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범죄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War crime). 학자에 따라서는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으로 제국이 완성된 이후 자행된 모든 종류의 학살, 침공, 점령 및 식민 통치 행위를 '광의의 전쟁 범죄'로 아우르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진주만 공습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과 관련된 사건만을 일컫는 '협의의 전쟁 범죄'를 의미한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단죄되고 현재 UN 적국 조항에 규정된 것 역시 후자에 해당한다. 다른 이름으로 '''아시안 홀로코스트(Asian Holocaust)'''라는 말도 존재하나, 이에 대하여 홀로코스트의 의미는 군대에 의한 학살보다는 '인종주의에 기반해 유대인에게 저지른 사회적, 조직적인 말살'을 의미하므로 이를 일본의 경우와 동일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3] 도 있다. 다만, 인종주의 자체는 일본인의 경우 당시의 유럽 못지않게 심했으며, 다만 그 차별의 화살이 주로 조선인이나 대만인, 만주 및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식민지인이나 피점령지인에게 향했다[4] 는 차이점이 있다.
이 전쟁범죄에 대한 현대 일본인의 역사관은 크게 세 가지(소극적 인정론, 적극적 인정론, 부정론)로 나뉘는데, 이 중 일본인 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은 "개전(開戰)과 전쟁중 일어난 범죄사건의 비도덕성・비인간성은 인정하되, 일본 뿐 아니라 모든 열강이 힘의 논리로 전쟁을 일으키고 패권을 다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당시 국제 정세는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현대사는 과거사로서 학문의 영역에서 연구하고, 현실에서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추구하자."는 '''중립 이론''' 내지 '''소극적 인정론'''이다.
즉, 일본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당시 백인 문명들도 매한가지였으니, 마지막 패잔병인 일본에게만 굴레를 씌워서 바라보지 말라는 것. 이러한 소극론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 원인은 뚜렷한 주관이나 신념을 가지는 것을 꺼리는, 일본 사회 특유의 양비론적 태도와, 거기에 더해져 2010년대 이후 일본이 점점 우경화되면서 '기존의 패배주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우익계의 정치선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역사 문제가 한국이나 중국을 제외한, 경제적 의존도 때문에 친일 성향이 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 또 같은 침략자 역사를 가진 유럽과 미국 같은 나라에게서는 피장파장의 입장이라 큰 비판을 받지 않는다[5] 는 것 역시 일본인이 받는 '세계인의 시선'을 희석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6] . 한일기본조약에서부터 고노 담화나 무라야마 담화, 또 21세기 이후 이루어진 고이즈미 담화나 간 담화에서 일본 정부가 내비친 과거사에 대한 입장도 이 소극적 인정론에 해당한다. 일본의 황실 역시 당 전쟁범죄의 지휘자[7] 로서 전후에 간접적인 사죄 의사[8] 를 내비친 적 있다(관련 기사).
이 밖에 '일본은 확실히 아시아 국가들에게 죄를 지었다. 일본의 과오로 인해 고통받았던 주변국에게 충분히 (지속적으로) 사죄하고, 그 피해 규모를 조사하여 배상해야 한다.'는 '''적극적 인정론'''과, '전쟁 범죄라는 굴레 자체가 일본이 패전했기 때문에 짊어진 패널티로서, 일본군의 범죄 행각은 개인적 일탈이거나 날조된 자료이며, 일본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인을 위해 싸웠다. 따라서 (자기들이 보기에)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전쟁범죄 부정론'''이 있다. 전자는 리버럴・좌익 진영에서, 후자는 대개 극우 진영에서 지지하는데, 1980년대 호황 당시에는 적극적 인정론이 고개를 잠시 들었다면, 오늘날에는 동네 작은 서점에서도 극우적 색채를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등, 일본 사회에서 전쟁범죄 부정론을 지지하는 경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전쟁범죄 부정론을 주장하는 극우들의 경우, 상술했듯 "전쟁에서 진 일본에게 연합국 측이 보복하기 위해 만든 사법살인제도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전쟁범죄'라는 말조차 다른 단어로 순화하거나 최대한 그 뜻을 좁혀서 말한다.[9] 일례로 미군 포로들을 술안주 취급한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축소해서 부르고 있을 정도다.米英二國ニ宣戰セル所以モ亦實ニ帝國ノ自存ト東亞ノ安定トヲ庻幾スルニ出テ他國ノ主權ヲ排シ領土ヲ侵スカ如キハ固ヨリ朕カ志ニアラス
미영 양국에 선전포고를 한 바는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척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는 쇼와 덴노의 옥음방송 中
(이 대목은 전후 일본에서 전쟁책임론을 부정하는 우익 사상가들이 식민지 경영과 태평양 전쟁을 변호하는 레퍼토리로 쓰였다.)
