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하 33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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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하 3319호 묘실부분)
1. 개요
국내성 시기의 유이(有二)한 전실분(塼室墳)[6] . 계단식 전실 적석총. 국내성의 북쪽, 우산(禹山)의 동남쪽 산록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무덤의 구조
외형은 계단식 적석총으로 치석한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한변의 길이는 20m 가량으로 방형의 평면형태를 띄고 있다. 현재 약 2~3단 가량이 남아 있다.
도면과 실물이 남아있는 유일한 전실분(塼室墳)[7] 이다. 묘도와 그 양쪽에 이실(耳室)이 남아 있으며 현실은 바닥면을 제외하고 그 윗 부분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궁륭형(穹窿形)의 천장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현실의 전벽 양쪽으로는 벽화로 추정되는 채색된 편이 일부 확인되었으나 훼손이 심해 정확한 정황을 알 수 없다.
무덤의 동남쪽에는 인면문 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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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덤의 연대와 의의
우산하 3319호분은 고구려 고분 문화의 전개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3319호분에서 동진제 청자 다수와 계수호가 출토되었는데 이 청자를 통해서 동진 전기(317년~357년)에 해당하는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3319호에서 공반된 마구류들이 전반적으로 4세기 전반의 유물에 해당하고 있다. 여기에 출토된 권운문와당에 丁巳와 乙卯年癸酉의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4세기 전반경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각 간지(干支)들이 357년과 355년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355년, 357년의 절대연대를 확보한 우산하 3319호분은 전실분이라는 관점과 고구려 적석총 전개과정에 있어 이실이 붙어있는 석실을 채용하기 시작하는 점에서 중요한 시간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먼저 낙랑의 고지(故地)인 황해 봉산군에서 확인된 장무이묘(張撫夷墓)[8] 와의 관련성이다.[9] 장무이묘는 평면 방형의 현실에 이실이 달린 연도가 있으며 현실은 궁륭형의 구조로 만들다가 천장에 개석(蓋石)[10] 을 올려 마무리한 구조이다. 또 장무이묘에서 확인된 전돌의 戊申의 간지가 동리묘와 같은 구조의 고분들을 고려할 때 34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우산하 3319호분과 구조적으로 거의 동일[11] 하며 양자의 연대를 순환적으로 보완해주고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이실의 높이가 묘도의 높이 보다 낮게 형성되는 점은 기존의 낙랑이나 다른 전실분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3319호분과 장무이묘에서만 확인된다. 고구려의 이실이 있는 석실들이 초현하는 시점에 바로 이와 같이 이실이 묘도보다 천장이 낮다는 점에서 우산하 3319호분이 4세기 후엽부터 유행하는 이실이 붙어있는 석실의 초현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절대연대를 갖는 3319호분은 묘제의 변천 뿐만아니라 권운문 와당의 변화에도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기타 출토품의 시간적인 근거의 기준이 되고 있다.
4. 무덤의 주인
중국 측에서는 이 고분에 대해서 중국계 인물이라는 평을 내리고 있다. 기와의 명문 일부에서 '中郞'이라는 관직명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서 진나라에 있으면서 중랑급의 직책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의 사람이면서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비가 해당한다고 보았다. 최비는 항목에서 나와있듯이 고구려에 망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계 유물 일색이 확인된 것을 바탕으로 중국계 인물이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위의 낙랑 관련설과는 다소 배치되는 내용.
5.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고구려 적석총에 완전히 다른 양태의 묘제가 적용된 것은 마선구 682호를 제외하면 전무하다.[7] 널방 및 벽면을 벽돌로 만든 무덤이다.[8] 대방태수 장무이묘라고도 알려져 있다. 기존에는 288년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비교적 최근에 새로운 관점이 제시된 바 있다. 정인성(2010) 참고[9] 낙랑의 전실분의 추이는 313년 축출 이전까지 한창 전성기를 유지하다가 3세기 말 무렵부터 점차 전실분의 완성도가 떨어져 313년 축출 이후부터는 전실분의 축조가 현격히 저조해지고 전실분이 축조되더라도 전석혼축분이라는 형태로 퇴락하게 된다.[10] 무덤 천정을 마무리하는 뚜껑돌[11] 우산하 3319호분도 궁륭형이 아니라 개석으로 마무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궁륭형으로 축조되게 되면 비율상 적석총의 외관이 피라미드처럼 뾰족해져야만 한다. 고구려 적석총은 피라미드처럼 뾰족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