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1. 개요
2. 일본의 '위안부'
2.2. 일본군 '위안부'
2.3. 기업 위안부
2.3.1. 개요
2.3.2. 명칭
2.3.3. 유래
2.3.4. 인원 수
2.3.5. 내용
2.3.6. 연구가 지지부진한 이유
3. 한국의 위안부
3.1. 한국군 위안부
3.2. 한국정부의 위안부
4. 다른 나라의 위안부
5. 관련문서


1. 개요


이 문서는 일본제국의 성노예 범죄[1]에 대한 역사 인식에 관한 문서이다.
일단 읽기 전에 위안부가 왜 문제가 되는지 알아야 한다, 원래 합당한 대가와 선택의 자율이 보장된다는 조건하에서 군인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것은 고대시절 부터 꾸준히 해오던 일이다. 문제는 아래 나올 위안부들은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의 방법으로 모집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2]
현재 한국과 관련된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가 가장 대표적이다. 모집 방식은 자발성을 띄는 경우도 있으나 전체에 비해 극소수이며, 자발성을 가장한 비자발성 [3] 일본제국 정부는 전시하 위안부 제도를 창출 및 운용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업자들뿐만 아니라 군대에게 위안소 관련 각종 편의( 이송 등 )를 고의로 방조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후에 고노담화에서는 일본군의 '관여'라는 표현으로 일본의 책임을 인정했다. 물론 모집의 주체는 민간인 업자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군 위안부한국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위 문제가 해결된 후 공론화의 필요성이 있다.

2. 일본의 '위안부'



2.1. 가라유키상


일본의 과거 19세기 해외로 나가서 성매매를 하던 일본 여성들을 가르키는 표현. ##
일부 학자들은 과거 일본에서 하던 가라유키상이 운영 주체가 국가로 바뀌며 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2. 일본군 '위안부'




2.3. 기업 위안부



2.3.1. 개요


현재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더 나아가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인식이 강하게 지배된 상황이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아닌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기업에 의해 위안부 생활을 강압적으로 했던 여성들이었다.

2.3.2. 명칭


기업 탄광 등으로 강제 연행된 노동자들의 노동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그들 노동자에 대한 '위안'을 목적으로 연행되어온 위안부의 공식 명칭은 없었다. 단지 창부, 작부, 위안부 등의 용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위안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여러 학자들이 이들 피해자들의 명칭을 다양하게 명명하기 시작하였다. 산업 위안부, 사업장 위안부, 탄광 위안부, 노무 위안부, 기업 위안부 등의 다양한 명칭이 등장하였으나,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들 피해자들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룬 연구지,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4]에서 기업이 위안소 설립 및 경영과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근거로 '기업 위안부' 명칭의 타당성을 처음 제시하였으나, 일각에선 '산업 위안부' 가 쓰이는 등, 현재까지 명칭이 통일되지 않고 있다.
본(r825 이후) 위키문서에선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이를 따라 기업 위안부라고 명명하였다.

2.3.3. 유래


기업 탄광에서 운영된 위안소는 1920년대에 일본에서 유행한 '조선 요리점'과 유사점이 있다. 물론 일본정부의 개입 및 강제 동원 등의 요소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다르게 함을 유념해야 한다.
1920년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급증하였고, 덩달아 이들을 위한 유흥 시설의 수요도 늘어났다. 그런데 원 공급원인 일본 공창에서 조선인을 차별하여 받아주지 않았으므로, 조선인을 위한 유흥 시설로써 '조선 요리점'이 등장하였다. '조선 요리점'은 기본적으로 한국 음식을 제공하였지만, 주 목적은 매춘이었다.
이후 조선 요리점은 성행하여 삿포로의 경우, 1935년경에는 100개 이상 늘어나 일본인들도 출입하였다. 탄광지역인 후쿠오카 현, 치쿠호(筑豊) 지방에는 강제 동원기 이전에도 유곽가에 조선 요리점이 있었으며, 이후 강제 동원기에 탄광에서 유곽가에 위안소를 위탁 경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강제 동원기 이전의 조선 요리점의 관행이 기업 위안소에 많이 남아 있고, 또한 조선 요리점의 폐전업 인력이 기업 위안소로 이동한 경우, 직접적으로 조선 요리점이 기업 위안소로 지정된 경우 등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기업 위안부 피해자들은 강제 징용 노동자와 함께 강제 연행의 형태로 일본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2.3.4. 인원 수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인 강제 연행 노무자 수를 줄잡아 80만으로 보았을 때 기업 위안부 수를 적어도 1만 명, 많으면 3만 명까지 추산하였다.