1996년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 미국인들과 전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대한민국에서도 이 다큐멘터리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시청자들에게 방영되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국가기록원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서의 학살(한국어 번역본)
대한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학살 등이 지금도 사회적으로 이슈다. 중국 역시 난징 대학살 사건과 신멸작전 당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왔다.
나무위키의 편집지침상, '''이 전쟁범죄를 옹호하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고 예시에도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을 정도다. 일본 제국의 만행을 찬양하는 내용을 아예 적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렸다.[10]
2. 나치#s-1의 전쟁 범죄와의 비교
일본군의 만행은 나치 독일 같은 근대적인 문명 국가의 조직이 관료적으로 했다기보다 오히려 관료제의 부실한 부분들이 '''봉건적인 조직문화'''와 시너지를 일으킨 것에 더 가까우므로 정치, 사회학 관련 연구자들에게 집중할 대목이 적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이런 점도 학계에서 반박되면서 현재는 일본군이나 독일군이 똑같은 인간들이란 쪽으로 흘러가긴 한다.[11]
즉, '''간사한 악당들이 계산적이게 조직적으로 저질렀느냐, 뼈 속까지 세뇌당한 악당들이 본인의 죽음까지 불사하며 아무 생각없이 저질렀느냐''' 하는 차이다. 나치 독일은 철저했다는 것이 홀로코스트뿐만 아니라 독소전쟁 당시 전쟁범죄도 해당되는데... 독소전쟁에서는 히틀러가 우생학을 근거로 대놓고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도록 명령하자 그냥 '''국방군, SS과 학살전문부대까지 운영해서 철저하게 학살했다 ''' 그중 제일 극악무도한 것이 국방군, 무장친위대, 아인자츠그루펜, SD방첩대, 게슈타포, 반공자위대를 동원해서 벨로루스를 완전히 초토화 시킨 벨로루스 초토화 작전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후자의 악당들에게는 자신들의 만행이 그리 크지 않았거나 소수 사례에 국한된다, 내지는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는 나치 독일 이외에는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3. 포로 대우
일본군의 연합군 포로 대우는 개전 초기부터 매우 잔인했고[12] 대다수의 포로들이 교량 건설, 기지 건설 등의 노동에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단순한 재미로 이들 포로들 중 아무나 지목해서 처형이라면서 죽이기도 했다. 유명한 사진으로 나온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에 대한 참수 장면은 빙산의 일각.
이 때문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의 생존 확률은 서유럽에서의 포로 생존률과 비교해서 너무나 낮은 수치를 보였다.[13][14] 실제로 일본 해군 소속 잠수함 I-8의 경우에는 포로로 잡은 미군을 갖은 도구를 사용해서 죽이거나 함정 밖에 세워놓고 잠항하면서 이들을 죽여버리는 짓을 당당하게 했다. (잠수함 I-8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또한 버마 철도에서 전쟁포로들이 받은 대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거 여기서 포로생활을 했던 군인들이 아우슈비츠나 굴라그와 비교 했을 정도다. 다만 생산력을 최대로 착취하는 굴라그는 그 자체가 인종말살을 목표로한 나치의 수용소보다는 '''상대적으로 좋다'''는 것이 역설. 사실 굴라그는 먼 나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규모가 아닐 뿐이지 북한의 요덕 수용소나 그와 유사한 인권유린적 수용시설을 생각하면 딱 적절하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중립국이나 적십자를 통한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했던 서구 연합국 포로들에 비해서 중국이나 만주에서 잡힌 항일 게릴라나 중국군은 거의 대부분 극심한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는 것이 운명이었고 그것은 한동안 서구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3.1. 포로 학대
어느날 오노 소위가 말했다.
"너희는 지금까지 아무도 죽이지 못했으니 오늘은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중국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개나 고양이로 여겨라. 용감해져라!'''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할 사람은 앞으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소위는 자제력을 잃었다.
"이런 비겁한 놈들 같으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대일본 제국의 군인이냐? 그럼 내가 지목하겠다! 오타니, 후루카와, 우에노, 타지마!"
세상에 내 이름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총에 총검을 꽂고 소위의 신경질적인 명령에 따라 공포에 질린 중국인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이 판 구덩이 옆에 서 있었다. 난 속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며 눈을 질끈 감고 소위의 욕설을 들으며 불쌍한 중국인을 향해 돌진했다. 눈을 뜨니 중국인 포로는 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다.
