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고등학교 야구부
1. 연혁
1.1. 빠르게 성장한 신흥 명문 구단
1970년 창단된 팀으로 재단의 강력한 후원 아래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고교야구 무대에서 정상권을 노크했다. 당진시 태생으로 서대전중을 졸업한 정순명을 스카우트해서 팀의 첫 에이스로 삼아 창단 3년만인 1972년 대통령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 팀 역사의 시초였다. 그리고 1977년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여 봉황대기에서 우승하면서 창단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당시 우승의 주역들은 서울 태생이 아니라 대구 대건고등학교 야구부가 해체될 때, 그 선수들을 모두 데리고 오면서 성공한 것으로 봉황대기 MVP를 차지한 포수가 바로 조범현이다. 그러나 충암고의 감독 김성근은 "신일고 감독 자리가 비었는데 가 볼까?"라는 농담을 김동엽 앞에서 했다가 진짜로 신일고 교장을 데리고 온 김동엽에 의해 신일고로 옮기게 되었고, 졸지에 수장을 잃은 충암고는 김성근 바로 직전의 신일고 감독인 한동화를 영입해 감독으로 앉혔다. 스승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충암고 선수들은 신일고 상대로 독하게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스왑은 망했다(...) 둘 다 양 학교에서 기대했던 우승을 이끌지 못한 것이다. 4강 2번이니 아주 망한 것은 아니지만, 전국 각지의 중학생을 데리고 온 것에 비하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1.2. 황금기와 위기 : 1990~2003
다행히 학교법인 충암학원은[4] 은 산하 초등학교부터 야구부를 일구기 시작했고, 그 멤버들이 무럭무럭 자라 고교생이 되는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자체 수급한 선수들로 전국 무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실은 1988년 투수 공의식과 당대 고교 최고의 유격수 류지현이 등장하여 봉황대기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1990년에는 심재학-이원식-송재용 3인방에 2학년 포수 최기문을 앞세워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95년에는 OB 베어스 항명파동 당시 모교에서 훈련하던 장호연에게 슬라이더를 배운 박명환의 각성을 앞세워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준수한 명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 선임을 둘러싸고 충암고 재단과 학부모 간의 충돌이 시작되면서 2000년 말 급기야 대거 전학생이 발생하는 사태가 빚어지며 선수가 단 4명만 남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5] 거의 해체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충암고 야구부는 졸지에 약체로 전락했고,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충암고 출신 선수들은 그 양과 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프로 배출 선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에 이른다. 이 당시 충암의 전통적인 유니폼(회색 상하의+적색 언더셔츠)를 버리고 변경된 유니폼을 착용하기도 했다.당시 유니폼
1.3. 다시금 떠오른 충암고 : 2004년~현재
다행히 2004년 이영복 감독 선임 이후, 충암고 야구부는 안정을 찾아 2005년 대통령배 4강을 시작으로 팀 재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결실은 2007년 봉황대기에서 홍상삼의 역투를 앞세워 우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마지막 동대문야구장 고교야구 결승이라 모든 야구계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나온 홍상삼의 똘끼와 충암고 선수들의 과도한 세러머니로 찍히는 부작용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충암고의 재건은 완전히 자리가 잡혀 2009년 문성현을 앞세워 황금사자기 우승, 2011년에는 변진수의 역투에 힘입어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고, 우승이 없던 2008, 2010. 2012년에도 4강에 진입하는 등, 꾸준한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은 잠시 쉬어간 충암고는 2014년 청룡기에서 조한욱의 호투를 앞세워 결승에 올랐지만, 덕수고에 패하며 아쉽게 청룡기 첫 우승의 기회는 놓쳤다. 그리고 2015년 협회장기 결승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동산고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7년 봉황대기에서는 에이스 김재균의 역투를 앞세워 결승에 올랐으나 야탑고에 매우 아쉽게 1-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9년 고교야구 주말리그 서울권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많은 기대를 하게 했으나 황금사자기 16강전에서 충훈고에 일격, 청룡기 1회전에서 장안고에 콜드게임으로 패배하는 예상 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배에서는 난적 광주일고를 상대로 8강전에서 6-4로 승리를 거두고, 준결승전에서 2019시즌 전국대회 2관왕(청룡기, 황금사자기)인 수원유신고와 대결한다. 8강전에서 2학년 에이스 강효종이 93구를 던져 대통령배 남은 일정에 더는 등판할 수 없다는 불리함을 안았으나 2-2 동점 상황이던 7회말 5번타자 윤준혁이 역전 솔로홈런을 쳤고 이 점수를 지키면서 29년 만에 대통령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전년도 우승 팀인 대구고. 강효종 등 투수 3명이 등판할 수 없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7회까지는 2점 차로 잘 버텼으나 8회초에 대량 실점을 하면서 2-9로 패했다. 마지막 전국대회인 봉황대기 첫날 공식 개막전인 비봉고와의 경기에서는 2-9 콜드게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2020년 봉황대기에서 8강전에 올랐다. 팀 전력이 저학년들이라 2021년 전망도 밝은 편이다.
