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3세
- 생몰년: ? ~ 574년 7월 13일
- 재위기간: 561년 7월 17일 ~ 574년 7월 13일
하지만 요한 3세가 교황에 착좌한 지 얼마 안 돼서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면서 동로마의 우선 관심이 동방으로 옮겨갔고, 곧바로 랑고바르드족이 쳐들어와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말 그대로 생존이 위협 받는 수준까지 내몰리게 된다. 그나마 믿었던 라벤나 총독 롱기누스조차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요한 3세는 전임 라벤나 총독이자 이탈리아 현지 상황에 밝은 나르세스에게 동로마로 돌아가지 말고, 이탈리아에 남아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나르세스의 과도한 중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로마 시민들에 의해 소요 사태가 벌어졌고, 이것이 격렬해져 결국 요한 3세마저 로마 시내를 떠나 카타콤바에서 집무를 봐야 했다. 나르세스가 죽은 572년이 되어서야 라테라노 대성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의 214p에는 '교황 요한 3세의 임기 중 도시(당연히 로마 시)의 주민들이 황제에게 '''그리스인'''보다는 고트인을 (지배자로) 모시는 것이 더 낫겠다고 적의를 담아서 의견을 전달했다[1][2] '고 했을 정도이니 민심 이반의 심각함이 엿보인다. 당시는 헤라클리우스 이전이라서 동로마의 공식언어 또한 여전히 라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의 시민들이 동로마인에게 즉 '당신들은 로마인이 아니다'는 함의를 담아서 대놓고 그리스인이라고 지칭해버린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