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
국내성(國內城) / 통구성(通溝城)
실제로 중국도 춘추시대만 해도 도읍의 국인과 그 바깥의 야인을 구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도시가 곧 국가. 고구려도 4세기 중후반 이전까지는 '고구려민'과 그 외의 '속민'을 구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춘추전국 이야기' 및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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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도읍지. 현재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일대의 통구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왕조의 두 번째 수도이자 두 번째 이중수도이다. 국내성은 평지성 수도였으며 짝으로 산성 수도 환도성이 있었다. 한때 국내성과 환도성 중 어느 쪽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가에 대해 말이 많았으나 현재는 안학궁-대성산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성을 통틀어서 묶는 편이다. 즉, 당시 고구려는 평지성인 국내성이 뚫리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나암성으로 비정되는 근처의 환도산에 위치한 산성인 환도성으로 도피하여 외세에 저항했다.[6]
일반적으로 '말 달리는 만주 벌판'의 이미지로 알려진 고구려지만, 초기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주변의 지형은 평야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산골짜기 속의 압록강변 작은 평지에 있다. 구글 지도로 보면 국내성은 신라 수도였던 경주 분지 넓이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웬만한 한국 현대 대도시의 1개 구 하나면 꽉 찰 정도로 좁다. 이런 문제 때문인지 장수왕대에 훨씬 넓은 평야가 있는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지형이 표시되지 않은 지도를 보고 왜 고구려가 넓은 만주에서 좁은 한반도로 천도했는지 불만을 가지는 일부 대륙주의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국내성의 입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2. 역사
유리왕 22년(서기 3)에 수도를 졸본성(=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이후 남하정책을 펼쳐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장수왕 15년(427)까지 '''총 424년간''' 고구려의 도읍지였고 이는 704년의 고구려 역사의 '''약 6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또한 2대 유리왕부터 20대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28명의 고구려 군주 중 무려 19명의 국왕이 이곳에 정도하였다.
'''고구려 역사상 수난을 가장 많이 당한 성'''으로서 동천왕때 위나라의 관구검이 쳐들어와 국내성과 환도성이 털리고 동천왕 자신은 북옥저로 대피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고 왕모, 왕비가 납치당하는 치욕'''을 맛보기도...
이후 고구려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광개토대왕때 서쪽으로는 서요하일부 북쪽으로는 연해주 일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427년 이후 남하정책 및 기존 귀족세력 제압을 위해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국내성은 고구려의 제2도시 및 제2수도 요동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고구려 전체 영토를 따져본다면 평양성이 상당히 남쪽으로 치우쳐있기 때문에 만주와 요동을 컨트롤할 중심지가 따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양성, 한성#s-1.2(現 황해도 재령군 부근)과 함께 고구려의 3경이라고도 불렸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날 때 연남생이 연남건-연남산 형제들과 대치할 때 주둔했던 성이 국내성이었을 정도로 고구려가 멸망에 이를 때까지 그 위용을 잃진 않았다. 고구려 멸망 시기에 국내성은 연남생의 지지기반이었는지, 연남생이 평양성에 있는 동생들에게 패배해 국내성으로 도망간 뒤 당나라에 항복하자 국내성 일대도 통째로 당나라에 항복했다. 고구려의 내부 중심지 중 하나인 국내성이 당나라에 붙어서,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보다 쉽게 멸망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곳은 몰락하여 잊혀졌다. 졸본성 같은 산악지역이 아니라 평야 지형이라고 하지만 거의 산골짜기 속 분지에 가까운 데다가, 압록강만 건너면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이 부근에 있을 정도로[7] 기후가 혹독한 지역이다. 교통망을 따져봐도 요동-한반도 라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서-만주 라인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위치에 있어서 초기 고구려가 수도로 삼지 않았다면 깡촌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던 곳.[8]
3. 기타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 내부에 현대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부분에 한해서만 이루어졌다. 헌데 현재까지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국내성이 축조된 시기는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천도 기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향후 추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3세기 이전에 해당하는 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중 성벽 절개조사를 통해 보았을 때 적어도 현재의 국내성 성벽은 3세기 이전으로 올려볼 수 없다는 점을 토대로 성 내부에서 3세기 이전의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적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렇게 된다면 고구려 국내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다시 상고해보아야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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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시에 소재하는 고구려 유적의 분포도. 좌측 하단이 마선구 고분군이 소재하는 곳으로 하안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렇다보니 집안시에 소재하는 여러 고구려의 왕릉과 고구려 왕의 장지명을 가진 왕호를 고려하여 통구성이 지금의 국내성이 아닌 마선구 고분군이 있는 마선향이라는 곳에 지금의 국내성 이전의 3세기대 도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마선향은 집안시에서 통구하 건너 바로 서쪽에 인접해있는 하안대지로써 마선구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마선구 고분군에 소재하는 일부 왕릉들─마선구 626호분, 2378호분, 2381호분 등이 실제로 비교적 빠른 편으로 3세기 언저리에 해당하는 왕릉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건물지를 비롯한 일부 시설들이 실제로 마선하(麻線河)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건물지들이 마선구 고분군의 여러 적석총에 부속된 건물지라는 견해도 있거니와 건물지 자체가 정식으로 발굴된 것이 아니 이 설의 실체를 파헤치기에는 실물자료가 부족한 편이다.
이에 대해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 7월조에 묘사된 위나암성의 지세가 환도성이나 국내성보다는 환인의 오녀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 초기의 국내 위나암성은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과 하고성(下古城: 하고성자토성과 같은 성임)이며, 고구려의 집안지역 천도시기는 환도성이 축조되고 고구려의 도읍이 환도성으로 옮겨간 산상왕 재위기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다. 유리왕이 천도했다는 국내와 집안의 국내를 서로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내는 '국나(國那)'의 다른 표현으로, '국(國: 도읍)이 있는 나(那: 개천 혹은 땅)'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풀이된다. 한편 이 설에 따르면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곳은 지금은 환인댐에 잠겨 수몰된 나합성(螺蛤城)이다.[9]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조선만 하더라도 수도 한양이 뚫리면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했다. 평지성과 산성은 방어도 자체가 다른데 국가의 행정력이 집중되는 수도를 이런 산에다가 할 수 없으니 평지에 수도를 정하고 이를 보완하는 산성을 주변에 둔 것. 그 이외에도 고려와 조선은 이런 임시 수도 역할로 바다가 해자인(...) 강화도도 활용했다.[7] 다만 바로 압록강 건너편에 있지는 않다. 건너편에 있는 도시는 자강도 만포시이다.[8] 국내성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위치이다. 고구려 영토의 중앙에 있고, 고구려 중앙을 가로 지르는 압록강을 옆에 낀 절묘한 자리이다. 게다가 국내성에서 군대를 움직이면 한반도든 만주든 의외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자주 불탄 것과 별개로 천혜의 요새라서 길이 험할 뿐이다. 괜히 삼경의 북쪽을 담당하던 도시가 아니었던 것.[9] 출처: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