2. 이야기거리
2.1. 기행의 야구부
'''야구계 돌+아이 양성소'''충암(고 출신)을 왜 또라이라고 해요? (올라오는 페이스북 댓글보더니) 아~ 상삼이형 때문에~~
인터넷에서 기행과 관련된 고교야구팀 하면 충암고가 단연 1순위로 뽑힌다. 응원가도 고교야구에서 유별나기로 소문나있고 선수들의 행동도 유별나기 때문. 관계자들이나 팬들 사이에서 매너가 좀 안 좋기로 소문나 있기도 하다. 여러 기행들, 기행 2
그래서 야구팬들은 충암똘끼라는 말을 쓴다. 눈에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입단한[6] 두산 베어스의 충암고 출신 선수들은 똘끼가 충만한 편(...)[7] 홍상삼[8] , 변진수, 류지혁[9] , 유재유[10] 등등.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는 충암고 출신들의 엽기적인(?) 사진과 기행 동영상이 베어스포티비 등을 통해 올라오면 "역시 충암..."이라는 반응들을 보인다.[11] 참고로 선수들도 알고 있는 듯하다. 류지혁이 근데 왜 충암을 또라이라고 해요?라고 묻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그리고 곧 수긍했다. 한화 이글스에도 충암똘끼가 유명해 양성우가 ASMR의 대명사가 된 적이 있다. #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의 새로운 개그캐로 떠오른 이학주도 이 학교 출신이다.
2.2. 중학교 유망주 스카우트
충암고 이영복 감독은 중학생 유망주 스카우트의 달인이라는 평가가 있다. 본인이 점찍은 중학교 유망주의 학부모와 면담 시, 어찌나 달변인지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시키고자 마음 먹었던 학부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 충암 보내겠다는 말을 하게 된다고 한다.
2.3. 에이스의 연투 논란
2017년 봉황대기 엠스플의 취재에 따르면 충암고의 에이스 김재균이 8월 28~9월 1일간의 대회기간 동안 29일을 제외하고 매번 등판하였고 무려 437구를 던지며 무시무시한 혹사를 당했다. 이에 관련하여 충암고 야구부 감독인 이영복 감독에게 질문하였더니 이영복 감독은 '''"난 선수에게 의사를 물었고 던질 수 있다는 의사를 들었다. 난 선수 의사를 존중했을 뿐이며[12] 투수는 많은 공을 던져야 만들어진다. 그게 내 야구 철학이며 주변에서 뭐라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라고 답하였고 몇몇 언론들은 김재균의 혹사를 "팀을 4강으로 이끈 다윗", "철완" 이라는 단어로 투혼으로 미화시켰다. 야구팬들은 ''이렇게 당당하게 혹사하여 팔을 작살내놓으니 대형 투수가 안나오는 것이다.'' 라며 비난하지만 몰락했던 충암고 야구부를 되살린 이영복 감독이 팀에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기 때문에 크게 개선될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해 한국 고교 야구의 혹사를 비판하며 일본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손수건 왕자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사이토 유키가 이 혹사로 유명한데 2006년 여름대회에서 와세다실업고교의 우승을 위해 여름 고시엔 7경기에서 948개의 공을 던졌다. 특히 결승전에서 180개 가량의 공을 던지고도 연장 15회 끝에 1-1로 끝나자 바로 다음날 펼쳐진 결승전 재경기에 선발로 다시 나와 118개의 공을 던지고 팀을 첫 여름대회 우승으로 이끌기까지 했다. 우승 후 인터뷰에서 "오른손에 감각이 없다"라고 말을 할 정도. 1998년 여름대회에서 8강전 250개(17이닝), 그 다음날 4강전에서 15개(좌익수로 선발출장 했다가 구원투수로 등판), 그 다음날 결승에서 노히트노런을 장식해 전설이 된 요코하마고등학교의 마쓰자카 다이스케도 있고, 2013년 사이비고등학교의 안라쿠 토모히로는 9일동안 5경기에서 772개의 공을 던졌으며 2018년 가나이시농업고교의 요시다 코세이는 6경기에서 881개의 공을 던졌다. 일본은 고시엔의 혹사를 하나의 드라마나 미담쯤으로 여기는데[13] 혹사에 대해 수십 년 동안 비판을 들었어도 "부상은 미국에서도 나온다. 투수는 공을 던지며 만들어진다."라는 말로 무시하던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 언론들도 아이들 미래를 불태워가며 만드는 드라마로 취급한다. 2016년 들어 고시엔이 투수 보호한다 만든 것이 겨우 연장 승부치기 제도인데, 그 이후로도 매년 논란이 반복되자 혹사 방지랍시고 7일 500구 제한 이야기가 나오는게 일본 고교야구이다. 일주일동안 선발 등판을 5번하는 수준이 혹사방지이고, 기존에는 이보다 더 던지는 선수들이 많았다는 것. 그러나 고교야구를 프로야구 진출을 위한 발판이 아닌 고교야구 그 자체로 보는 일본의 특성상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2011년 주말리그를 시행한 뒤 투구 수 제한을 만들고(한국 고교야구는 투수에게 1일 최다 투구수를 105개로 제한한다. 투구수 105개를 넘기면 노히터나 퍼펙트 상황을 제외하고는 즉시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하며, 76구 이상 던진 투수는 4일을, 61구에서 75구를 던진 투수는 3일을, 46구에서 60구를 던지면 2일을, 31구 이상 45구 이하를 던지면 1일을 의무적으로 쉬어야 한다.) 상위 토너먼트에 진출하고 난 뒤 일정이 짧아지며 혹사가 시작되는 한국 고교야구를 일본보다 투수 보호가 약하다 하는 것은 틀린 말이라 할 수 있다.
