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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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 유씨 가문 출신 배향공신'''
'''태조'''
'''의종'''
'''충절공 유금필'''
'''공숙공 유필'''

'''고려국 도통대장군
유금필
'''
'''시호'''
'''개국충절공(開國忠節公)'''
'''작위'''
'''개국공(開國公)'''
'''삼사'''
'''태사(太師)'''
'''본관'''
평산 유씨(平山 庾氏) / 무송 유씨(茂松 庾氏)
'''이름'''
금필(黔弼)
'''아들'''
유긍, 유관, 유유, 유경
''''''
동양원부인
'''생몰연도''''
? ~ 941
1. 개요
2. 이름에 대하여
3. 역임 관작, 지휘했던 부대
4. 생애
5. 평가
6. 유자우 묘지명
7. 대중 매체에서
7.1. 드라마 태조 왕건


1. 개요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호족. 평산 유씨(平山 庾氏)[1]와 무송 유씨(茂松 庾氏)의 시조.[2] 태조 신성왕의 여섯 배향공신 중 유일하게 후손도 태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후삼국시대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할 수 있게 한 최고의 명장이다.

2. 이름에 대하여


유검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흔히 유금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한자를 음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黔이라는 한자가 검을 검, 귀신이름 금이라는 2가지 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며 오늘날에는 유금필이라는 명칭이 유명하지만 조야기문(朝野記聞)같은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유검필이라 표기되어 있다. 명칭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며 당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검필, 현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금필로 읽으면 된다.

3. 역임 관작, 지휘했던 부대


'''향직 품계'''
대상(大相)
일리천 전투 시기의 품계.
대광(大匡)
고려 초 건국 공신들만 받은 고위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유자우 묘지명 기록.
'''직위'''
마군장군(馬軍將軍)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925)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933)
우장군(右將軍)(934)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935)

삼한통합제오호기위(三韓統合第五虎騎尉)
유자우 묘지명 기록.
태사(太師)

'''작위'''
개국공(開國公)
유자우 묘지명 기록.
'''시호'''
개국충절공(開國忠節公)
개국공신이기에 시호에 개국(開國) 미칭이 덧붙여 졌다.[3]
'''고려 북벌 군단
開定軍
개정군
'''
'''지휘관'''
'''유금필'''
'''휘하 장병'''
기마병 & 보병 3,000명
'''고려 남정 군단
中軍
중군
'''
'''지휘관'''
'''유금필'''
관무, 관헌 등
'''휘하 장병'''
기마병 9,500명
유금필은 후삼국시대를 끝낸 일리천 전투에 참가했다. 유금필은 자신이 복속시킨 북방 이민족전쟁에 참여시켜 총 9,500명의 정예 기마병을 끌고 내려온다.

