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유키상
1. 개요
가라유키상 唐行きさん(からゆきさん)은 19세기 전반에 일본에서 취업사기나 인신매매로 팔려서[1] 주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유곽에서 일하게 된 여성들로 알려져 있다.
2. 상세
규슈의 나가사키 및 구마모토 지역의 하층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뚜쟁이격인 제겐(女衒)이라는 중개 알선업자의 손을 거쳤다. 가라유키상이란 단어의 唐는 외국이나 외국의 것을 뜻하며 문자적 의미는 "해외로 나간 사람들"이란 뜻이다.
제겐 또는 핀푸[2]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알선업자들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젊은 여성들을 물색하여 해외에서 일하게 해주겠다고 부추겨서, 부모에게 돈을 건낸 후에 다시 이들을 포주에게 넘기면서 차익을 챙겼다. 이렇게 얻은 수수료 차익을 모아 직접 해외에서 사창가 경영에 뛰어든 자도 있었다. 참고로 이렇게 인신매매 당한 여성들은 빚을 갚을 때까지 매춘으로 일해야 했다고 한다.
가라유키상들의 주된 목적지는 중국, 홍콩, 필리핀, 보르네오 섬, 타이, 인도네시아 등이었다. 주로 유럽 식민지였던 아시아 국가들로서 유럽이나 미국 군대 주둔에 따라 수요가 많았던 곳에 파견되었다. 더 멀리는 만주, 하와이, 북아메리카(캘리포니아 州), 아프리카(탄자니아 잔지바르)까지 퍼져나간 경우도 있다.
이런 가라유키상들의 해외진출에 대해 당시 여론은 낭자군(娘子軍)이라는 이름으로 선전하였고[3][4] , 메이지 말기에 절정을 이루었으나, 일본 사회가 성장하고 가라유키상 여성들에 대한 관점도 "국가의 수치"로 바뀌어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1920년 매춘금지령과 더불어 해외에 있는 일본인 사창가들도 없어지게 되었다. 가라유키상은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생계가 막막하거나 본국과의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현지에 남는 경우도 있었다.[5]
패전 이후 가라유키상은 전쟁 전 일본의 치부로서 그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6] , 1972년 야마자키 도모코(Yamazaki Tomoko)가 '산다칸 하치만 사창가'라는 책을 내면서 일본사회에 알려졌고, 이후 가라유키상에 대한 여러 연구서적이나 르포 등이 이어졌다.
3. 여담
가라유키상이었던 기타가와 사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보르네오 섬에서는 업소여성이 수입의 50%를 차지하고, 자기몫의 50% 중 빚변제가 25%, 나머지 돈으로 의복, 생활용품 등의 잡비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돈을 갚기 위해서는 1달에 스무명 이상의 손님을 받아야 했다고.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경우에는 업소에 손님이 넘쳐 하룻밤에 30명의 손님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막상 돈이 별로 없는 현지인은 그리 선호하지 않아 접객거부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실제 당시 가라유키상들이 상대하는 손님들은 대개 부유한 서양인이나 일본인들이었다고.
가라유키상들이 살았던 해외 각지에는 지금도 그녀들이 묻힌 무덤과 묘비가 남아있는데, 그나마 이런 경우는 말년이 그나마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이나 성병, 폐병 등에 걸려 더 이상 매춘을 못하게 되자, 바다나 정글에 버려진 채로 무덤도 없이 죽어간 가라유키상들이 많았다고 한다.
가라유키상을 다룬 이마무라 쇼헤이의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
오늘날 역으로 일본에서 성매매와 연관된 유흥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여성들은 쟈파유키상(ジャパゆきさん)이라고 한다.
4. 관련문서
[1] 모두가 그런 식의 피해자였던 것은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을 벌려고 매춘부가 된 경우들도 있었다.[2] 영어 Pimp가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3] 서구 열강에 막 나라의 문을 열었을때, 일본은 해외에 수출을 할 상품이 제대로 없다보니 가라유키상을 해외로 보내고 그녀들이 매춘으로 버는 수익을 정부 재정에 쓰려고 했었기에 가라유키상을 무려 애국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심지어 근대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해야 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만큼 가라유키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가라유키상이 가장 많았던 1910년 무렵, 일본 전체 수출 금액의 10%가 가라유키상들이 해외로 나가 매춘을 해서 벌어들여 일본 본국에 송금하는 돈이었다는 말도 있다.(...) 링크1, 링크2, 링크3, 링크4, 링크5[4]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해외로 나간 가라유키상들의 수는 대략 3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일설에 의하면 이렇게 가라유키상들이 매춘을 통해 벌어오는 수익으로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를 전비를 마련했다고도 한다.(...)[5] 그 중에는 1941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공격했을 때, 영국군을 상대로 정보를 빼내서 일본군을 도운 가라유키상들도 있었다. 링크.[6] 그도 그럴 것이 가라유키상 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여자들은 주위 사람들한테 매춘부라고 욕을 먹거나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