2.4. 기타
- 유튜브 박명환야구TV에서 박명환이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야구부 내에는 연습에는 참여시키지 않고 러닝만 시키는 근신처분이 있다고 한다.
- 같은 충암학원 소속인 충암초등학교 - 충암중학교 - 충암고등학교 테크를 탄 선수들도 보인다. 장성호, 김주찬, 이진석 등.
3. 출신 선수[14]
[1] 충암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시작으로 2017년 기준 28년째 충암학원에 몸 담고 있다. 교육 방침이 성적도 중요하지만 인성을 중요시 한다고. 승리보다 사람이 먼저…감독은 제자의 눈물 닦았다. [2] 4대 메이저 + 협회장기[3] 나무위키 등록 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4] 다만 이 학교 재단은 상상 이상으로'''막장인것 같다.''' 법정 공방이 오가고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등 정상화 과정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5] 해임당한 곽성열 감독(고교 선수들의 미국 진출을 돕는 브로커 노릇을 한 게 해임 사유였지만)을 따라 다수의 선수들이 새로 창단한 한광고등학교 야구부로 옮겼고 여기에 다른 팀에서 몇몇 선수들이 추가로 합류했다. 그러나 한광고 야구부는 창단 2년도 안 되어 해체되었고 선수들은 다시 흩어졌으며 곽성열 감독은 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6] 이 이전에도 단장이 프린스 타는데 벤츠를 타고 나타난 장호연, 그 해태 시절의 김응용 감독 앞에서 태연히 우동을 시켜먹었던 장성호, 머리에 양배추를 쓰고 투구한 박명환이나 '협상왕' 김주찬 등의 훌륭한(?) 선례들도 있었다. 그리고 2017년 시즌 종료 후 코치로 '''조성환'''까지 들어왔다![7] 두산팬들은 그래서 똘끼가 충만한 선수를 보고 명예충암이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오재원, 이영하, 서예일 등. 용병도 예외 없어서 조쉬 린드블럼도 미국충암이라 불린다(...).[8] 충암똘끼로 가장 유명한 선수. 부상사유도 골때리는데 축구하다가 다쳐서 2013년 WBC 국가대표 승선이 물건너갔다..[9] 대표적으로 스타는 카메라를 두려워 하면 안되(...) 가 있다. 이외에도 류지혁과 변진수는 충암똘끼의 양대산맥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데, 류지혁은 변진수를 똘끼가 넘치는 선수라고 칭하기도 했다.[10] 원래는 LG에 지명되었으나 김현수의 보상선수로 가게 되어 두산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2018년 2월 인터뷰에서도 충암고 출신 선배들이 두산이 좋은 팀이라 알려줘서 언젠가 한번 뛰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11] 베어스포티비에서는 최고의 충암 하이라이트까지 있다.[12] 이영복 감독의 말도 거짓이라고만 볼 수 없는것이 김재균은 이제 이번 신인 2차 드래프트에 참가하게되는데 각 프로구단 스카우터들의 눈도장을 찍기위해 본인이 자청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떨어지더라도 대학 야구부에 스카웃 된다면 다시 한번 노릴 수 있지만 그것도 불가능 할 경우에는 정말 힘든 미래만이 있을테니... 또한 전국대회에서 팀이 상위 입상할 경우 같은 팀 동료들까지 대학 진학을 노려볼 수 있게 된다. 까놓고 3학년 드래프트가 코앞인 시기 이미 프로에 눈도장 찍은 선수가 학부모와 함께 몸이 안 좋아 타격만 하겠다고 배째라 해버리면 감독 입장에서도 별다른 터치를 할 수 없다.[13] 이 문서에서 서술했듯이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 절대 다수의 목표는 프로 진출이 아니라 고시엔 본선 무대를 밟는 것이라는 특성이 강하게 작용한다.[14] 나무위키 등록 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15] 충암고 재학 시절에는 간혹 투수로도 등판했다. 그러나 대학 재학 이후에는 줄곧 타자로만 활동했고, 1999년 LG 시절의 투수 전향은 다들 알다시피 대실패...[16] 2012년 윤상균에서 개명.[17] 한국 이름은 장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