'살인자!'
나는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본문 中 학살의 숨은 동기들 - 88페이지/아이리스 장[15]
의 저서
구타와 더불어 일본군의 '''사디스트적인 면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포로학대이다.'''1943년 3월 19일. 내일 철도 작업을 위해서는 600명이 필요하다. 신발이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일을 견뎌 내야 한다. '''이것은 살인에 버금가는 짓이다.''' 일본인들은 여기(수용소)와 싱가포르에 엄청난 인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 작업을 하면서 '''생명이나 건강은 눈꼽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망가뜨리려는 온갖 의도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히 계획적인, 냉혹하고 무자비한 반인륜적 범죄라 간주할 수밖에 없다.
1943년 5월 17일… 요즘 각기병에 걸려 부풀어 오르고, 니코틴산 결핍증이나 이질, 말라리아에 걸리거나 구역질 나는 종기에 시달리며 점차 여위고 가없은 몰골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오른다. 구역질나고 증오스러운 원숭이들.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이 짐승들에게 항복해선 안 됐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얻은 쓰라린 교훈이다.'''
1943년 6월 22일… '''말라리아 증세로 몹시 아픈(그는 일하다가 실신했다) 할렘 하사는 병실에서 끌려나와 기관병 하사와 다른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매질을 당했다.''' 놈들은 이런 짓을 했다. '''주먹으로 때리기, 얼굴과 머리를 나막신으로 내려치기, 소방관처럼 어깨로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심하게 메치기, 배와 사타구니와 늑골을 발로 차기, 대나무와 나무 그릇으로 머리 때리기… '''이 역겹고 잔인한 짓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할렘 하사는 열이 39.7도까지 오르고 얼굴과 목, 가슴, 사지에 심한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은 채로 완전히 실신했다.
1943년 6월 26일… '''할렘 하사는 상처 때문에 죽었다.''' 그는 총으로 쏜 것보다도 더 확실히 저 일본인 사디스트들에게 살해당했다.
-
― '''호주군 에드워드 던롭 중령, 포로 수용소에서 몰래 남긴 일기 中'''
일본군은 1930년대 중일전쟁 시기부터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일단 난징 대학살을 저지른 명분은, 난징 시민들 중에 중국군 잔당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저항 없이 항복한 중국군 병사조차도''' 처리하기 귀찮아서 학살하기 일쑤였고, 포로를 이용한 인체실험도 거리낌 없이 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주만 공습 이후 처음으로 치른 웨이크 섬 전투에서 잡은 포로를 배로 수송하다가 '''포로가 허락 없이 일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즉석에서 목을 베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필리핀 전투 이후 대규모로 미군-필리핀군 포로를 잡자 이들을 '''포박한 채로 식량이나 물도 없이 수백 km를 행군시켜 아사하거나 낙오자의 즉결처분으로 만 명이 죽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탄 죽음의 행진'''이다. 이때 포로를 '''총알이 아까워 총검으로 찔러서''' 즉결처분했다고 한다.
전후 통계에 따르면 일본군은 무려 '''약 37%에 달하는 포로 사망률[16] '''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독일군의 포로관리 역시 30%를 넘기는 포로 사망률을 기록하면서, 두 나라가 영혼의 추축국 콤비임을 입증했다.[17]
포로 수용소에서도 식량보급 없이 중노동에 종사시켜 연합국 포로 수만 명을 죽였고, '''사소한 규칙 위반을 이유로 참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잠은 얕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점호 때문에 정렬하거나 특별 작업반에 뽑히거나 매를 맞기 위해 오두막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지독하게 아픈 환자라도 집합에는 무조건 나가야 했다. 집합은 몇 시간 동안이나 한나절, 심지어는 밤새도록 계속될 수도 있었기에, 아픈 환자들이 죽어 나갔다.
-
'''"너희는 잡석이나 다를 게 없는 것들이니까, 뒈지면 시체는 철로를 놓을 때 잡석과 함께 밑바닥에 깔아버릴 거다."'''
-
유명한 콰이 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만도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과 의료 지원도 없었다. 거기다 끔찍한 작업 환경과 거주 시설, 그리고 말라리아, 뎅기열, 이질, 콜레라 등 온갖 전염병이 창궐했다. 결국 약 1만 2천 명의 연합군 포로들과 현지에서 징발당한 9만 명의 강제 노역자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일본군에게 붙잡힌 미군 포로가 이렇게 말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내 이름과 계급, 군번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일본군 심문관은
"뭐? 제네바 협정? 우리는 전쟁 중이야! 그걸 몰라?!"
