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지 십층석탑
1. 개요
조선 세조 13년, 1467년에 세조의 왕명으로 원각사가 지어질 때 함께 건조된 석탑. 현재 탑골공원에 있으며, 국보 제2호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인 경천사 10층 석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 내용
원각사는 원래 고려시대에 창건된 흥복사로,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세조 10년(1464)에 원각사로 고쳐 지은 절이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5)에 연방원이라는 기생방이 들어서고 중종 9년(1514)에 절이 헐리면서 없어졌다. 이 탑은 고종 32년(1895)에 총 세무사로 재직하였던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건의로 원각사 터에 공원이 들어서 탑골공원으로 바뀐 이후에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산성비로 인한 손상 방지를 위해 유리 보호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1]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보물로 지정되어 현재도 한국의 국보가 되었다. 매우 수려하면서도 기교적인 그 면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탑파사상(塔婆史上) 손에 꼽히는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한말-일제시대에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조선에 왔으면 꼭 봐야 할 명물로 손꼽혔다. 퍼시벌 로웰은 1883~1884년에 걸쳐 몇 개월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원각사지 석탑을 보고 석탑 옆에 있는 민가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 지붕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2]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이미 1884년경에도 상층부 3개 층은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 이후 복원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것을 1946년 2월 17일에 미군 공병대가 장비를 동원하여 복원해 주고 갔다. 위키백과에는 새똥으로 인해 부식되어 무너졌다고 되어있다. 새똥은 요산이 함유되어 있어서 대리석을 부식시킨다.
조선 후기에는 흰 돌로 지은 탑이라 하여 백탑(白塔)이라고 불렸으며, 박지원이 이 근처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그와 교류한 실학자들을 백탑파라고 일컫는다.
3. 영상
4. 국보 제2호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 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 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