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 최종권고
senatus consultum ultimum
1. 개요
고대 로마 원로원의 최종 병기. 영어로는 'Final decree of the senate'. '''원로원 최종 결의''', '''원로원 비상 결의''' 등으로도 번역된다. Consultum은 본디 라틴어로 권고라는 뜻이나[1] , 후술하듯이 이 원로원 "권고"가 실질적으로 발휘한 효력을 감안하여 종종 "decree"로 의역된다. "Decree"는 칙령, 법적 명령, 결의, 판결, 조치 등의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원로원 최종 권고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법률과 시민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집정관, 혹은 독재관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한다는 선언이다. 로마판 긴급조치라고 할 수 있는 조치는 공화정 말기에 몇 차례 발동되었다.
2. 상세
원로원 권고(decree of the senate) 는 원로원 성립이래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이 권고가 발효되면 집정관들이 따르는 형태로 반발없이 수행되었다.
원로원 권고가 모두 받아들여지는 배경엔 공화정 초기와 중기의 정치구조에 기인하는데, 집정관은 이미 원로원 의원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정치가들이 출마하는 직책이었고, 일년이라는 짧은 집정관 임기는 그들로 하여금 집정관으로서의 활동보다는 원로원으로서의 활동을 염두하게끔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원로원의 결정에 순종적이었다.
호민관들은 일년이라는 짧은 임기와 10명에 달하는 동료들의 존재, 그리고 임기 후 법무관 출마를 준비해야하는 상황으로 인해 스스로를 정책결정의 주체라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평민 귀족출신으로 구성된 이들의 경우 원로원 의원들과 친인척 관계를 갖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원로원의 결정에 반발할 동기를 가지지 않았다.
평민들의 경우 원로원 계급과 정치적 충돌이 잦았으나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주로 그들의 파트로누스(Patronus, 복수형 Patrones)를 통해 해결하려하였다. 파트로누스는 클리엔스(Cliens, 복수 Clientes)의 문제를 해결함함으로서 새로운 클리엔스를 더 많이 확보하려 하였고, 이것은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파트로누스는 클리엔스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원로원 의원들이었으며, 평민들의 문제들의 대부분은 파트로누스들의 집단인 원로원 내부에서 해결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원로원 권고는 반드시 따라야하는 정책결정으로 여겨졌고 이러한 전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포에니 전쟁의 승리 이후 지중해 세계의 수도로 급부상하며 유입된 부와 노동계급들, 그리고 소작농들이 구성하는 평민이 다양한 직업을 가진 구성원들로 변화하면서 이러한 파트로누스-클리엔테스 구조(클리엔텔라)가 쇠퇴하게 되었고, 전쟁으로 얻은 부를 원로원 의원들이 주로 독점하게 되자 평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갔다. 그러면서 수백년간 유지되온 이러한 구조는 점차 파괴되었다.
원로원에 불만을 갖는 평민들은 그들의 불만을 "정치구조상 그들의 대표자"인 호민관을 통해 표출하려 하였으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같은 호민관이 이에 호응하면서 후대에 민중파라 불리는 정치계급이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원로원은 그들이 수백년간 누려온 원로원 권고의 "전통적으로 모든 계급이 순종하여 따라온 초법적인 효력"이 무력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도전하는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새로운 조치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기존의 원로원 권고에 "최종"이라는 단어를 붙여 이에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하였는데, 이것이 발효되면 로마의 법률에 따른 로마 시민의 권리를 정지시키고, 최종권고에 따라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된 사람과 지지자들에 대해 즉결심판이 허용된다.
이는 로마 법 어디에도 규정되지 않은 초법적인 명령이고,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언제든 활용할 수 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이후로도 그러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으며, 그 결과 민중파 정치가들, 특히 신체불가침권을 인정받는 호민관이 그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최종권고는 민중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조치의 등장 이후 불만을 로마 정치 구조 하에서 어필하고 반영할 수 없게된 민중파들은 군사력의 수단에 의지하였으며 그 결과 동맹시 전쟁, 마리우스와 술라와의 갈등과 뒤이은 내전, (폼페이우스에 의해 저지되긴 하였으나) 집정관 레피두스의 로마진군을 낳게 하였으며, 최후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내전으로 인해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 자체가 몰락하게 된다.
3. 사례
기원전 121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 등에 대해서 발동한 것이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사례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자살하고 그 지지자 약 3000명이 피살당했다.
기원전 100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프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그 지지자들에게 발동되었으며, 사투르니누스와 지지자들은 항복하였지만 역시 피살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자에게 재판을 걸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2]
기원전 63년, 유력 정치가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와 지지 세력에 의한 국가 전복 음모가 밝혀지고, 당시 집정관 키케로의 주도에 따라 발동되어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들은 학살되었다. 원로원 의원, 법무관 등 요직에 있던 5명이 처형되고,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 3000명은 도주하다가 학살되었다. 이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직 반역이 명백하게 시작되지 않았다며 사형은 지나치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기원전 49년, 로마 원로원은 로마 내전 발발 직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발동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오히려 최종권고의 법률적 문제와 갈리아 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자신에 대한 원로원의 처사가 부당함을 호소하며 루비콘강을 건너 거병했고, 자신을 겨냥했던 원로원을 제압하였다. 원로원 최종권고는 이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원로원이 최악의 상황에서 폭군을 제거하는 역할을 맡는 권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국가의 적 선언이나 기록말살형 등의 권한은 계속 존속되어 황제 견제에 이용되었다. 또한 유력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능한 황제를 죽일 때도 원로원의 동의가 기본적으로 요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