"제네바 협정에는 분명 포로에 대한 규정이…"
"닥쳐! 우리는 어디에서나 우리의 규정대로 한다!"
뺨을 때리며 말을 잇는 심문관.
"한 가지 더 말해두겠는데, 오늘 오후에 널 죽일 수도 있어. 그래도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몰라. 알겠나!"
그리고 그 심문관은 그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뒤,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훗날, 그 심문관은 연합국에게 가장 먼저 포로가 되자
'''"이보시오! 나는 포로요! 제네바 협정을 지켜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연합국 장교는
'''"포로가 된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고함을 친 뒤, 그 심문관을 '''함선 프로펠러에 던져버렸다.'''
더욱이 이런 '''야만적인 포로관리를 조선인들에게 맡게 하여 전후에 전범으로 몰려 연합국이 처형한 조선인[18] 들도 꽤 많다.'''…목적은 미국과 영국의 전쟁 포로들을 조선에 억류함으로써,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럽과 아메리카 숭배 사상을 박멸하기 위한 심리적 선전 활동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게 우리 제국의 힘을 확실히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
바다에서 일본군의 포로 수송선 역시 열악한 대우 때문에 포로들이 죽어나가서 헬 쉽이라고 불렸다. 저 단어 자체는 이전에도 사용되던 단어지만 2차 대전을 거치며 일반적으로 헬십이라고 말하면 일본군의 포로수송선을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으니 얼마나 가혹하게 대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비좁은 수송선에 포로를 넣을수 있는때까지 넣어 수송을했고 포로수송선엔 아무런 표식도 하지않아서 미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침몰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아리산마루(ArisanMaru)가 미군포로 1781명을 수송중에 미군잠수함 Uss Snook의 뇌격을 받아 9명의 포로만 살아남은 사건이 있었다.[19][20]
항공기 조종사/승무원에 대한 대우도 열악하여 미드웨이전투에서의 미군조종사 처형뿐만 아니라 전쟁초기 웨이크섬의 와일드캣 해병대 조종사들은 포로수송선에서 총검술 훈련에 사용되어 죽었다. 격추되어 잡힌 폭격기 승무원들도 관리하기 어렵다거나 단순 재미용으로 처형되었다.
1945년 항복 직전에도 일부 항복 반대파들은 '''자국 내에 있는 연합국 포로들을 모조리 처형하여 일본의 의지를 보이자'''는 정신나간 소리도 쳤다. 물론 이 때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여 '''더 이상 이런 미친 짓은 안 했다.''' 만일 해당 소리를 천황이 받아들였다면 분노에 찬 연합군에게 천황도 절대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일본군부는 이런 미친 짓을 무사도로 포장해서 포로는 불명예스럽게 항복을 했으니 비겁하고 한심한 군인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일본군들이 착각하는 내용으로 사무라이는 사실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걸 불명예로 여겼다. 심지어 사무라이가 최고로 명예롭게(?) 죽는 할복도 센코쿠 시대 시미즈 무네하루가 '''부하들 항복 후 목숨보장을 해주기 위해 할복을 한게 그 시초다.''' 당연하지만 이건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군은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긴게 문제였다.'''[21] 게다가 더 웃긴 건 정작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을 비웃던 놈들이 정작 그 상황에서 자기네들이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이 되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이나 했다는 것이다.
4. 학살과 강간
여자들이 가장 고통을 받았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모두 강간당할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자들을 붙잡기 위해 (중략) 석탄 트럭들을 도시 중심가와 마을로 보냈다. 그리고 트럭마다 강간을 하기 위해 15명에서 20명씩 군인들을 배분했다.
우리가 그녀들을 강간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행이라는 소리는 못하겠다. '''우리는 항상 그녀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
― '''난징 대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 114사단 퇴역병 아즈마 시로 등의 증언 中'''
'''이것의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란 게 그 유명한 일본군 위안부'''. 그러나 일본군은 그 이후에도 양민학살과 강간을 일삼았으며[22] 막장 전설은 "시베리아 출병" 이후로도 지속되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까지 지속된다. 특히 '''난징 대학살 당시에는 미쳐 날뛰는 일본군들이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을 강간'''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어로 난징 대학살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jing)'''일 정도다. 이는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1968-2004)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녀의 부모는 난징 대학살을 피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난징의 강간>은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아이리스 장은 일본 극우들의 끊임없는 협박을 받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전투를 할 때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약탈인데, 상관도 제 일선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약탈을 하는 자도 있었다. 어느 중대장은 "볼 일이 다 끝났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돈을 쥐어 주든지, 아니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그냥 죽이도록 해라."며 몰래 강간을 한 뒤의 처리방식까지 가르쳐주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을 하나하나 조사했더니 모두 강도살인, 강도강간의 범죄자들뿐이다.