4. 생애


유금필이 태어난 연도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지만 935년 나주 탈환에 앞서 자신이 이제 늙었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이때 장수로서 늙은 나이인 50세가 넘었다고 본다면 최소 880년대쯤 태어났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918년 고려 건국 당시에는 30대 중후반 정도로 예상할 수 있겠다. 유금필은 고려의 신하이기 이전에 통일신라 평산 지방의 대호족이었는데 평산은 신라 북부에서 대곡성(大谷城), 대곡진(大谷鎭) 등이 설치된 군사 거점이었으며 신라 말 지방 통제력이 무너지자 호족 유금필은 황해도 평주군벌이 되었다. 궁예 휘하에 편입된 시기 여부는 불명확하나 평주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평주 박씨 집안의 무장이었는데 평주 박씨가 궁예에게 항복하자 유금필도 자연스레 군대로 편입되어 태봉의 마군장군까지 오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4] 왕건의 역성혁명 당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기록의 부재 탓에 알 수 없지만 역성혁명 이후 홍유와 함께 궁예의 지지 세력들이 남아있던 청주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유금필의 맹활약이 본격적으로 기록상에 나타나는 시점은 923년으로 골암진(오늘날의 강원도[5] 안변군 신좌리)에 북번[6][7]이 자꾸 쳐들어와 위협을 가하자 왕건이 유금필을 골암성(鶻巖城)으로 보내 북쪽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유금필은 북번의 추장 300여 명을 불러 성대한 연회를 연 뒤 이들이 거하게 취하자 "이제 그만 좀 깝치시지?"라고 위협하여 단숨에 그들을 복종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북번의 각 촌락들마다 사람을 보내 '너희 추장들이 복종했으니 이제 그만 깝치고 니들도 숙이라'고 하여 무려 1,500여 명이 항복해왔고 포로로 잡힌 고려인 3,000여 명을 귀환시키는데 성공해 왕건이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925년 연산진과 임존군(오늘날의 충청남도 예산군)을 공격하여 후백제의 장군 길환과 군사 3,000명을 전사시키는 큰 공을 세우며 이름을 떨치게 된다. 왕건과 견훤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대치 중이었던 조물성 전투에서도 유금필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한창 우세하던 견훤이 유금필을 두려워해서 왕건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일 정도.[8] 당시 유금필은 오늘날 충청남도 지역에서 후백제 영토를 돌파하여 경상북도 내륙 깊숙한 곳에 있던 조물성에 도달하였는데 견훤으로써는 놀라지 않을 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9]
이후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참패함에 따라 후백제의 기세가 치솟았던 928년 탕정군(湯井郡)에서 축성 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유금필은 왕건이 삼년산성[10]에서 패배하고 후백제 장군 김훤, 애식, 한장의 3천 군마에 쫓기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신속하게 후백제군을 물리쳐 왕건을 구출해냈다.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가른 930년 고창 전투 때는 왕건을 비롯한 제장들이 전투에 소극적인 가운데[11] "무기가 흉악한 도구이며 전쟁이 위험한 것은 자명한 것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겨우 승리할 판인데 어찌 적을 앞에 두고도 지는 것을 겁내는 겁니까?"라는 폭풍간지스러운 명언을 남기며 홀로 결전을 주장하는 동시에 직접 선봉에 서서 돌격하였다. 이에 고려군이 힘을 다해 싸워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유금필은 고려가 후삼국의 패권을 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2]
전투에서 맹활약하며 공을 이어갔지만 931년 참소를 받고 곡도(鵠島)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왜 유배길에 올랐는지는 삼국사기고려사 등 사서에 이유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왕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유금필을 견제하려는 다른 공신이나 패서 호족들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3] 다만 왕건 본인 역시 유금필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그랬을 가능성도 높은데 군사적 능력에 정치력까지 겸비한 무장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군주에게 경계 대상 1호일 수 밖에 없다. 태조 왕건에서는 유금필을 경계한 패서 호족들과 공신들이 연계하여 유금필을 참소한 것으로 나오는데 충분히 일리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유금필은 곡도에서 지낸 유배 생활 중에도 태조와 나라를 걱정하며 상소를 올리는 등 충의를 꺾지 않았다.
932년 후백제 수군 장군인 상귀상애가 지휘하는 특별 함대가 각각 송악대우도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상귀가 고려 수군을 불사르는 등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고려군의 함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왕건은 장수 만세를 보내 대우도를 약탈하려는 상애를 막도록 하였으나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유금필이 곡도에서 유배 중인 몸임에도 불구하고 몸소 함선을 모은 뒤 의병을 일으켜 대우도에서 송악을 넘보려던 상애를 몰아내는 공을 세웠다.[14] 이 공로 덕분인지 유배 생활을 마치고 조정으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유배를 떠난지 2년 후인 933년 정남대장군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그 사이에 유배형이 풀린 듯.
933년 5월 후백제군 사령관 견신검이 다시 신라 국경을 침공한 탓에 서라벌이 6년만에 다시 후백제 손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왕건은 다급히 유금필에게 구원 명령을 내렸고 유금필은 군사들을 모을 시간도 없어 겨우 80기만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후백제군과 조우하게 되자 겨우 80기로 후백제군을 무너뜨리고는 서라벌에 입성해 서라벌을 안정시키고 7일간 환대를 받은 다음 돌아오는 길에 다시 후백제군과 맞붙어 적장 환궁금달을 사로잡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왕건이 눈물을 흘리며 좋아한건 당연지사.
이후 운주성 전투에서는 직접 선봉에 서서 야간의 기습을 감행해 견훤의 군대를 크게 무너뜨리고 적장 상달최필,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등을 사로잡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나주 탈환 작전[15]의 총사령관을 맡아 왕만세, 충질, 오담, 능선, 향예 등과 함께 참여하여 역시 으뜸가는 공을 세웠고 견신검에 의해 금산사감금당했던 견훤이 탈출하자 함대를 이끌고 견훤을 보호하여 고려에 오게 하였다. 후삼국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리천 전투에서도 자신이 예전에 복속시킨 말갈 기병 9천 5백을 통솔해 공을 세웠고 6년 후인 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5. 평가


