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원근
1. 개요
태평양 돌핀스에서 2루와 3루로 뛰었던 내야수. 성적은 규정타석을 채운 것이 91년 딱 한 번이지만 국내 최초의 스위치히터라는 타이틀이 있다.
2. 입단 이전
야구를 늦게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프로지명까지 가게된데는 당시 원원근이 다니던 충암고 감독이자 원원근의 매형인 정병규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경희대라 서울 출신으로 분류되어 MBC 청룡과 OB 베어스가 1차로 픽할 수 있었으나 두 팀 다 패스했기에 2차에서 태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3. 선수 시절
88년 데뷔. 성적은 평범한 백업 멤버 수준이지만 당시 프로야구 최초의 스위치히터라는 것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94년쯤에는 스위치타자를 포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히 포기한 시기는 불명. 90년까지는 스위치타자로 뛰었다는 기록이 있다.
89년엔 규정타석을 못 채웠지만 3할을 넘긴다. 이때 대타로 출전해 30타수 15안타를 때려내며 최고의 대타란 평가를 받게 된다. 규정타석에 120타석이나 부족하긴 하지만 만약 채웠다면 팀내 타율 1위, 리그 타율 4위. 하지만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1사 만루의 상황에서 병살타를 치며 1989 플레이오프 3차전 관중 난동 사건을 야기한다(……)
그 뒤엔 91년을 제외하고는 평균보다 부족한 백업 멤버로 활약했고 91년엔 풀타임 주전을 뛰며 타출장 0.286/0.374/0.390을 기록했다. 팀 내 김경기 뒤를 이은 두 번째 타자로 보기에 손색이 없는 성적.
어째 팀내 그래도 쳐주는 선수들이 있던 시절에는 못하다가 자기 빼고는 모두 다 맛이 갔을 때인 89, 91에는 어느 정도 쳐주는 난세의 영웅 스타일.
선수 경력 말기에 미국 전훈을 비자 문제로 못 갔고 그 여파로 은퇴했다고 전해진다.
4. 은퇴 후
11년간 코치직을 맡았다고 하나 정확한 보직은 불명. 이후 미국으로 이민간다. 2010년에는 미국에서 패시픽 돌핀스 아카데미라는 야구교실을 열거나 2011년에는 재미한인 리틀야구연맹을 창설하거나 미국내 아시아 4개국 야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미국에서 한인 야구 관련 사업을 했다.
2014년에는 한국으로 복귀해 남양주에 야구교실을 오픈하고서는 남양주 사회인야구에 참가해서 18타수 17안타를 쳤다고 전해진다. 2019년까지 열심히 영업한 것을 확인 가능.
5. 기타
- 특이한 이름이 많았던 삼미[2] , 청보[3] 의 뒤를 이어 태평양에서 특이한 이름을 가진 선수의 계보를 잇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에서 원원근과 궤를 같이 했던 선수는 여태구와 염경엽
- KBO 공식 기록상으로는 우투좌타로 되어 있다. 그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최초의 스위치히터는 원원근이라는 기사만 주구장창 봐왔기에 좌투 2루수 김바위 같이 KBO가 대충 적어서 이상한 경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 하지만 위의 기사에서 보듯 중간에 스위치히터를 버렸다. 실제 당시 경기를 직관한 사람들 또한 그를 우투양타보다는 우투좌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