-
― 1939년 2월 육군성 비밀문서 제 404호, '사변지에서 귀환한 군대와 군인의 상황' 中
'''만주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은 점령지 어디에서나 초지일관하게 대량 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특히 중국전선에서는 중국인들은 미개한 인종이라고 선전 세뇌시키던 일본군부의 세뇌교육 탓에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인들을 사람이 아닌 돼지 같은 짐승으로 여길 정도였다.
3.1 운동 중에는 그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서양인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이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을 외치던 조선인 초등학생 소년의 오른손을 총검으로 베어버리자 그 아이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번엔 다른 일본군이 왼손을 잘라버리자, 그 아이는 목청껏 독립 만세를 외쳤고 세 번째 일본군이 가슴을 총검으로 찔러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아이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총검으로 시체를 유린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으며, 일본군은 이 '''서양인 기자에게도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사진기를 내놓으라고 했다고 한다.'''우린 달아나는 여자들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달아나면 그제야 등에 총을 쐈다. '''강간할 때는 여자로 보였고 죽일 때는 돼지로 보였다.'''
-
― 다코코로 코조 114 사단 병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키 다나카가 저술한 일본군의 범죄 행위를 고발한 책인 '히든호러'에는 당시 일본군의 동맹국 국민들에 대한 학살 행위가 자세히 묘사되어서 나온다. 1943년에 파푸아뉴기니의 Kavieng에선 '''독일인 목사 약 10여명과 독일인 수녀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그것도 매달아 놓고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이유가 걸작인데, '''연합군이 상륙하면 같은 백인이니 협력자가 될 것'''[23] 이라는 것이 이유라고.# 게다가 당시 현지에 민간인들이 몇 명 정도 있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호주군이 전후 민간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샅샅이 조사하다가 2년만에 학살을 밝혀냈고, 이때 체포된 일본군 장교들은 전부 다 책임회피하고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또한 1945년 필리핀 전투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마닐라에서도 친추축국인 스페인의 영사관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를 미군의 무차별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해명했지만, 당연히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뿔난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던 스페인은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당시 스페인은 형식상 중립국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세력이 독일 및 이탈리아로부터 지원받은 인연 때문에 추축국과 관계가 매우 좋았다. 당연히 일본과도 공식적으로 동맹 관계만 아닐 뿐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스페인이 단교를 해버릴 정도였으니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막나갔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중일전쟁 당시 강간 살해에 맛이들려 전후 일본에서도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던 퇴역 군인이 체포된 사건마저도 있을 정도였다."중국 전선에서 맛봤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
― 연쇄강간살인마 고다이라 요시오, 전후 7명의 일본인 여성을 강간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된 뒤 한 진술에서
현재도 일본 정부는 당시 모든 일을 부정하려고 들거나 혹은 인정해도 어쩔 수 없는 일 등으로 감추려 하나[24] , 그들이 전선에서 공식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공개적인 잔혹행위를 장려한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식인
우리는 300마일 덜어진 곳에 끌려가 하루 12시간 작업을 했죠. 먹을 게 거의 없었어요. 포로들은 풀과 나뭇잎을 먹었는데 뱀, 개구리, 그리고 다른 곤충들까지 먹었어요. 여기서 일본군은 '''매일 포로 1명을 잡아먹었어요.''' 약 100명의 포로가 일본군에게 잡아먹혔어요. 나머지는 50마일 떨어진 곳에서 10명이 병으로 죽었는데, 일본군은 또 포로를 고르기 시작했어요. 선택된 포로는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산채로 살을 잘라내고는 그대로 도랑에 버렸어요. '''선택된 포로에게서 살이 잘려 나갈 때, 버려진 뒤 도랑에서 고통에 못 이겨 내지르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 왔어요. 울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어요.'''
-
식량 부족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는 극한 상황에 몰린 군대에서 아주 흔하며, 일본군의 식인 행위의 원인 또한 식량 부족이 때문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군 보급 문제를 보면 알겠지만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식인 행위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밀리환초 학살사건이 대표적인 예.[26]'''"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는 놈은 엄중히 처벌한다."'''
