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공

 


'''위(衛)나라 27,29대[1] 국군
헌공
獻公
'''
''''''
희(姬)
''''''
위(衛)
''''''
간(衎)
'''아버지'''
위정공(衛定公) 희장(姬藏)
'''어머니'''
강비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44년
'''재위 기간'''
음력
1차: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59년
2차: 기원전 546년 ~ 기원전 544년
1. 소개
2. 생애
2.1. 비범한(?) 시작
2.2. 폐위 전
2.3. 신하들에게 폐위당하다
2.4.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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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제27,29대 군주. 위정공의 아들. 위상공의 형.[2] 위양공의 아버지. 사냥질 만하다가 신하에게 폐위되었으나 13년 뒤에 복위했고, 공신인 영희를 죽였다.

2. 생애



2.1. 비범한(?) 시작


아버지 위 정공이 죽었을 때 그 아내인 강비는 눈물을 흘렸으나 위헌공은 전혀 울지 않았다.

2.2. 폐위 전


위 헌공 원년(기원전 576년) 봄, 위 헌공은 노나라, 진(晉)나라, 정나라, 송나라, 제나라 등과 함께 척 땅에서 회맹했다. 그것은 조나라의 군주 조성공을 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조 성공을 체포해 주나라로 암송하기 위해서였다. 11월, 순림보는 진(晉)나라, 정나라, 제나라, 오(吳)나라와 종리에서 회맹했다.
위 헌공 2년(기원전 575년), 위 헌공은 정나라를 쳤다. 가을 위 헌공은 진(晉)나라, 제나라, 송나라 등과 함께 사수 땅에서 회맹했다.
위 헌공 3년(기원전 574년), 노나라, 진(晉)나라, 제나라, 송나라와 연합해 정나라를 쳤다. 이후 가릉 땅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겨울 다시 제후들과 정나라를 쳤다.
위 헌공 5년(기원전 572년) 봄, 송나라의 팽성(彭城)[3]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위 헌공은 노나라, 진(晉)나라, 송나라와 반란군이 점령한 팽성을 포위했다. 위 헌공은 영식에게 노나라를 방문하게 했다.

2.3. 신하들에게 폐위당하다


위 헌공 13년(기원전 564년), 위 헌공은 악사 사조를 시켜 첩에게 금을 타는 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첩이 잘하지 못해 사조가 매질을 하자 첩은 악사 사조를 모함했고, 위 헌공은 곤장 300대를 때리게 했다.
위 헌공 18년(기원전 559년), 위 헌공은 손림보와 영식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했으나 위 헌공이 끝내 부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러기 사냥에 빠진 탓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크게 노해 숙읍으로 갔다. 악사 사조는 그것을 알고 손림보를 교언장이라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자극했다. 이 일을 손림보가 거백옥에게 말했는데, 거백옥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손림보는 위 헌공을 쳐서 몰아냈고, 위 헌공의 아우이자 위 정공의 아들인 공자 표를 세우니 그가 바로 위 상공이다.[4] 위 상공은 손림보를 숙읍에 봉했다.

2.4. 복위


위 상공 12년(기원전 547년), 영희와 손림보가 총애를 다투며 서로 미워했다. 위 상공은 영희에게 손림보를 치게하니 손림보는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진(晉)나라 그리고 진(晉)나라에 위 헌공을 복위시켜 달라고 했다. 제경공(齊景公)은 제나라에 있는 위 헌공을 복위시키기 위해 위 헌공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진(晉)나라는 위나라를 쳐서 당시 위나라 군주인 위 상공을 회맹에 이끌고 진평공(晉平公) 영희와 위상공을 사로잡아 위 헌공을 복위시켰다. 위 헌공이 도망간지 13년 만에 복위했다.
위 헌공 복위 원년(기원전 546년), 위 헌공이 영희를 처형했다.
위 헌공 복위 2년(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공자 계찰이 위나라를 방문해 거백옥과 사추를 만났다. 계찰이 그들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군자가 많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위 헌공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악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위 양공이다.
[1]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다[2] 일설에는 위 상공이 위 헌공의 숙부로 나온다.[3] 항우가 머무른 그 팽성 맞다.[4] 이름은 달리 추(秋)라고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