후삼국 쟁패기 고려의 4번타자구원 투수 역할을 모두 수행한 고려 초기 최고의 용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전쟁사 중심으로 후삼국 시대를 서술할 경우 챕터 한 파트를 아예 유금필이 혼자 독차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전공이 말 그대로 미친 수준이다.[16] 비교적 빈약하게나마 전해져 오는 후삼국시대의 기록들 만으로도 엄청난 전과를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셈. 말갈족의 기병들을 활용한 기병 군단 지휘는 물론 수군까지 능숙하게 다루며 일생동안 패배를 모르는 장수로서 일선에서 맹활약했다. 북번의 여진족을 제압하여 고려의 휘하로 두는데에도 성공했고 급기야 그들에게 '''대추장'''이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고 하니 통솔력 또한 군대를 이끄는 무장답게 꽤 출중했던 듯 싶다.
다만 의외로 개국 공신으로서의 등급은 낮아서 1, 2등 공신 목록에도 유금필의 이름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한번에 2,000여명을 임명한 3등 공신일 것이라는 추측만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918년 왕건 즉위와 920년 골암진 파견 이전까지의 기록이 없다면 궁예의 위사 출신인 박술희처럼 무명의 장수를 파격적으로 중용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겠으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직후인 918년 7월에 개국 1등공신 홍유와 함께 궁예 친위세력이 잔존해 있던 충북 진천으로 파견된 기록이 남아있다. 1등공신인 홍유를 보좌해 내려갈 위치라면 왕건 즉위 시점에 무명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다른 기록이 없으니 추정만 해볼 수 있을 뿐인데 무명은 있었으나 비밀스럽게 진행된 왕건의 역성혁명에는 기여한 바가 적어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을 가능성이 크고, 되려 왕건이 직접 정치적으로 안배를 해준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본래 이런 공신들을 책봉하는 건은 사건 이후의 혼란 및 터져나올 수 있는 반감을 수습하고 지지 기반을 얻기 위해 특별히 한 일도 없는 사람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우대해주거나 반대로 크게 공을 세운 인물을 일부러 낮은 등급에 책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신 등급과는 별개로 유금필의 딸은 태조의 9번째 비인 동양원부인이 되었고, 태조는 죽기 전에 따로 유언을 남겨서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고 이를 정도였으니 그만큼 태조가 엄청나게 믿고 의지한 장수였음은 틀림없는 팩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름돋는 전공과 더불어 사후에는 태조의 배향공신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왕건의 유언 덕분에 문종때 유금필의 후손인 유공의가 아첨이 심하고, 많은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죄를 묻지 않고, 숙주방어사에 제수했으며, 유금필의 또다른 자손인 유중경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삼촌과 조카 관계였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벼슬을 주는 것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금필의 후손이란 이유만으로 벼슬을 받았을 정도니(참조) 그의 후손들은 조상 잘 둔 덕에 호의호식했다. 다만 외가 쪽으로 왕건과 유금필의 딸 동양원부인의 아들인 효은태자는 광종대에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된다.
현존 개성 왕씨 90%를 차지하는 동양군파는 고려사에 등장하는 효은태자를 파조(派祖)로 삼고 있는데[17] 효은태자의 생모가 바로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유씨로[18] 지금 남아있는 개성 왕씨는 모계 쪽으로 유금필의 핏줄을 잇고 있는 셈이다.
사후 가림현(지금의 부여군 성흥면)의 성황신으로 모셔졌고, 가림성이라 불렸던 부여 성흥산성 안에 유금필의 사당이 세워졌다. 사당을 관리하는 무속인이 한 명 있기는 하지만 사당 자체는 유금필의 후손을 자처한 무송 유씨가 관리하고 있는데, 사당에 모셔져 있던 나무를 깎아 만든 유금필 부부와 아들, 딸의 목상이 도난당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 목상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묘연하다고 한다.
유금필의 손자 유방은 1차 고려-거란 전쟁에 낭장으로 참전, 중랑장 대도수와 함께 안융진 전투에서 소손녕의 선발대를 격파해 항복론과 할지론으로 기울던 조정 중론을 강화론으로 뒤집는 공훈을 세워 과연 유금필의 후손답다는 평을 받았다.