2.3.5. 내용


1939년 10월 13일 오타루 신문[5] 조간에는 '입도의 반도 노무자들에게 동향 여성의 위로를' 이라는 제목으로 유바리(夕張)와 비바이(美唄) 등 18개의 탄광에 26개의 조선 요리점을 설립할 것을 업계가 홋카이도청에 요망했으며, 곧 허가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통해 기업 위안부는 처음부터 강제 징용되어 탄광에서 노예처럼 일을 했던 탄광 노동자를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타고베야'(문어방)에 기숙하며 혹독한 매질, 저급한 식사,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부상과 사망 사고가 잇달을 정도로 노동 조건이 극히 열악했다. 때문에 노동 효율의 저하, 집단 도주 등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일본 정부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고 노동자의 성욕을 채워준다면 해결될 것으로 판단했다. 탄광 기업들은 성병에 의한 노동 상실을 두려워하여 위안소를 통해 성병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지어진 위안소이기 때문에 위안소는 기업이 운영하였고 노동자들을 지역별로 나눠 지역별 출신의 위안부를 이용하기를 유도하였다. 따라서 일본인 노동자는 일본인 출신의 위안부를, 조선인 노동자는 조선인 출신의 위안부를, 중국 노동자는 중국 출신의 위안부를 이용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설계한 것이다. 운영 책임자는 보통 일본인이 맡았지만 조선인을 위한 위안부인 만큼 조선인이 운영 책임자[6]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후에 중국인 노무자 도입이 정책으로 결정되면서 기업 위안부는 중국인 노동자까지 확대하는데, 1940년 3월, 육군성 전비과장이 북해도탄광기선주식회사 동경 본점으로 보낸, 고력관리요강초안(苦力管理要綱草案)에는 '성적 목적을 고려하여 조선인 중국인 창부를 유치할 것'이 하나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종전 시, 징용 노동자들의 억눌렸던 대일 감정이 폭발하여 여러 폭력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때문에 징용 노동자들을 관리했던 탄광 기업들은 집단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업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주장이 있다.
한 시민 연구자의 증언으로 미쓰이 타가와(三井 田川) 탄광의 경우, 위안소가 모여 있던 사카이마치(境町) 지역에서 여자들을 끌어다가 풍천각(豊泉閣)이라고 하는 곳에 모아놓고, 징용 노동자들을 데려와 성적 만족을 갖게 함으로써 폭동을 막았다는 것이다.

2.3.6. 연구가 지지부진한 이유


기업 위안부에 대한 조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애초에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봐 기업 위안부 피해자들이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도 꺼리는 부분이지만 기업 위안부 피해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당연한 것이 기업 위안부 피해자들을 실제로 겁탈했던 사람들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시설을 인지한 탄광 노동자들이 위안부 증언을 할 리가 만무하므로 한국에서는 연구를 진행할 여건이 매우 좋지 못하며, 일본의 문서자료나 현지 지역 주민들의 면담, 일부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는 선이다.
일각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탄광 등의 위안소는 술집 형태가 많아 일본 우익들이 '위안소'의 성격 자체를 참여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간 곳이라고 트집잡는 경우가 많다. 즉 위안소라 하지만 결국 조선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간 곳이라고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소개해본들 한국 측에 불리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인지 기업 위안부의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3. 한국의 위안부



3.1. 한국군 위안부




3.2. 한국정부의 위안부




4. 다른 나라의 위안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전쟁에서 이긴 국가들이 진 나라의 여성들을 강간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예컨대 2차대전 당시 소련 군인들이 독일 여성들을 강간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소련군에게 강간당하는 것이 두려워 자살한 독일 여자도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여자 뿐만 아니라 폴란드 체코 여자도 강간했다. 소련은 당시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서 독일에 대해 앙갚음을 주려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이나 미성년자 임산부할 거 없이 독일 여자가 보였다하면 강간했고 강간 후에는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버렸다. 심지어 12세 미만의 소녀들을 강간하기도 했는데 강간 후 바로 쏴죽였으니 가담자를 잡을 수 없었다. 소련군들은 폴란드 여자들은 살려줬지만 독일인은 모두 죽여도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런 인식은 사병뿐 아니라 장교들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어서 독일 여성들을 상대로 저지른 강간에 대해선 군사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독일 동부 민간인들은 소련군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아서 서쪽(연합국 진영)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고 독일군인들 또한 전쟁 막바지에 미국 영국의 연합군에게 항복하기를 바랐다. 소련군 포로가 되면 시베리아에 끌려가서 죽게 된다는 소문도 돌았고 실제로 끌려가 독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이는 전쟁 영웅이나 명예롭고 인간답게 싸운 병사들도 예외는 아니였다.[7]

여느 사건들이 다 그렇듯이 2차 대전의 승자인 연합국 국가들의 식민지 위안부 운영 사실은 매우 제한적으로 알려져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같은 경우에는 군인들의 사기진작(?), 위생, 프랑스군과 식민지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위해 프랑스군 위안소(Bordel militaire de campagne, 영문:Bordels Mobiles de Campagne or Bordel Militaire de Campagne, BMC)를 운영했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1946년까지 프랑스에서 식민지인 알제리,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모집 또는 징집했는데, 우리나라의 위안부가 된 사람들과 비슷하게 단순히 일만하는 줄 알고 속고서 자원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참고
독일의 경우 2차세계대전 때, 폴란드, 러시아 점령시 현지 여성들을 군인들을 위한 집창촌에 가두고 매춘을 하도록 강요했다.참고 다만 독일 군인이 매춘 여성이 아닌 점령지의 다른 허락되지 않은 여성들을 강간할 경우 독일 군사재판에 의해 총살되도록 하였다.

5. 관련문서



[1] 일본제국의 영향을 강제로 강하게 받은 한국군의 범죄도 있다.[2] 그 중에는 소수는 윤락여성이였던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광고를 보고 스스로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여성이 속아서 왔다는 것이 문제이며 소수의 윤락여성과 다수의 피해자를 교묘하게 섞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게 일본 제국주의자 혹은 그 옹호자들의 역사왜곡의 핵심이다.[3] 당시 일본제국 치하 한반도의 경우 비자발적 위안부 모집이 대부분이였다. 이 때문에 모집이라기 보단 납치가 더 맞는 말이다.[4] 정진성 (2003),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 『사회와 역사』Vol.0 No.63, 한국사회사학회, pp. 196-227[5]홋카이도 신문[6] 이들이 강제 징용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7] 다만 독일은 최소한 이러한 피해들의 원인이 자신이었음은 명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