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초(楚)나라 초대 패왕
항적
項籍'''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작위'''
서초패왕(西楚覇王)
''''''
(項)
''''''
(籍)
''''''
(羽)
''' 고향'''
하상(下相)[1]
'''사망지'''
오강(烏江)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232년 3월 29일 ~ 기원전 202년 (31세)
'''재위 기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은통을 죽이고 거병하다
2.3. 반(反) 진 전쟁
2.4.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
2.5. 서초패왕 항우
2.6.1. 제나라 공격
2.6.3. 형양 함락
2.6.5. 몰락의 길
2.6.7. 영웅, 오강에 지다
2.6.7.1. 역사적 사실인가?
3. 평가
3.1. 군사적 능력
3.2. 정치적 능력
3.2.1. 복고주의
3.3. 인사상 실책
3.4. 총평
4. 기타 이야깃거리
5. 어록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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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초(楚)나라의 군주로서, (漢)의 유방(劉邦)과 함께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
만인지적(萬人之敵), 패왕(霸王),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가 모두 항우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어마어마한 무력과 패기, 천부적인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고대사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였고, 실제로 한신과 맞붙었던 해하 전투를 제외하면 지휘관으로서 전장에서 패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나 몇천 명의 병사로 수십만 대군을 패주시키는 등, 기록만 보면 현실의 기록이 아니라 무협지의 묘사인 걸로 착각할 정도. 어느 정도냐면 말에 타지도 않고 단신으로 기병 수백여 명을 썰어버리거나, 항우가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니 모든 적군들이 놀라서 엎드리며 길을 터주었다는 것이 실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 전술적 능력과 군사 지휘 및 통솔력 또한 중국사 최고라 평가받을 정도인데, 무력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패왕', 그 자체. 훗날 고작 3만의 군사로 60만 대군을 초토화시키고, 별다른 피해 없이 적군 30만 명을 살육한 팽성대전곤양대전과 더불어 세계사에서도 손꼽히는 대전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기록들은 고대의 사료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으나 춘추 필법#이라는 고대에 보기 드문 사실만을 쓰겠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뢰성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2]
이러한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거병 후, 고작 2년만에 중국을 제패하고 패왕으로 군림한다.''' 세계사를 통틀어도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 사마천은 황제의 일을 기록하는 본기(本紀)에 항우의 행적을 적었으며, 다른 모든 제후를 무릎 꿇리고, 홍문연에서 라이벌인 한고조를 그냥 죽일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의 반대급부로 군주로서의 능력은 바닥이었다. 그 결과, 온갖 실책을 반복한 끝에 한고조에게 판세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압도적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항우는 일생을 통틀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해하 전투 단 한 번뿐이었으며, 그나마도 3배가 훨씬 넘는 규모의 적을 상대로 처음에는 밀어붙이고 있었을 정도였으나 해하에서 패하고 몰락해 최후를 맞이했다.
여하간 그 포스가 너무나 강렬해 초한 쟁패기의 무수한 영웅호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임과 동시에, 후대에 여러 이야깃거리의 소재가 되었던 인물.[3] 그 높은 명성과 막강한 권력, 현재까지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강으로 평가받는 용맹함, 평생 동안 연인이 우미인 한 명밖에 없었다는 점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나이의 로망을 자극할 만한 면모가 있어서 후대 사람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다만, 후세에서는 저평가될만한 폭군적 요소들도 존재해 학자들로부터는 큰 비판을 받아왔고, 예외적으로 항우를 크게 비판했던 사마천은 과오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그를 본기에 넣으며 정통한 중국의 지배자였음을 인정했다.[4]
그의 이름은 항적이지만 자인 항우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조자룡, 제갈공명과 비슷한 케이스지만, 이름이 조운, 제갈량이란 건 대부분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이쪽은 대부분이 항우가 이름이 아니란 걸 모르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사례로 오운은 오자서로 대부분 알고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항우의 가문은 할아버지가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이었고, 그 집안인 항 씨는 항(項)[5]에 봉해져서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항우가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조국이 멸망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항우와 같이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 항량(項梁)[6](吳) 땅에서 상당한 명망을 가진 지방의 유지였고, 오나라 땅에서 유명한 사대부들은 모두 그 밑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맥이었으니 생활에 큰 부족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량은 이 조카를 위해 공부를 시켰는데, 항우는 글 공부를 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어 때려치웠다. 그러자 이후에는 을 다루는 검술을 가르쳤지만, 항우는 여기에서도 끝을 보지 못했다.[7] 이것도 안 한다, 저것도 안 한다고 하자 항량도 화가 나 항우를 꾸짖었지만, 항우는 이렇게 항변했다.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萬人)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항량은 조카가 큰 인물이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여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쳤는데, 이에 항우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대략 '''"이해했다"'''고 느끼자 또 지겨움을 느끼고 때려치웠다. 한마디로 이것 조금, 저것 조금씩만 하다가 뭐 하나 진득하게 끝까지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훗날 보여주는 전술을 넘어 전략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항우의 역량 부족은 이게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공부 자체를 시작조차 안했던 유방이 뛰어난 안목과 판단력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걸 보면 항우가 단순히 공부를 중간에 접었다는걸 항우의 실책의 원인으로 볼 수도 없다.
어느 날, 진시황(秦始皇)이 회계 땅으로 순수(巡狩)[8]를 하러 나와 절강(浙江)을 지날 때,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 항량도 항우를 데리고 나와 구경을 했다. 그때 구경하던 항우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9]