6. 유자우 묘지명


유금필의 후손인 유자우(庾自㥥)[19]의 묘지명이 현존한다. 유자우는 무송 유씨로 공숙공 유필의 5대손인데, 스스로 유금필에게서 계(系)가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유금필의 관작은:
  • 삼한통합제오호기위(三韓統合第五虎騎尉): 삼한통합은 후삼국 전쟁에 참여했다는 뜻일테고, 제오호기위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호기위는 왕식렴도 가지고 있었는데 직위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 하다. 왕식렴은 그냥 호기위지만 유금필은 제5호기위이다.
  • 개국공(開國公): 고려 개국공신에게 주어진 미칭. 왕식렴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엔 개국공이라고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개국충절공' 처럼 시호에 덧붙어 있다.
  •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1등위 향직 품계. 가장 높은 향직 품계다.
  • 장위익대광위협보좌성저정공신(壯威翼戴匡衛協輔佐聖底定功臣):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 저정공신호.
  • 충절공(忠節公): 시호. 고려사에도 등장.

7. 대중 매체에서



7.1. 드라마 태조 왕건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강인덕[20]이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본래 강비의 아버지인 강 장자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으나, 송악에 궁예의 황궁을 건설하는 일로 인하여 왕건에게 자주 들락거리다가 결국 왕건의 부장이 되었다. 강 장자가 가지고 있는 무력과 지략이 없고 국구[21]의 지위에 안주하는 정도의 그릇 밖에 안되는 인물인지라 유금필이 가진 출중한 능력을 활용할 생각조차 안 했고 유금필이 왕건에게 합류하는데도 막기는 커녕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유금필이 자연스럽게 왕건의 휘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상주 전투에서 왕건과 함께 공을 세우자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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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마마! 소장이 전투에 나선 이래 '''저런 괴물은 처음 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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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삼년산성 전투 中 애술