-
― '''1944년 12월. 제 18군 사령부''' (1946년 12월 11일 도쿄 재판 기록)
다만 너무도 임팩트가 엄청난 한 식인 사건 때문에 이러한 보급 문제가 있다는 점은 거의 잊혀지는데, 관련 사건으로는 1945년 2월 23일에서 25일 사이에 벌어진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사기 진작 차원에서 현지 지휘관이 직접 나서 식인을 한 것이다. 이는 공문서로도 남아있다. 다치바나 요시오 문서 참조.
일본군의 식인 행위들을 일부의 일탈로서 극소수의 사례로 보는 견해나 아예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당대 일본군의 식인 행위는 꽤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같은 일본군마저도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여러 증언들이다.
'''일본군은 포로들을 선별하여 매일 1명씩 죽인 후 먹었다.''' 나는 직접 그 광경을 봤는데, 일본군은 그곳에서 100여명의 포로를 먹었다. 나머지 포로들은 약 80km 떨어진 다른 장소로 데려가 그 곳에서 10명의 포로들이 병사하였다. 거기서 일본군은''' 또 다시 포로들을 선별하여 먹기 시작했고, 선택된 포로를 오두막으로 데려가 산 채로 살을 몸에서 도려내었다.''' 그 후 나머지 몸을 구덩이에 버렸고 포로는 구덩이 안에서 죽어갔다.
-
인도인 포로인 랜스 나익 하탐알리의 증언
산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의 대부분은 약탈자였습니다. 먹을 게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제비뽑기를 하기로 했어요. 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기로 한 거죠.''' 그러나 진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해서 우리는 그를 쏘았어요. 그는 결국 잡아먹혔어요. 당신은 아마도 우리들 중 다수가 현지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굶주림을 채워줄 대상으로 생각되었어요. 우리는 성욕이 없었어요. 강간을 하는데는 힘이 너무 많이 듭니다. 우리가 꿈꾼 것은 먹을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가져가는 군인들을 산에서 만났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게릴라가 아니라 일본 군인들이었습니다.
-
일본 해군 헌병 대장 노기 하루미치 회고록
우리 부대는 시체를 빼내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희생자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3세트의 호주군 웹장비, 부츠 2켤레, 옷 2벌, 다른 잡동사니를 발견했다. 추가 수색으로 00에 의해 00의 것으로 쉽게 인지되는 두피를 찾아냈다. '''창자는 통나무에 걸쳐져 있고, 불에 탄 살 조각, 탄약갑에는 간으로 보이는 조각들이 있었다.''' 300야드 정도 떨어진 오두막 밖에서 불에 탄 뼈가 발견되었다. 100야드쯤 떨어진 다른 오두막 밖에서 '''다리, 허벅지, 어깨뼈 등이 사람 살덩어리와 함께 발견되었다.''' 또 다른 오두막 밖에는 00의 머리가 있었다. 두피를 벗긴 머리와 등뼈로만 구성된 그 시체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 이 잔해 옆에는 타서 숯이 된 손목과 손이 놓여 있었다.
-
― A.B.카슨 중위
미국에서는 일본군의 식인을 고발한 책이 나왔다. 책의 제목은 <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이다.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추락한 미군의 조종사들을 일본군이 살해하여 먹었다는 내용이다. 주로 간과 허벅지 살을 먹었다고 하며 군의관이 해부를 했다고.# 사건이 벌어진 곳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시마'라는 섬이다.[28]일본군과 대만인은 따로 식사를 준비했다. 일본군은 고기를 개고기라 주장했다 그는 섬에서 개를 본 적이 거의 없던지라, 매일 개고기를 공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PW[27]
가 본 고기는 껍질이나 털이 거의 없었다. 그가 아는 개고기는 껍질이 두텁고 털자국이 빽빽하게 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 고기는 구워서 먹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944년 6월 PW와 다른 13명의 대만인이 연합군에 투항하러 가는데, 신원을 알 수 없는 약 100명의 일본군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대만인 8명이 죽었는데, 그가 죽은 척 하고 있는 동안 PW는 일본군이 '''죽은 대만인에게서 빼낸 창자를 자기 음식 그릇에 넣는 것을 보았다.''' 일본군은 곧 떠났다.-
107 비행장 측량 및 건설부대 2중대, 대만인 노동자 PW, JA는 1944년 8/28 보로키에서 미군에 투항.
