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

 


'''조선 태종의 왕자'''
'''효령대군
孝寧大君'''

[image][1]
'''군호'''
효령대군(孝寧大君)
'''시호'''
정효(靖孝)
'''본관'''
전주(全州)
'''이름'''
호(祜) → 보(𥙷)
''''''
선숙(善叔)
''''''
연강(蓮江)
'''부왕'''
조선 태종
'''모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부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海州 鄭氏)
'''자녀'''
7남 3녀
'''묘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생몰
기간
'''
'''음력'''
1395년 12월 11일 ~ 1486년 5월 11일
'''양력'''
1396년 1월 6일[2] ~ 1486년 6월 12일
1. 개요
2. 폐세자 정국과 술 문제
3. 일화
4. 장수
5. 묘지
6. 창작물에서
7. 외모
8.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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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차남. 그러나 요절한 형이 3명이 더 있으니, 태어난 순서대로 하면 5남이다.[3]. 양녕대군의 동생이고, 세종의 형. 이름은 '''이보'''(李𥙷),[4] 50만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파시조이다.

2. 폐세자 정국과 술 문제


양녕대군이 폐세자될 때 세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태종은 효령대군이 지나치게 점잖은 성격이었고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마실 일이 많은 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럼에도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에 참석한 기록은 있는데, 이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얼굴을 비춰야 하는 연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아들이니 왕만 넘어가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고.
고작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로 왕 같이 이것저것 따져야하는 중요한 직책을 바꾼다고 어이없어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근대에 술이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주량은 그 자체로 체력 측정의 한 방편이 되었을 정도이고[5], 왕은 결국 정치인으로서 그 술이란 것을 매우 자주 마시는 자리이다. 특히 술을 아예 못 마신다는 건 그야말로 약골 중의 약골로 취급당한다. 한 마디로, 충녕보다 형이었던 효령이 체력이 한참 더 딸려서 걱정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6] 이미 처가를 조지고 사돈댁도 박살낼 준비를 하면서 강한 왕권을 물려주려 혈안이 되어있던 태종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게다가 관료-종친 생활을 경험한 태종의 입장에서는 연회자리에서 입에 잔도 안 댈 정도로 융통성이나 임기응변이 없는 효령이 살벌한 정치판에서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중국 사신 접대를 운운한 것을 보면 요동정벌 부르짖던 정도전을 쳐내고 명에 대한 사대노선을 확립한 태종으로서는 효령의 이러한 태도가 특히 외교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효령대군이 불도에 심취했던 점을 생각하면 이 술 문제는 효령의 사상적 부적격성을 에둘러 드러낸 것일수도 있다. 사실 '''고려 불교문화'''와 '''조선 유교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불교)와 '''술'''(유교)일 정도다. 효령이 본격적으로 불도에 정진한 시점은 확실하진 않으나, 효령이 잠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는 해도 어렸을 때 입궁해 왕족 교육을 받았음을 생각하면 충녕처럼 아무리 못 마셔도 몇 잔 받아 넘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조차도 거부할 정도라면 이미 이 시절부터 불도에 상당히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 개국군주인 태조가 무학을 왕사로 초빙하고 재위 내내 법회를 여는 등 친불교적인 성향을 보여주긴 했지만, 조선의 유자들은 개국 초부터 내내 불교를 비판하고 배척했으며 태조 이후 왕들의 불사도 어디까지나 죽은 가족에 대한 추도의 목적[7]이 강했지 불도에 귀의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조 같은 개국군주도 아니고 새로 즉위할 후계자가 벌써부터 공공연히 불제자임을 드러내고 다닌다면 문제가 좀 심각해진다.[8] 이럴 경우 술도 못마신다 운운은 왕실 체면상 차마 왕의 적차자가 불경이나 읊고 다녀서 왕이 못된다 할 수는 없으니 우회적으로 문제를 지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술 문제는 영특했던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폐세자 논의 시점에서부터 이미 장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는데, 장자조차 폐세자 되는 판에 새삼 순번을 지키겠답시고 굳이 둘째에게 왕위를 물려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태종이 고작 술 못마신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효령을 제치고 충녕을 택한 것이 아니다. 이 술 문제가 하도 임팩트가 커서 요것만 쏙 빼서 회자되곤 하는데, 태종의 말 앞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9]

