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공군 571편 추락사고

 


El accidente del vuelo 571 de la Fuerza Aérea Urguaya (Vuelo 571 de la Fuerza Aérea Urguaya), Milagro de los Andes (안데스의 기적)
Urguayan Air Force Flight 571, 1972 Andes flight disaster
'''항공사고 요약도'''
'''발생일'''
1972년 10월 13일
'''유형'''
CFIT, 조종사 과실
'''발생 위치'''
아르헨티나안데스 산맥
'''탑승인원'''
승객 : 40명
승무원 : 5명
'''사망자'''
29명
'''생존자'''
16명
'''기종'''
FH-227D[1]
'''항공사'''
우루과이 공군
'''기체 등록번호'''
T-571
'''출발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카라스코 국제공항
'''중간기착지'''
아르헨티나, 멘도사 국제공항
'''도착지'''
칠레 산티아고, 코모도로 아르투로 메리노 베니테스 국제공항
1. 개요
2. 사고 경위
2.1. 추락
2.2. 수색
2.3. 생존
3. 사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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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2년 10월 13일 오후 3시 34분경(현지시각) 아르헨티나 멘도사 고베르노르 프란시스코 가브리엘리 국제공항발 우루과이 공군 571편, 테일넘버 T-571 전세기가 아르헨티나안데스 산맥의 해발 11,800 피트 상공에서 안데스 산맥에 충돌하여 추락, 승객 45명중 29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생존한 사건이다.
사고 후 72일만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안데스의 기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사고 경위



2.1. 추락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의 부유층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럭비팀인 올드 크리스천스 럭비 클럽 (Old Christians Rugby Club)의 선수 전원을 태운 페어차일드 FH-227D기가 칠레 산티아고를 향해 이륙하였다. 우루과이 공군에서 페어차일드 기를 전세내었기에 대부분의 승객들은 클럽 선수들이었지만 선수 외 팀 관계자들도 동승하고 있었다. 당초 일정은 산티아고를 향해 직항으로 3시간 반 비행하는 것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인하여 아르헨티나 멘도사에 일시 기착하였다. 계속되는 기상 악화로 인하여 비행이 지연되었는데, 이때 아르헨티나 법상 외국의 군용기가 아르헨티나 영토에 24시간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2] 따라서 기장과 부기장은 비행기를 몬테비데오로 되돌려야 할지, 날씨를 무릅쓰고 안데스 산맥 을 넘어 산티아고로 향해야 할지 결정지어야 하였다. 결국 오후 2시 18분경(현지시각) 비행기는 멘도사 공항에서 이륙 출발하였다.
공군 대령이기도 한 훌리오 페라다스 기장은 총 5117시간의 비행시간과 29번에 걸친 안데스 산맥 횡단 경험이 있었다. 페어차일드기의 고도 한계(약 9,000 미터)로는 안데스 산맥을 바로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기장은 안데스 산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면서 돌고 나서 다시 북으로 가는 항로를 이용하였다. 기장은 자신들이 칠레의 쿠리코를 지나고 있다고 산티아고 관제탑에 알렸지만, 이는 짙은 구름으로 인하여 경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파일럿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왜냐하면 기체는 강한 역풍으로 인하여 실제 속도가 줄어들어, 기장이 안데스 산맥을 다 지났다고 생각한 시점에 여전히 안데스 산맥 한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구름 아래에까지 내려오고 나서야 기장과 부기장은 자신들이 오판한 것을 알고 고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미 늦어버려 기체의 배 부분이 안데스 산맥의 이름없는 봉우리(후에 Glacier of Tears 로 명명되었다)에 충돌했다. 이후 오른쪽 날개는 완전히 분리되어 플란촌 령 아래로 추락하고, 왼쪽 날개는 떨어져 나가던 힘으로 되돌아와 페어차일드 동체를 뚫고 들어왔다. 그 충격으로 비행기 꼬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승무원 2명과 승객 3명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비행기는 크게 흔들리거나 부숴지지 않고 앞부분이 수그러지면서 추락했는데, 이때 추락하는 각도가 산등성이의 각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체 착륙의 형태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후 눈속에 박힌 기체 속에 최초 생존자 33명이 안데스 산맥에 고립되었다.

2.2. 수색


관제탑과의 교신이 끊어지고 나서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에서 안데스 산맥에 걸쳐 수색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기체가 흰색이어서 눈덮인 산맥에서의 수색은 난항을 겪었다.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 채 2주일 뒤에 기상 악화로 인하여 수색을 종료하였다. 남반구 특성상 10월은 봄이 오는 계절이었으나, 고산 지대 특성상 여전히 기후는 혹독하였고,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판단에서였다.