작중 최강자 중 한 명으로 왕건 휘하에선 가히 독보적인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홍문연을 모티브로 한 환선길과의 칼춤 대결에서 비기는 것을 시작으로 양길과의 전투에서 왕건의 부장으로 출전해 양길의 아우 명길에게 부상을 입히고 낙마시키며, 삼년산성에서 벌인 애술과의 한판 승부(164화)에서 당시 후백제 최강의 맹장이라 할 수 있는 애술을 몰아붙여 도주하게끔 하고 부장들을 상대로 무쌍난무를 펼치는 모습은 지금봐도 명장면으로, 분명히 진지한 전투 장면인데도 은근히 개그 요소가 많다. 그 용맹하고 포악한 맹장인 애술이 '''"저건 괴물이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야! 성문을 닫아라!!!"'''는 대사를 외치게 만들었다. 그 다음 애술을 구하기 위해 나온 부장들을 이도류로 줄줄이 다 베어버리고 홀로 성문을 돌파한다. 이후 '''"저자는 유금필이 아닌가!" "유금필입니다!! 유금필이 이쪽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어서 피하시오소서!" "유금필이다! 유금필이다!"''' 등은 전 백제군 공통의 간판 대사가 되고 말았다. 일단 이 대사만 터지면 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화려한 학살극이 펼쳐진다. 호로관 여포합비 장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삼년산성에서의 전투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이미 근방 호족들의 배신으로 본군이 전멸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왕건이 오직 삼년산성에서 기다릴 유금필만 바라보고 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삼년산성마저 애술와 양검, 용검이 차지한 상태라 유금필이 삼년산성을 얻지 못했다면 왕건은 필시 그대로 저승길 행이었을 것이다. 유금필의 활약이 왕건의 목숨을 살린 것.
백제에서 이 사람에 맞설수 있는 자는 견훤 본인과 수달,[22] 추허조 , 최필(??) 정도밖에 없을 듯.[23][24]
고창 전투 때는 불과 3천의 군사로 신검의 1만 군사를 기어이 막아내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이때 다시 한 번 굉장한 무력을 선보이는데 애술과 박술희의 일기토에 난입한 부달, 소달을 한꺼번에 상대하여 베어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신검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견훤이 고려군의 포위망에 완벽하게 포위되자 박술희에게 신검 저지를 맡기고 공격군에 합류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왕건이 평양으로 시찰을 나갔을 때(171화) 오랑캐들에게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만세를 받은 일이 발생한다. 왕건은 오랑캐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문제 삼지 않는데, 그 동안의 공적이 상당히 대단하여 왕건의 지속적인 총애를 받는 것을 껄끄러워하며 유금필을 시기하던 홍유, 배현경, 왕식렴[25] 등은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고, 이에 왕건은 격노하기에 이른다. 이 때, 최응은 "유금필 장군은 죄 없으나, 모든 신하들에게 관심을 주지 못하고 유금필만을 너무 띄운 폐하께서 이번 일의 원인을 만드신 것입니다."라며 조언하였고 덧붙여서 "신하들이 원하는 삭탈관직만으로는 부족하니, 유배형까지 내려야 한다."며 계책을 낸다. 왕건은 이를 수락하여 유금필에게 삭탈관직과 더불어 곡도 유배형을 내린다.
사실 이것은 유금필의 죄를 따져 진짜로 유배시킨 것이 아니라 유금필을 시기하여 모함한 신료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즉 신하들이 생각한 벌보다 더 과한 처벌을 내려서 그들이 제 발을 저리게 만든 것이다. 또한 이는 취약 지구인 곡도를 보강하도록 하기 위한 유배를 가장한 파견 조치였다. 최응이 계책을 내면서 노린 바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어쨋든, 유배 생활을 하던 도중 신검의 지휘하에 고려의 황도를 기습해 온 후백제군을 정식 수군도 아닌 추장들의 고깃배들을 이용해 대파해버리는 쾌거를 이룬다. 물론 이건 최승우의 지시를 무시한 신검의 형편없는 지휘 능력[26] 때문이었지만...