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이 바로 다음에 위에서 언급한 술 문제가 나온다. 이를 이어보면 한마디로 효령대군은 군주의 자리에 앉기엔 너무 순한데다가 융통성도 없어 도저히 후계자로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술은 어디까지나 이런 효령의 성품을 방증하는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되었을 뿐이다. 참고로 이방원은 육조직계제로 조정을 모조리 자기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며 의정부를 뒷방 노인정으로 만든 사람이다. 당연히 후계자의 일머리에 높은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다.
야사에서는 양녕이 폐세자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 갑작스럽게 책 펴고 공부하는 척했지만, 양녕대군이 "헛짓거리 그만하라!" 하며 꾸짖었다고 하는데, 딱히 정치적 배경이 없던 효령대군이 정말로 왕위에 욕심을 냈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효령은 말년에 다른 형제들보다 오래 살아 종친의 웃어른으로서 영향력이 커졌다.
야사에 의하면 효령대군은 번뇌를 씻기 위해 에 들어가서 북 가죽이 늘어지도록 북을 쳐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효령대군 북 가죽 같다." 하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3. 일화


실록에는 태종이 효령을 두고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 온화한 성품으로 부왕 태종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나 위아래로 형과 동생이 워낙 임팩트가 강하고 효령대군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아들이었는지 부모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거의 없는 편이다. 위 일화와 태종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우애 깊게 지내라고 강조한 일화가 거의 전부.
왕자인 대군 시절에 특별히 사건은 없는 편인데, 태종 10년(1410)에 인녕부(仁寧府) 행수(行首) 이호(李護)가 효령대군에게 청탁하여 호조의 벼슬을 얻었다가, 태종에게 들통이 난 사건이 있다. 태종은 "어린아이를 통해(효령대군은 당시 14살) 이름을 얻으려 했으니 죄를 주어야 하지만, 이름을 얻으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죄를 묻지는 않고 파직만 시켰다.
그 밖에 효령대군의 가신, 가노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문제가 된 사건이 조금 등장하는데 가노 등이 주인의 뒷배경을 믿고 잘못에 연루되는 일은 조선시대 왕자들에게는 매우 흔한 일이다. 그 밖에 불교를 믿어서 여러 차례 법회를 열고 을 중건했기 때문에, 불교를 이단시하는 유학자 관료들에게 자주 비판을 받았다. 실록의 효령대군 관련 기사는 거의 대부분 법회 주관이나 불사, 절 중건 등을 한 일로 신하들에게 까이는 것. 그러나 세종이 언제나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효령대군을 비호하였다.[10]
동생 세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화가 거의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특별히 우애가 틀어질 만한 사건도 없었고[11] 효령대군의 성품이 온화한 점과 세종 또한 효령대군을 정성스럽게 대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형제관계는 양호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형 양녕대군은 효령대군을 상당히 얕잡아 본 듯하다. 양녕대군이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효령대군을 비난하거나 얼굴이 닮은 점을 이용하여 효령대군을 사칭하거나 효령대군이 불공을 드리는 절에서 살생을 하는 등 막나가는(...) 일화들이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효령대군이 양녕대군에게 화를 냈다는 기록조차 없으니 실로 그의 대인배스러움을 알 수 있다 하겠다.[12]
일부에서는 승려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승려가 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를 다룬 코믹 사극 영화인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선 진짜 머리 깎고 출가해서 스님이 된 걸로 나오는데, 그냥 개그요소인 듯. 안 그래도 불교에 심취해서 신하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머리까지 깎았다가는 정말 큰일 났을 것이다. 건국 초 무학대사가 그나마 이성계와 친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 그나마 불교 좋아하는 걸 봐준 거지, 조선은 근본적으로 '''숭유억불'''의 나라였다. 폐위될 정도 상황이 아닌데 왕자가 스님이 된다면 엄청나게 위험했고, 후손까지 평생 궁궐 근처에도 못 가볼 상황이 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왕자가 출가를 했다면 정말 큰일이라 실록에 실렸어야 하는데, 당대 실록[13]에는 그런 기사가 없고 한참 후대인 선조실록에나 가서야 '효령 역시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고 말았다.'는 구절이 있다. 선조실록에 양녕대군 세자 양보설도 같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사관이 야사를 믿고 썼을 가능성이 큰 듯. 현실적으로 그냥 불교에 심취한 거사로 지내며 불교 공부에 힘썼다 정도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살아 있을 때 계유정난이 벌어졌으나, 계유정난을 지지한 양녕대군과는 달리 효령대군 본인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아서 그냥저냥 넘어갔다. 그나마 당시 왕실에 관여한 것이라면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의 왕비[14]를 간택하는 것에 관여하거나, 세조가 즉위한 뒤 양녕대군과 함께 단종에 대해 처벌할 것을 주장한 정도. 이것도 전자는 단지 왕실의 어른으로서 한 일에 가깝고, 후자는 양녕대군의 행동에 묻어간 것. 이 외에는 효령대군이 정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없다. 사실 단종 처벌은 그 시대로는 어쩔 수 없었다. 사육신의 계획이 발각되었을 때 '''단종의 개입이 명백히 확인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어쨌건 현재 임금은 세조니 사육신은 반역자며 단종은 그 반역자들이 추대하려 한 인물이자 배후의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처벌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조 생전 그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의 설법을 듣고 싶었으나, 워낙 세조를 싫어하는 김시습이 가지 않으려 하자 효령대군이 설득하여 가게 한 이야기가 있다.