2.3. 생존


충돌 직후, 생존자들은 부상자들을 위한 구조팀을 결성하였다. 럭비팀 소속 의학도였던 로베르토 카네사와 구스타보 세르비노는 부상자 응급처치를 하였다. 충돌 직후 33명이 생존해있었지만,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하여 5명이 충돌 다음날, 그리고 8일이 지나 한명이 추가로 사망하였다. 사망자들을 기내 밖의 눈 속에 묻어주면서, 남은 27명의 생존자들은 식물 하나 없는 눈덮인 고산지대에서 빈 와인병에 눈을 녹여 물을 마시고, 기내에 남아있던 식량을 끌어모아 나누어먹으며 버텼다.
생존자들은 기체 꼬리 부분에서 발견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하여 수색 활동이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수색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모두 듣고 있었다. 결국 추락 15일째인 1972년 10월 27일, 생존자들은 생존을 위하여 눈 속에 묻힌 시체의 고기를 잘라 내어 이를 먹기 시작하였다. 전세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이었고, 식인에 대한 터부가 강했던 만큼,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맨 먼저 먹은 것은 기장인 페레다스 대령의 시신으로, 생존자들이 이 사고가 조종사 과실이라 여기고 있어 만장일치로 그의 시신부터 먹기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부기장인 단테 라과라 중령 시체를 먹었다.
1972년 10월 29일, 눈사태가 덮쳐와 생존자 중 8명이 죽고 19명이 남았다.
이후 구조 요청을 위한 여러번 출발을 시도하였지만, 이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사실 고도 일만 피트의 고산지대에서 고산병, 부상과 굶주림을 안은 채 구조 요청을 위한 하산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추락 후 페어차일드 기의 고도계가 2,000 미터를 가리키고 있었고 라과라 중령이 죽어가면서 남긴 말[3]을 통해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안데스 산맥의 끝자락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1972년 11월 18일, 난도 파라도와 로베르토 카네사, 그리고 안토니오 비진텐은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하여 비행기 동체를 떠났다. 도중에 식량 부족이 걱정되어, 비진텐은 자기 식량을 두 사람에게 건네고 동체로 돌아갔다. 이후 동체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생존자들은 재개된 수색에서 생존자들이 여행 가방으로 만든 십자가를 우루과이 공군 C-47 이 발견하였다는 것을 알게된다.
1972년 12월 20일, 산봉우리와 능선을 끝없이 걸어 눈덮인 안데스 산맥의 끝에 다다른 두 사람은 강 건너의 농부 세르히오 카탈란을 조우하게 되고,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결국 동체를 떠난 지 열흘째, 비행기가 떨어진지 72일째 되는날 두 사람에 의해 구조 요청은 성공하게 되고, 이 성공을 라디오를 통해 생존자들 역시 알게 된다. 그동안 3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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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생존자 2명인 파라도와 카네사. 뒤에 모자를 쓴 사람은 첫 발견자인 농부 세르히오 카탈란(1924~2020.Sergio Catalan).
1972년 12월 22일, 생존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구조 헬리콥터가 띄워진다.
당시 사진(시체같은 혐오사진은 없고 비행기 추락한 것이랑 생존자 사진이다).

3. 사고 이후


생존자들의 귀환이 알려진 이후, 언론은 이를 영광스러운 모험으로 칭송하였고 심지어 1950년 월드컵 우승에 비교하기까지 했지만, 생존자들은 그곳에서 겪었던 입에 담기 어려운 사건을 고백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결국, 어느 신문사가 추락현장에서 발견된 먹다 남은 사람 다리를 찾아내 신문에 실었고, 생존자들은 식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생존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들이 한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몬테비데오 대교구의 대주교는 "나는,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로, 예를 들어 생리적 혐오를 품는다고 해도, 그들은 손에 댈 수 있는 모든 무엇이든 먹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저 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대교구의 교구장 주교는 안토니오 바르비에리(Antonio María Barbieri) 추기경으로, 카푸친 프란치스코회 소속 수사 출신 성직자였다. 해당 발언 출처는 한국에서도 정발된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이러한 기적적인 생환은 2년후 얼라이브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1993년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얼라이브(영화) 참고. 이 영화 개봉을 두고 생존자 2명이 내한하여 국내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통역자가 뭐든 질문해도 좋다 , 사람고기맛이 어쨌는지 물어봐도 좋다라고 말하여 한국 기자들이 잠깐 멍때렸다고...이건 국내에 영화개봉당시 나온 책자 얼라이브 후기에 사진과 같이 기자회견 사항이 자세히 나와있다.
생존자 중 1명인 난도 파라도가 자전적으로 서술한 '난도의 위대한 귀환' 이라는 책 역시 출판되어있다.
한국어로도 출판되었다. 꽤나 재밌으니 읽어보길 바람.
이후 생존자 중 하나인 로베르토 카네사는 정치에도 몸을 담갔고 의사가 되었으며 난도 파라도는 차량 정비소를 운영하며 여럿 책을 썼다. 카네사는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발생하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산소 부족으로 숨지는 것을 보면서 산 위에서 숨이 끊어진 친구들이 떠올랐다. 다신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인공호흡기 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사고 30주기를 기리고자 생존자들이 다시 모였다. 이들에게 은인인 농부 카탈란도 어느덧 70대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고(그래도 그동안 몇 사람과 연락도 하며 만났다고 한다) 생존자 중 몇 사람은 해마다 이 사고현장에 올라서 사망자들 명복을 빌며 사고현장에 세워진 십자가에 꽃을 바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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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생존자들과 가운데 밀짚모자를 든 노인이 위에 나온 농부 카탈란.
2015년에 찍은 카탈란 사진
2020년 2월 11일, 카탈란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1924년생으로 소개되었는데 우루과이 방송에서는 사망 당시 나이를 91세라고 소개하고 있다.
해당 사건은 항공 사고 수사대 에서도 소개되었다.

[1] 포커 F27페어차일드사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기종.[2] 아르헨티나는 외국 공군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크다. 아르헨티나에게는 우방국인 우루과이부터 이렇다.[3] 최초 추락 후 즉사한 페레다스 대령과 달리 라과라 중령은 살아있었으나, '쿠리코를 지났다' 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고 한다. 생존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계기판에 깔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라과라 중령은 조종석에 권총이 있으니 꺼내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생존자들은 이 요구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카톨릭 교도였던 생존자들은 자살은 죄이며, 그 도움에 손을 대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