아버지의 깃발로 유명한 제임스 브래들리도 이와 관련한 책을 낸 적이 있다. 제목은 <플라이 보이스>.관련서적
6. 인간 방패
일본군은 사이판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문 위키피디아 인간 방패 항목 참조.[29]
7. 세뇌와 옥쇄를 빙자한 자살 강요
사이판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카미카제 같은 자살돌격을 시킨 것에서 볼수 있는 근본은 천황에 대한 맹신을 기반으로 한 세뇌가 차지하고 있다. 오죽하면 천황이 종전 선언을 했을 때 그걸 듣지 못했다고 혹은 그 선언 자체를 막기 위해 반란을 저지르기도 했을 정도. 이 반란에 대해서는 궁성사건과 마츠에 소요 사건 참고. 반자이 돌격 역시 군중심리를 이용한 세뇌였을 정도니.
이는 자국 민간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미군에게 농락 당할까봐 자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오키나와 전투를 다룬 드라마인 사탕수수밭의 노래에서도 나오는데 미국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다는 말을 하며 걱정하는 말을 하는 장면이나 주인공 집에 시집온 여교사도 아이들에게 Do You Kill Me? 라고 가르칠 정도였고 드라마 후반 미군에 방공호가 들통나자 안의 주민들도 희롱당할 바엔 자살하자는 말을 했다.
8. 조선인 및 아시아 각국 강제징용 노역
태평양 전쟁 중기가 되면서 조선인들을 강제징용에 동원했는데, 태평양 전선에서는 태평양 해군기지 건설, 내지에서는 석탄 다산지에서의 탄광업, 탄약 및 무기 부품 제조에 동원시켰다.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 강제로 징용되었다.[30]
징용된 인원들 중 한반도 안에서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였지만, 약 15만명의 인원이 강제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석탄 채굴 등의 강제 노동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사모아와 같은 적도 근처에 있는 섬까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대우는 아우슈비츠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매우 박했고, 반항자나 굶어죽거나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이 생기면 갱도 구석에 몰아다가 불태워버리는것은 기본이었다. 징용된 조선인들은 일본, 남양 군도[31] , 버마, 사할린으로 끌려가 탄광, 군수공장, 토목공사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으며, 엄청나게 강도 높은 강제노동과 구타로 조선인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일본은 공사가 끝난 평양 비행장의 공사장에서는 보안 유지를 이유로 조선인 징용노동자 800여 명을 집단으로 학살했고, 지시마 열도에서도 5,000여 명의 징용노동자를 역시 기밀누설 방지라는 이유로 학살했다.[32] 남양 지방의 섬에 끌려간 조선인의 경우에는 일본군이 후퇴하자 조선인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 무참하게 학살당한 사례도 있으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에는 광산 노동 중에 있던 수많은 조선인이 사망하기도 했다.
또한 맛있는 고기라면서 무언가를 대접해줬다는데 그것이 죽은 동료의 인육이었다는것도 이쪽 생존자 증언담의 클리셰중 하나. 이 경우 밀리환초 학살사건에서 실제로 이런 증언이 나왔다.
물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및 전쟁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중국인의 경우 무려 1천만 명 가량이 강제징용을 위해 동원되었고. 강제징용된 사람들은 미쓰비시와 같은 전범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거나 일본군 밑에서 노역을 해야 했다. 약 4백만 명에서 1천만 명의 강제징용자들이 일본군 밑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는데, 물론 노동은 무척 고된 작업이였고 10만명의 포로들이 미얀마에서 철로 건설 중 사망하기도 하고, 다른 일본군의 점령지로 전출된 27만 명의 인도네시아인들 중에서 고작 5만 7천명만 살아 돌아왔다. 대만도 마찬가지라서 86만명이 넘는 강제징용자가 끌려나가사 40만명이 살아오지 못했다. 그밖에도 대만 원주민들도 12만명이 끌려나가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나갔다. 그렇게 학도병제와 징병제 등으로 21만 명의 조선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갔고, 그 대다수가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당했다.
9. 일본이 저지른 범죄와 학살들
- 남한대토벌 난징대학살의 한국버전
- 뤼순 대학살
- 일본 해군 구축함의 전쟁범죄
- 가게로급 구축함 아라시의 포로학살.
- 유구모급 구축함 마키구모의 미군 포로 학살 사건. 자세한 내용은 마키구모(함대 컬렉션) 참조.