4. 장수


지금 시대로도 장수 측에 속하는 '''91세(만 90세)까지 장수했다.''' 보통 조선의 장수한 임금이라 하면 단연 먼저 떠올리는 영조보다 더 오래 살았다. 영조가 82세에 생을 마감했으니 효령은 8년을 더 산 것이다. 방계라고는 하나 평생을 왕족으로 지냈고, 권력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산 인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으로 '''당시 평균 연령의 2배에 가까운 기록이다'''. 태어난 1396년은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이고, 죽은 1486년은 성종의 25년 재위 기간 중 17년째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 전기의 왕 9명의 재위 기간을 합친 만큼 오래 살았다.''' 이래도 감이 안 온다면, 할아버지 태조 5년에 태어나 큰아버지 정종과 아버지 태종의 즉위를 지켜봤고 , 이후 동생인 세종대왕, 조카 문종, 종손 단종의 즉위와 그 이후의 수양대군이 벌인 막장짓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며, 이후 예종성종의 즉위와 세종대왕의 '''현손''' 연산군의 탄생까지 지켜보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1년 10개월 정도만 더 살았다면 중종이 태어나는 것도 볼 수 있을 뻔 했다. 그야말로 조선 초기 100년 역사의 산 증인으로, 조선 왕족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자 전세계 왕족에서도 이처럼 90대까지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15]
성종 조까지 장수한 덕분에 성종실록에도 효령대군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종실의 가장 큰어른[16]인지라 매년 잔치를 베풀고 비단을 하사했다는 기록들로 보아 성종도 굉장히 그를 살핀 듯. 실록에 있는 효령대군 몰기에는 날 좋은 날에는 가족 연회를 열면서, 60살이 넘은 효령대군의 아들들이 90살이 다 돼 가는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17]
병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그리 건강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데도 오래 산 이유는, 불교식 웰빙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판에서 얻는 스트레스만큼은 적은 삶이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많다.[18]

5.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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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은 90세를 넘어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5월 11일(음력)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부인인 예성부부인과 함께 예장되었고, 묘소 옆에는 청권사(사당)가 있다. 위치는 서울 지하철 2호선 방배역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이례적으로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교통공사~뱅뱅사거리 구간의 도로가 '효령로'가 된 것도 효령대군묘가 있어 따온 것. 맞은편에 위치한 빌딩 이름은 '''프린스 효령 빌딩'''으로, 2014년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회 회관이다. 그래서 건물이 효령대군묘 바로 앞에 잡은 것이다.