이 공로로 다시 유배에서 풀려 복직하였고 운주 전투에서도 참전하고 이후 신검에게 쫓겨난 후 금산사에 갇혀 있다가 나주로 탈출하는 견훤을 호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견훤 호위대장의 임무를 띄고 갔던 197, 198회에서는 평소의 유금필 답지 않게 엄청나게 긴장하고 애태우는 모습을 보인다. 무리가 아닌 것이 일반적인 망명자도 아닌 왕건의 라이벌이자 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무사히 고려로 망명할 수 있게 지켜내는 임무의 대장 역할을 맡았으니 긴장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견훤 앞에서는 한치의 흔들림 없고 예의를 갖추는 모습으로 무사히 송악까지 호위한다. 이때 견훤의 호령만으로 후백제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는걸 보고 감탄하였고, 일리천 전투에서도 자신이 선봉에 설 것을 자청하던 견훤을 왕건이 말리자, 견훤을 지지하여 함께 선봉에 섰다. 여기서 상귀를 베고, 이후 기병들을 몰고 황산벌로 퇴각한 신검의 본대를 포위해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런 그도 초창기에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왕건이 아직 궁예 휘하에 있던 시절 나주를 재탈환하려다 실패하고 회군하는 견훤을 쫓다가 최승우의 매복에 걸려 참패를 당한다. 정확히는 최승우가 혹시나 모를 추격군에 대비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으로서 일부 병력을 매복시킨 것인데, 유금필이 거기에 걸린 것.[27]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최필과 일기토를 벌이다 힘이 떨어져 죽을 뻔했는데 맞춰 도착한 신숭겸 덕분에 겨우 목숨만 건진다. 군법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왕건이 유금필을 문책하는 수준에서 끝났고, 나중에 보고를 받은 궁예도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이는지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물론 이 이후로는 그런 실수 없이 불패의 명장으로 거듭난다.
여담으로 세계관 최강자급인 유금필도 기겁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동료들과 회식을 할 때 박술희가 뱀고기를 맛있게 먹는 걸 볼 때다.[28]
본 드라마에서 왕건과 세 장수가 형제의 연을 맺는 장면은 삼국지연의의 오마주인데, 여기서 유금필은 조운 포지션이나 삼국지에서는 장비가 조운보다 연장자이자 상관인 것돠 달리 태조 왕건에서는 장비 포지션인 박술희보다 형이다.
[1] 평산은 평주(平州)라고도 부른다.[2] 정청주에 따르면 평주 유씨와 무송 유씨는 원래 다른 집안으로 고려 후기에 와서 평주 유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무송 유씨가 평주 유씨를 흡수하면서 평주 유씨의 시조였던 유금필을 자신들의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출처: 정청주 《신라말 고려초 호족 연구》 일조각, 1996년) [3] 고려사 예지 태묘조 기록.[4] 후대의 척준경,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초기, 중기, 후기를 대표하는 용장으로 왕건에게 신임을 받는 무장이기도 했다.[5] 194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바뀌었다.[6] 기록에는 이들의 주체가 나와있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말갈족 부락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 발해가 점점 쇠퇴하는 탓에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무너지면서 고려에 인접해 있던 말갈족들이 귀순하거나 약탈을 벌인 기록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7] 실제로 왕건에게 항복한 윤선이라는 인물 역시 궁예의 폭정을 피해 골암진으로 무리를 이끌고 달아난 후 이민족들을 끌어들인 탓에 주변 고을이 해를 입게 되었다.[8] 조물성에서 왕건과 견훤 중에 누가 먼저 화친을 정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9] 태조 왕건에서도 유금필이 순식간에 연산진과 임존군을 함락했다는 소식에 마침 전염병으로 인해 걱정 중이던 후백제군을 경악시키는 모습이 나온다.[10] 충청북도 보은군. 신라가 470년(자비왕 13)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요새로 동으로는 상주, 서북으로 청주, 북으로는 충주, 서남으로는 옥천, 남으로는 영동으로 이어지는 요충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보니 방어하는 후백제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11] 왕건과 다른 장군들 상당수가 거듭된 패배로 어느 정도 질려 있었다. 홍유와 강공훤은 후퇴할 길부터 닦아놓자고 말할 정도.[12] 물론 유금필의 용맹함뿐만 아니라 고창 지방의 호족들이 왕건을 지지해주었던 사실도 크게 기여하였다.[13] 당시 유금필은 여러차례 전공을 세우며 명실상부한 고려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상황이었고 고창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왕건의 최측근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왕건이 무고함을 알면서도 엄청난 공을 세운 유금필을 유배보내게 만들 정도로 막강한 세력은 고려 초기 당시에는 개국 집단인 패서계 호족들 밖에는 없었다. 