- 일본 해군 잠수함의 전쟁범죄
- I-8의 상선격침, 승무원 학대 후 살해 사건
- I-177의 호주 병원선 AHS 센터우르 격침사건 참고 자료
- I-37의 격침한 상선 포로 납치,학대,살해 사건
- I-26의 격침한 상선 포로 납치,학대,살해 사건
- I-12의 격침한 상선 승무원 살해 사건
10. 관련 일본군
11. 관련 단체
12. 관련 인용구
'''" 그들은 강한 인종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일본군들이 교육받은 것은 그들이 백인들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이었지요. 인도인들이나 그리고 남향에 사는 여러 민족인들 인도차이나인들 그리고 중국인보다도 말입니다. 그들은 또 백인들이 결국 일본인들을 주인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
-
- 로드 파셸
'''" 사변이 해결되지 않는 근본 원인은 일본인이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탈 폭행을 저지르면서 무슨 일본군이냐. 현지의 일반 민중을 괴롭히면서 성전이란 또 뭐냐. 대륙에서 일본 관민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폐하의 마음에 합치한다고 생각하는건가?"'''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참모대위시절 장성 영관급이 참석한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검토회를 열었을 당시 했던 말.[41]
'''" 미군이 필리핀에 진격해 들어오면서 또 다른 일본군의 만행이 발견되었다. 마닐라에서 1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것이다."'''
"'''일본군들은 미쳐 날뛰었어요.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흥분을 해서 죽이고 파괴를 하는데 마치 정신병자들이었죠. 일본군들은 어린애들을 찔러 죽이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부녀자하고 노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또 집집마다 불을 지른 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 그들에게 마구 총격을 퍼부어 대었죠. 그들은 또 에르미타에서 소녀들을 떼거리로 잡아서 메이거 호텔로 데려갔는데 전 그 아이들이 강간당하는 날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 731부대나 100부대 같은 세균전을 담당하는 특수 부대가 있어서 탄저병이나 기타 질병들을 옮기는 세균들을 분무액으로 만들어 중국인 마을과 부대에 살포했다. 만주국 핑판에 있었던 특별한 의료시설에서 일본군들이 수용한 포로들에 대한 생체 실험은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을 능가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마루타, 즉 통나무라는 불리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폭격이나 총격에 노출시켜 군의관들에게 상처를 연구하게 하면서 탄환의 성능을 실험했다. 사람을 얼려 죽이며 동상치료에 대한 연구를 했고, 살아있는 사람을 산 채로 해부해서 견습 의사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인체 기관을 관찰하도록 했다. 또한 매독에서 장티푸스 등 온갖 출혈열까지 가능한 질병들을 포로들에게 감염시켜 3천여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
- 로드 파셸
"''' 원자폭탄은 모든 전쟁포로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적이 진주해 들어오기 전에 모든 전쟁포로들을 처형하고 또 모든 흔적들을 없애버리라는 명령들을 하달 받은 상태였으니까요. 그렇게 악질이든 사람들이 원자탄 이후로는 얼굴을 바꾸고 있습니다. 죗값을 청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증거가 될 만한 서류들 산더미를 불태웠고 악질 감시병들에게는 잠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생체실험부대에 있던 포로들과 노무자들은 모두 학살했고 질병에 걸린 쥐들은 모두 풀어 주었지요."'''
-
- 프랭크 푸, 후지타 포로
"'''수술대에 눕혀진 포로들에게 마취가 진행됐고 옷이 벗겨졌다. 팔에 꽂은 주사기를 통해 투명한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노 옹은 “나중에야 그게 바닷물이었으며 혈액 대용으로 주입됐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다음 광경은 더 끔찍했다. 포로 몸에서 장기가 하나씩 적출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고 있던 일본 군인 1명이 갑자기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라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는 변명이었다."'''
-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한국(조선) 독립운동가 40여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
-
- 1998년 KBS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미국 의회 도서관 미군 정보문서 참고. 731부대 다큐멘터리 19:45초
13.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룬 작품들
13.1. 일본
- 바다와 독약
- 악마의 포식
- 철완 버디
- 4부작 OVA
- 2000년 이후 만화판
- 머더 라이센스 키바
13.2. 일본 밖의 국가
- 난징! 난징! (영화)
- 욘 라베 (영화)
- 금릉십삼채(진링의 13소녀) (영화)
- 마루타 (소설)
- 흑태양 시리즈 (영화)
- 귀향 (영화)
- Days of Infamy 시리즈[43] (소설)
- 가스 이니스[44] 의 배틀필드 - '빌리에게'(Battlefields: Dear Billy) (만화)
- 군함도 (영화)
- 소녀이야기 (영화)
- 환 (영화)
- 소녀에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