6. 창작물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 2부 뿌리깊은 나무3부 설중매에서는 1부 추동궁 마마에서 공양왕을 연기했던 김웅철이 역을 맡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나오며, 뿌리깊은 나무 후반과 설중매 전반에는 왕실의 어른 자격으로 양녕대군과 거의 함께 나온다.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으로 순빈 봉씨가 좋겠다고 하여 세자빈이 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비중은 별로 없다.
용의 눈물에서는 MBC 24기 공채 탤런트이고 장나라의 오빠인 장성원이 맡았다. 처음에는 역사적으로 비중이 있는 인물이라 나온다는 느낌일 정도로 아무런 특색이 없다가 양녕대군이 주색에 빠져든 이후부터 불경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묘사되기 시작한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성녕대군에게 불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조언을 하기도 하고, 양녕대군이 표창으로 공부방 밖에서 시끄럽게 우는 까마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자 함부로 살생을 한다며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세자는 '우리 부처님 제자께선 못마땅하신 모양이구먼.'이라고 그냥 웃어넘겼다. 양녕의 비행이 점점 더해가자 끝내 폐세자 당할 것이라 예측하고, 총명한 동생 충녕대군이 다음 세자가 되는데 형인 자신 때문에 분란이 일지 않도록 아예 절을 돌기 시작한다. 나중엔 하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불경공부를 하느라 도성에 자주 들리질 못하니, 안 그래도 심란한 태종이 오랫만에 궁에 온 효령대군에게 "큰 놈은 거러지패들이랑 어울려다니고, 작은 놈은 염불에 미쳐 절간을 전전하고.. 잘들 하는 짓이다."라면서 양녕대군과 함께 세트로 까는 장면도 있다.
왕과 비에서는 원로 연기자이자 바로 다음 작품인 <태조 왕건>에서 악인인 아지태 역할을 맡게 되는 김인태가 맡았다. 양녕대군과는 대립하는 역할로 왕실의 안정과 양녕대군의 개깽판을 수습하는 역할. 그런데 아무래도 조용히 살아서 그런지 양녕이 1회부터 등장한 것과 달리 41회에서야 수양이 효령을 수행하며 등장한다. 어쨌거나 이래저래 상처 많은 왕실 사람들을 달래주며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활약한다. 세조도, 예종도, 성종도 모두 상담역으로 효령을 찾았다. 특히 성종이 종증조부 대군으로 즉위 때부터 많이 따르고 효령도 성종을 많이 보듬어줬다.
왕과 비 120화 성종 즉위 때에도 등장하고 163화 정희왕후 사망과 164화 초반 폐비 윤씨 사사 때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기록을 따르자면 87세에 퇴장. 여기도 양녕대군 때처럼 사망 장면은 버로우탔다(...) 뭐 신구옹과는 달리 드라마 시작할 때 스텝롤에 이름도 못 나왔으니 그냥 한직 취급이었나 보다.
그래도 후반부가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한명회(최종원), 홍응(송재호), 인수대비 등보다 훨씬 정정한 노인으로 나왔다. 실제 배우 분 연세도 가장 많은데...(1936년생) 효령은 꼿꼿한데 한명회는 꼬부랑깽깽. 인수대비랑 VS도 찍고 나름 즐겁게 찍다 가셨다. 또 128화에서 한명회의 권신 행태를 걱정하는 정희왕후에게 "60이 다 된 노인네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라고 하는데 그 때가 성종이 즉위하고 탈상하는 1470년, 한명회는 56세였고 효령 본인은 '''75세'''였다. 게다가 그때 53세였던 정희왕후는 13년 뒤인 66세에 숨졌는데, 한명회는 그보다 4년 뒤, 즉 저 발언에서 17년을 더 살고 '''효령대군이 죽은 다음 해'''에 73세에 숨졌다.[19]
대왕 세종에서는 아역에 유태웅, 성인 역에는 안신우가 맡았다. 아역 때는 어울리지 않게(?) 충녕과 양녕 모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말을 툭 내뱉는 역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 목격한 왕자의 난 당시의 참혹한 기억으로 인해 정치에는 뜻을 거두고 모든 게 부질없다며 조용히 을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7. 외모


초상화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인물 중 하나. 부드러워 보이는 인물됨과는 달리 제법 덩치도 있고 수염도 야성적이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듯하다. 이 초상화에서 태종이나 세종대왕, 양녕대군의 얼굴도 추측해볼 수 있다. 태종이 일찍 죽은 넷째 아들 성녕대군을 두고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라고 회상하는 기록이 있으며,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얼굴이 너무 닮아서 양녕이 장난을 칠 때 "나 효령이다!"라고 구라를 쳤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들과 태조 이성계, 큰아버지 익안대군 그리고 조카가 되는 세조의 초상화로 추리해 보면 태종과 세종의 얼굴도 저 초상화와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즉 덩치 있고 풍채가 당당한 야성적인 스타일.