이 말을 들은 항량은 기겁하며 항우의 입을 틀어막고 "우리 다 목이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내심 속으로는 이 맹랑한 꼬마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항우는 나이가 자라면서 키가 8척을 넘었고[10] 힘도 장사라 큰 솥을 번쩍 들었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오 땅의 자제들은 모두 항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외에 특이사항으로는, 사마천(司馬遷)은 '''"내가 듣기로는 항우는 눈동자가 두 개'''인 중동자(重瞳子)였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과거의 " 임금도 눈동자가 두 개였다고 하는데, 혹시 항우는 순 임금의 후예가 아닐까?"라고 상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물론 그 다음에 '''(그렇게 잔인한 일을 했던 항우가) "어떻게 순 임금의 후예이겠는가?"'''라는 식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2.2. 은통을 죽이고 거병하다


항우가 장성했을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 영호해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한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으며, 진나라가 멸망시킨 전국시대 6국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었다.
진승과 오광이 거병한 지 두 달 정도 지난 9월, 회계 태수 은통(殷通)은 지방의 유력자였던 항량을 회유해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항량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오히려 항우를 시켜 은통을 죽여버리고 자신이 회계의 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항우의 공이 지대했는데, 항우는 은통의 목을 베었을 뿐 아니라 저항하는 군사들 백여 명을 베어 죽여 은통의 남은 세력을 굴복시킨다. 여기서 선즉제인(先則制人)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이후 항우는 비장(裨將)이 되어 아직 복종하지 않은 관하의 현(縣)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종시켰다.