외척인 나주 집단은 태생적인 한계 탓에 권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에 고려에서 큰 권력을 쥐게 되는 세력 중 신라 왕실귀족 계열은 아직 고려에 합류하기도 전이었고 후일 문벌귀족에 이르는 여러 지방의 가문들도 아직 성장하기 전의 시점이었다.[14] 태조 왕건에서는 지역 추장들의 고깃배를 모아다가 싸웠다는 묘사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고 해안 지역 호족이나 후삼국시대 당시 한반도 서해와 남해는 해외 기록에서 신라구로도 등장하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는데 친고려 성향 해적들을 규합하여 함대를 급조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15] 이런 공세가 있었는다는 것은 기록이 있으나 성패 여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이후 견훤이 배를 타고 후백제를 탈출했으므로 탈환했을 수도 있고 나주 근방의 도서같은 일부 거점 지역만 확보했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16] 신성재, 2018, 《후삼국 통일 전쟁사 연구》, 혜안.[17] 정확히는 효은태자의 후손으로 조선 초 왕씨 숙청에서 살아남은 왕미(王亹).[18] 고려 초기 왕자들의 호칭의 경우 생모의 출신지나 태어난 거처의 호칭을 따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려 태조의 제11비인 천안부원부인 임씨 소생의 왕자는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으로 불렸다던가 하는 식.[19] 유금필 → ... → 유필 → 유자량 → 유경현 → 유홍 → 유해(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과 결혼했는데, 작호로 보아 인천 이씨로 보인다) → 유자우[20] 공화국 시리즈에서 김두한, 용의 눈물에서 이지란, 왕의 여자에서 이원익 등을 맡은 배우이다.[21] 왕의 장인.[22] 수달은 박술희, 배현경, 김락, 홍유는 확실하게 발라버렸고 박술희와 신숭겸의 협공을 여유있게 상대하다 유금필까지 가세해 3대 1이 되자 비로소 물러났다.[23] 추허조의 용맹에 수달이 크게 놀랐던 걸 보면 추허조도 유금필과 맞먹을 수 있는 무장으로 보인다. 수달이나 추허조가 유금필과 직접 일대일로 겨룬 적은 없어서 확실한 우열은 시청자들의 상상의 몫. 견훤은 왕이라는 신분 때문에 직접 나서는 경우가 제한적이고, 수달과 추허조는 일찌감치 전사했기 때문에 극 후반부에서는 유금필을 당해낼 수 있는 백제 장수는 없게 되었다. 97회에서 최필이 유금필과 일기토를 하면서 부상을 입혔으나 운주성 전투에서 고려의 중급 장군인 이치에게 단칼에 발리면서 무력 밸런스가 깨져버렸다. 그런 이치가 박영규와는 호각세.... 한마디로 드라마에서의 밸런스 붕괴.[24] 단, 최필과의 전투에 앞서 유금필은 이미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던 만큼 완전 벨붕이라 보긴 힘들다. 실제로 일기토 도중 부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면서 잘 못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고..[25] 왕식렴은 북방의 여진족들이 서경 총관인 자신은 무시하고 유금필만 우러러하는 것에 반감이 컸고, 그 전에 서경 천도에 대해서 고려해볼 것을 왕건에게 제안했는데 이를 강하게 반대해서 무산시킨 유금필에게 불만이 생겼다. 또한 왕식렴으로서는 동생 왕신이 후백제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유금필이 박술희와 함께 왕식렴을 찾아가 후백제에서 온 볼모 진호를 죽일 것(=왕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을 설득하였고 결국 왕신이 백제 땅에서 죽음을 맞았으니 유금필에 대해 섭섭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26] 신검의 실책이 치명적이었던 것이, 1차로 유금필이 여기 있다고 하자 눈이 뒤집힌 애술이 땡깡을 부리자 한창 자신감에 차 있던 신검은 애술의 한을 풀어주자며 최승우와 종훈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갈 이유가 없는 곡도로 향하였다. 2차로 곡도 부근을 지나는 정탐선들이 정찰을 개판으로 하였다. 설렁설렁 대충 눈대중으로 훝어보고 지나가 섬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3차로 바람과 물살이 지극히 불리한 와중에도 신검은 최승우의 만류를 무시하고 이동을 했다가 화공을 하자 그제서야 '아이고 난 망했다!' 견훤의 말마따나 신검의 전형적인 패망 테크인 '잘 하다가 막판에 다 말아먹는' 결과의 재탕인 것.[27]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돌진만 한 건 아니고, 뒤늦게나마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척후를 보냈으나, 이미 때가 늦어 매복한 병력과 맞선다.[28] 다만, 실제 촬영에 쓰인 것은 진짜 뱀이 아닌 꼼장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