8. 자손


장수한 탓에 자손이 대단히 번성했다. 아들이 7명.[20]
7번째 아들 안강도정(安康都正) (1430∼ ?) 휘는 간(?), 대군의 7남이며 어머니는 평해손씨(平海孫氏)로서 낭장(郞將) 증 병조판서 유례(有禮)의 증손녀이고 군수 증 찬성 밀(密)의 손녀이며 인효(仁孝)의 딸이다.
 1444년(세종 26) 창선대부 안강정(安康正)에 제수된 후 1476년(성종 7) 3월 9일, 1478년(성종 9) 3월 19일, 1479년(성종 10)에 성종대왕이 효령대군 저택에 거둥하여 위로잔치를 베푼 자리에 입시하였다.
 1489년(성종 20) 12월 16일 문소전(文昭殿)에 입직할 때 수복노(守僕奴)끼리 싸우고 또 지의(地衣 : 제사때 쓰는 돗자리)를 태운 일을 계달(啓達 : 보고)치 않은 책임으로 직첩(職牒)이 회수되었으나 곧 환급(還級)되고 명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배위는 진주류씨(晋州柳氏)와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으며, 아들 습계군(習溪君) 효의(孝議)는 1493년(성종 24) 윤 5월 9일에 실시된 종친시예(宗親試藝)에서 차석을 차지하였고, 손자 종성령(鍾城令) 구(球)는 주기학파(主氣學派)의 선구자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주창한 그 학설을 계승하여 체계화 하였으며 증손 정랑(正郞) 해구(海龜)는 1559년(명종 14)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합격했다. 현손 완흥군(完興君) 원영(元榮)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에, 현손 전풍군(全豊君) 신(愼)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각각 녹훈되었다.
묘는 실전되었고 1981년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광덕산 을좌에 설단하였다가 1989년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방성리 산192번지 을좌에 천단(遷壇)하였고 단비(壇碑) · 상석 · 석등 및 문인석이 있다.
딸은 3명[21]인데, 손자가 33명, 손녀가 24명, 증손자가 '''109명'''이었다. 게다가 50살을 넘긴 둘째, 넷째, 여섯째를 먼저 보냈다. 그 때문에 전주 이씨 중에 효령대군파가 가장 많다고 한다.
효령대군 공식 홈페이지인 청권사에 따르면. 효령대군의 후손은 무려 '''50만 명'''으로 전주 이씨 내에서 20%를 차지하고 있다. 효령대군파 내에서 가장 번창한 율원군(여양군-전성군)[22]계로, 이것만 따지면 '''10만 명'''으로 효령대군파 내에서 20%를 차지한다.
명종 이후 적통이 끊겨 덕흥대원군의 3남으로 후사를 이었고, 종래에는 강화도로 유배가 있던 왕손, 그보다 더 먼 왕손의 차남으로 대를 이었던 조선 왕실 상황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다.
유명한 인물로는 숙종시절 청백리로 유명하고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이형상이 있었고 과거 이승만 정권 시절의 2인자이자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로 악명 높은 이기붕(18세손)이 있다.[23] 선조후궁인빈 김씨의 어머니도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이외에도 전 아나운서 겸 국회의원이었던 이계진(본인은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할아버지가 효령대군 21세손 항렬자인 '廷'자를 사용해서 이름이 이정현(李廷賢)이며 아버지가 효령대군 22세손 항렬자인 '揆'자를 사용해서 이름이 이문규(李文揆)이므로 효령대군 23세손이다.)과 현직 인천광역시 서구 국회의원인 이학재(20세손)도 효령대군의 후손이다.[24]
유명 연예인으론 이영재[25], 이혁재, 이성재, 이정재 (효령대군 20세손 항렬자인 '宰'자를 공통적으로 쓴다.), 이상은, 이수만, 이만희(영화 감독) - 이혜영 부녀, 그리고 이경규, 이순규 (효령대군 22세손 항렬자인 '揆'자를 사용한다.)가 있다.
효령대군파 종회는 방배동과 무교동에 빌딩을 보유하고 시세는 약 1천억에 달한다.

