대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화궈펑뿐만 아니라 소4인방이라고 불리던 화궈펑 일파(왕둥싱, 지덩쿠이, 우더, 천시롄)도 감방이나 수용소로 가지 않고 한직이나마 좌천으로 마무리되어 천수를 누렸다. 이중 왕둥싱은 100세가되는 2015년에야 사망했고,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전사이자 우수당원"이라는 추도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9월에는 탈당설 오보가 났다. "나는 공산당원으로서 당과 당원들이 나날이 부패해지고 변질되는 상황을 통탄한다. (...) 이같은 부패로 당이 민심을 상실해 국가와 민족의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 오늘날 공산당이 과거 국민당 및 자산 계급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공산당의 부패를 강하게 질타한 다음에 후진타오 등의 만류에도 탈당을 하겠다고 표명하였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는 중국 관련 뉴스에 자주 있는 해외 반중국 화교 언론[7] 이 만든 가짜뉴스로 전혀 근거가 없다. 실제로 화궈펑은 이후 2007년 공산당 17차 당대회에 출석한 바가 확인되었다.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다가 베이징 올림픽 관람을 준비하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2008년 8월 20일에 8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해가 2008 베이징 올림픽 기간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거의 묻혔다. 물론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그를 바바오산 혁명공묘[8] 에 화장했고, 그 자리에 장쩌민, 후진타오 등이 모두 참석했다. 시신은 고향인 산시성 쟈오청에 안장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오랜 경험을 거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당과 국가의 중요 직무를 역임한 화궈펑 동지"를 공식 추도사로 정했다.
화궈펑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사이에 끼어서 권력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에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고향 산시성(산서성)[9] 에서는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오른 자랑스러운 인물라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였다. 그들은 화궈펑이 문혁 당시 마오쩌둥의 위세를 내세우며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무고한 이들을 박해한 장칭 등의 4인방을 제거하고, 별다른 혼란 없이 권력을 선양한 것을 공으로 쳤고 2011년에 산시 사람들의 주도로 고향에 대대적인 능묘를 조성했고, 화귀펑의 유해를 이장했다. 무덤이 크고 아름답게 조성되었는데 그 규모가 축구장 14개 규모인 10만㎡에 이르고 365개의 화강암 계단을 쌓아올린 뒤 그 위에 묘실과 비석 등을 설치했고 묘비의 높이도 5.5m나 된다. 이는 마오쩌둥의 무덤인 모주석기념당보다도 규모가 훨씬 크고 옛 황제들의 무덤과 비견될 정도의 크기인데 이 때문에 중국내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고, 중국 언론에서는 "별로 한 것도 없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돈을 쓴다"며 산시성 지방정부를 비판했을 정도였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모두 군인 고위직을 거쳤고, 딸들도 행정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2019년 10월 1일 건국 70주년을 기념해 성대히 열린 열병식에서 군대가 지나간 후 민간인들이 각 시대의 의상을 입고 그 시대의 지도자 초상화들을 앞세운 퍼포먼스를 벌였다. 중공정권의 모든 최고지도자의 초상화가 나온 것은 물론 국조라고 할 수 있는 쑨원의 초상화도 행렬에 나왔지만, 유일하게 화궈펑의 초상화만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3. 주요 경력
[1] 그래서 자녀들은 모두 화씨가 아니라 쑤씨이다.[2] 원래 산서성 출신이지만, 중국 건국 후 후난성에서 20년간 살았기 때문에 후난성인으로 간주된 듯 하다.[3] 이건 중국인들의 특징이다. 동향인끼리는 모어인 사투리로 말한다. 마오쩌둥의 경우 동향인인 펑더화이나 류사오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사투리를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4] 장칭 평전의 경우에는 "당신이 맡고 있어서 내 마음이 편하오."로 번역했다. 이후 4인방은 과거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는 마오쩌둥의 교시를 문혁을 계승하라는 것으로 멋대로 해석,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려다가 숙청당했다.[5] 같은 공산권 국가인 소련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스탈린 시대까지는 피의 숙청이 일상이었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대가 되면 권력 투쟁에서 밀려도 실권이 없는 한직이나 지방 전출로 끝나게 된다. 반대파에 의해 밀려난 흐루쇼프도 죽을 때까지 고급 아파트에 연금, 심지어 지방별장까지 보장받고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6] 마찬가지로 자오쯔양 전 총서기도 1989년 천안문 6.4 항쟁 당시 다당제와 언론 자유 보장 등 급진적 정치 개혁을 요구했던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실각했지만, 당적은 유지했으며 감시원이 따라붙고 언론 접촉이 금지되긴 했지만 계속 베이징에서 살다가 2005년 사망했다.[7] 대표적으로 미국에 서버를 둔 보쉰(boxun.com)이 있으며, 파룬궁 계열 대기원시보도 마찬가지다. 이들 반중 화교 언론들은 주로 가짜 뉴스로 악명이 높으며, 장쩌민 체포설, 장쯔이, 보시라이 성상납설 등을 퍼트리다가 오보로 판정되거나 고소미에 걸려 거액을 물어준 바 있다.[8] 대한민국의 현충원 같은 중국의 국립묘지. 과거 문헌에서는 한국식 한자독음에 따라 팔보산 혁명묘지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다.[9] 산서성 역사에서 유일하게 통일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오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