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조선)

 

王希
생몰년 미상.
1. 개요
2. 생애
3. 후사
4. 기타


1. 개요


조선 중종 시기 개성 왕씨 후손을 자칭하며 숭의전에서 고려 왕조에 제사를 지낸 인물. 본관은 '''전주'''이고 당시 거주지는 충청도 신창현(현 충청남도 아산시).

2. 생애


사족 무반 출신이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한량으로 정로위(定虜衛)에 속했다. 거주지인 신창현의 유향소(留鄕所)에 속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신창현에서는 유력 인사였다. 1540년(중종 35) 고려의 봉사손 왕적이 후사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고려 왕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맡은 왕씨 봉사손은 조선 왕조로부터 관직, 경기도 마전군의 농지와 노비를 제공받는데, 왕희가 본관을 고쳐가며 개성 왕씨의 후손을 자처한 것은 이러한 혜택 때문이었을 것이다.
봉사손 후보중 아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왕희는 후계자로 낙점됐고, 종6품의 숭의전감에 오른다. 왕희는 1588년(선조 21) 왕훈이 왕희의 본관 조작을 밝히기 전까지 49년간을 개성 왕씨로 살았다. 육조의 해당 부처에서 왕씨 호적을 분석한 결과 왕희의 관향 사칭 정황이 드러났고, 왕희는 관작을 삭탈당했다. 이후의 삶은 알 수 없다.

3. 후사


결국 왕적때처럼 봉사자 후보를 또 새로 정해야 했고, 선조는 1589년(선조 22) 7월 4일 의정부에서 정승, 판의정부사 등과 논의했다. 이 문제는 예조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좌의정, 판의정부사)이 많았는데, 선조는 대수가 가깝고 자손이 많은 자로 정해야 한다는 영의정 류전의 의견을 따라 5명의 후보를 2명으로 추렸다.# 다음은 실록에서 언급된 후보의 목록이다.
  • 왕려(王礪)
당시 고려 태조와 동양원부인 유씨[1] 소생인 효은태자 왕원(王垣)의 종가 종손으로 알려졌으나, 향리의 후손이었기에 낙점되지 못했다.
  • 왕희걸(王希傑)의 후손
왕희걸은 왕려와 마찬가지로 효은태자 왕원의 17대손이나 왕원의 차남 온결공(溫潔公) 왕정(王禎)의 후손이므로 왕려보다는 족보상 손아래이다. 다만 5대조 왕미(王亹)가 조선 개국 후 교서감을 지냈고, 아버지 왕무(王懋)는 통훈대부 행 경흥도호부사를 지냈다. 왕희걸 본인 또한 1534년(중종 29)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1위로 급제하고# 1543년(중종 38) 식년시 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였으며#, 명종 때에 이르러선 홍문관 부제학에 올라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또한 아들 왕빈(王儐)은 통훈대부 행 문화현령, 손자 왕경조(王景祚)는 1572년(선조 5) 별시 2회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 후 고부군수를, 왕경우(王景祐)는 1603년(선조 36) 식년시 진사시 2등 16위 급제# 및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 병과 4위 급제# 후 군수를 지내는 등 직계 선조 및 후손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간 바 있다.
  • 왕휘(王煒)
당시 명망이 있었고 사람됨이 무던하였다고 하는데 자손이 적었다. 최종 후보.
  • 왕훈(王勳)
왕희를 쫓아내 가문을 지킨 장본인. 자손이 많지만 본인은 다른 후보들보다 연로해 당시 이미 백발의 노인이었다. 최종 후보.
이튿날인 7월 5일 재차 논의가 있었다. 선조는 승정원에 시켜 왕훈의 노망 여부를 물어보도록 했고, 백발이긴 했지만 말에 어긋난 것이 없다는 승정원의 회신을 듣고 최종 후보 중 왕훈이 마침내 낙점됐다.#

4. 기타


300여년 뒤 고종 때 왕희의 후손 왕사희(王師熙)가 같은 꼼수로 숭의전참봉에 임명돼 제사를 지내다 발각되는 해프닝이 또 벌어진다. 전임 참봉 왕재기(王在基)가 일찍이 발견해 개성부에 알렸고, 후에 암행어사 이헌영이 고종에게 건의해 결국 파직됐다.

[1] 유금필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