[1]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에 소장된 초상화. 진본이 아니라 옮겨 그린 그림이지만, 조선 전기 인물들 중 초상화가 전하는 몇 안 되는 사례라 가치가 높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2] 다만 선원속보 효령대군파보에는 1396년 음력 9월 16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친동생 세종대왕과 불과 7개월 차이로, 세종대왕은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 된다.[3] 원경왕후태종과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양녕대군에 앞서 세 아들을, 1412년에 막내아들을 낳았다. 따라서 실제로는 8남 4녀를 낳았던 것이다. 이 내용은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이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남긴 말로, 조선왕조실록 세종 원년(1419) 2월 3일 기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4] 태종 14년 이름을 호(祜)에서 보(𥙷)로 고쳤다[5] 괜히 전근대 영웅들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당, 말술이 등장하는 게 아니다.[6] 참고로 충녕, 즉 세종 역시 건강한 편은 아니라서 이미 30대 때부터 툭하면 몸져눕던 판이라 세자인 이향(문종)이 10대 초반부터 사신을 접대해야 할 정도였다.[7] 이 경우 행위는 불교적이더라도 그 목적이 유교적 효와 애의 달성에 있었으니 비판을 막아낼 명분이 되었다.[8] 특히나 조선 유자들의 입장에서 불교가 문제가 되는 것이 불사 한 번 치르고 절을 세우고 하면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재정지출을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데 정치의 지향점이 있었던 나라였던 만큼 불교적 행위에 대한 비판에는 꼬박꼬박 돈 문제가 등장했다. 주류 관료층으로서는 향교나 서원처럼 국가이념에 기반한 교육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성이나 병영처럼 국방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그저 목탁 두드리며 염불이나 외는 절간 따위에 돈 들어가는 짓을 극혐할수밖에 없었다.[9] 자세하게 조목조목 일을 처리함.[10] 세종도 불교를 억압하면 억압했지 결코 불교를 지켜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효령대군이 나서면 불교에 대한 적대감보다도 형제애가 우선이었던 세종도 한발 물러섰고, 그 덕에 조선 초기 불교계에서는 효령대군이 엄청난 우군이었다.[11] 별 일화가 없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큰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유유자적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12] 이런 일화들 때문에 양녕대군 항목에도 나와 있는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다."라는 말도 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제로 양녕대군이 저런 말을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양녕대군이 워낙 막나가는 인생을 살았음을 고려하면 했어도 이상할 건 없었을 듯 그런데 현대에서 아무리 독실하고 온화한 신자라도 말썽쟁이에다 방탕한 친형이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원에다 난동을 피우고 무례한 짓을 하면 부끄럽고 화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3] 사관, 특히 조선 초기 사관들은 하다못해 왕이 말 타다 떨어졌거나 걷다가 헛발질한 것을 '''실록에 쓰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까지''' 실록에 쓴 사람들인데, 이런 사관들이 왕자의 출가 사실을 안 적었을 리 없다.[14] 정순왕후 송씨[15] 왕치고는 장수했다고 알려진 영조도 81세까지 살았다. 만약 효령대군이 왕이 됐다면 조선 왕조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 됐을 것이다. [16] 세조 때까지는 양녕대군이 종실의 큰 어른이었지만, 양녕대군은 1462년에 죽기에 이후 죽을 때까지의 30여 년간은 효령대군이 종실의 큰 어른자리를 지켰다.[17] 당나라 사람 이한이 지은 <몽구> 고사전에 실린 '노래지희'에서 따온 행동이다. 초나라 사람 노래자는 칠순 노인이었는데, 백세장수하는 늙은 부모 앞에서 자식으로서 기쁘게 해드리려고 색동 저고리를 입고 아이처럼 춤추면서 재롱을 피웠다고 한다.[18] 참고로 실질적으로 왕비 자리에는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던 단종정순왕후 송씨중종이 즉위할 때까지 장수했다. 이런 것을 봐도 궁중 생활에서 얻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하다.[19] 효령대군 배우 김인태와 양녕대군 배우 신구는 1936년생 동갑내기다.[20] 물론 조선 전기만 해도 이정도 숫자는 가능한 이들도 제법 있었다. 태조만 해도 적자만 해도 8명이나 되었고 태종도 아들이 8명 정도 세종도 적자만 8명 정도 즉 효령대군은 조선 전기 기준으로는 특출나게 많은 아들을 둔건 아니다.[21] 첩인 평해 손씨가 차녀, 3녀를 낳았다. 장녀는 정실부인 소생으로, 무려 27명의 자식을 두었던 과는 달리 사생활이 깔끔하여 이 외에는 부인을 두지 않았다.[22] 조선 중기의 권신인 이량(6세손)이 율원군의 증손자이다. 이량의 12대손이 바로 이기붕이다.[23] 공교롭게도 이승만 대통령은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이다.[24] 이학재는 이휘재, 이혁재 등과 같은 재상 재자 항렬이다.[25] 이휘재는 그의 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