2.3. 반(反) 진 전쟁


이후 소평(召平)[11]의 말을 들은 항량이 회계를 떠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수로서 종군했다. 항량의 여러 전쟁에 함께 참여했는데, 이 무렵의 독자적인 전투로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을 공격한 일이 있다. 그런데 외외로 항우는 이 전투에서 결사항전하는 양성 주민들 때문에 상당히 힘든 싸움을 했고, 그 분풀이로 양성이 함락되자 '''성 내 사람 5,000여 명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죽였다.''' 어찌 되었건 항우와 항량은 초나라를 부활시키고 초 회왕(楚懷王)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반란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명장 장한(章邯)이 이끄는 군대가 재건된 (魏)를 멸망시키고 (齊)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항량은 북상해서 장한과 교전을 벌여 승리했다. 그 직후 항우는 패공(沛公) 유방과 함께 별동대를 이끌게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였는데, 훗날 두 사람의 사이를 생각하면 꽤 흥미로운 일이다. 별동대는 이후 여러 성을 함락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정작 항량의 주력은 이후 장한이 심기일전하여 펼친 역습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심지어 항량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일단 퇴각했다.
잠시 초나라가 숨을 돌리며 패전의 충격을 극복하는 사이, 항량을 죽이고 북상한 장한 때문에 조나라(趙)는 최악의 형세에 몰렸고,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수밖에 없기에 여러 제후들도 구원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초 회왕은 항량의 죽음을 이용해 아첨한 송의(宋義)를[12] 상장군으로 임명한 후에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구원에 나서게 하였다.
그보다 앞서, 초 회왕은 "진나라의 중심지인 관중(關中)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엄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장수들은 관중으로 향하는걸 꺼리고 있었는데, 항우만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던 항량이 진나라 군대에 살해된 일에 격분하여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향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고 싶었던 항우가 조나라로 향한 것은 항우를 꺼린 여러 늙은 장수들 때문이었다. 초 회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항우는 얼마 전 양성에서 사람들을 잔인하게 파묻었으며, 진승이나 항량이 힘으로 진나라에 맞섰지만 오히려 패하고 죽었다면서 관대한 유방을 보내 적당히 다독이는 편이 낫다면서 유방을 추천했던 것. 그 때문에 서쪽으로 먼저 향하는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 되었다.
그러나 송의는 아들을 제나라로 보내 교섭하여 제를 회왕의 측근으로 끌어들이려는 공작만 할 뿐 거록의 장한에겐 관심도 없이 붙박이처럼 제자리에 머무르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항우가 항의하자 '그대가 작전에 대해 아시오? 상대가 지치면 그때 공격하면 될 일이오'라며 면박만 줄 뿐이었다. 말이야 그럴 듯했으나, 명백하게 진나라보다 허약한 조나라가 진나라의 힘을 빼주면 얼마나 빼줄지도 의문일 뿐더러 시기가 이미 겨울이라 병사들이 오들오들 떠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송의에게 불만이 폭발한 항우는 우선 병사들을 선동했다.

"모든 힘을 다해 진군을 협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이제는 세상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사졸들은 콩잎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을 정도로 군중에는 군량미마저 동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은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으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하수(河水)를 건너 조 땅의 식량을 먹이고 조군(趙軍)과 함께 힘을 합해 진군을 공격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들의 피로함을 엿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릇 강한 진나라가 새로 건국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 세가 아마도 조나라를 압도할 것이다."

"조나라는 결코 강한 진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음에도 어찌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얼마 전에 우리의 군사들이 진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좌불안석이 된 왕은 경내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 장군에게 내어주어 나라의 존망은 이 한 번의 출격에 달려 있음에도, 오늘까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그 사사로움만 구하고 있으니 송의라는 자는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신하가 아니다!"

그리고 새벽에 송의를 기습하여 살해하고, 송의가 모반하려 했으므로 초 회왕의 명령으로 참했다고 말했다. 장수들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본래 초나라항량이 일으킨 것이니 항우가 옳다고 말했다. 초 회왕에게 일방통보 형식으로 상장군직을 넘겨받은 항우는 탈취한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여 자신의 지휘 아래 조나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포, 포장군과 함께 왕리(王離)가 이끄는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전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등극한다.'''
이후 항우는 진나라의 주력군을 이끌던 장한항복시켜 사실상 진나라의 멸망을 결정지었고, 곧바로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2.4.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


그러나 이때 항우는 매우 치명적인 실책을 하게 되는데, 당시 20만에 이르는 진나라 군의 포로들이 함양에 빨리 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에 있는 신안(新安)에서 '''이들 모두를 생매장해 죽인 것이다.''' '모두'라는 건 과장이 아니라 '''실제 항우의 발언이다.'''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 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사기》 항우본기 中'''

대학살 이후 다시 서쪽으로 진군한 항우는 함곡관(函谷關)에서 잠시 막혔으나, 유방이 이미 진나라의 항복을 받고 수도 함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한다. 회왕의 약속대로면 중원의 알짜배기인 관중의 왕은 유방이 될 상황. 영포를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고 관중에 들어와 희수(戱水) 서쪽에 주둔했다. 조무상(曹無傷)의 이야기를 들은 항우는 4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이었으나, 항백(項伯)이 유방을 따르던 장량과 인연이 있어서 장량에게 갔다가 유방의 부탁으로 중재를 시도해 일단 싸움을 멈추고 유방과 회담을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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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연 문서 참조.
이 화담에서 범증(范增)은 유방을 암살할 심산이었으나 별 명분 없이 죽일 생각이 없었던 항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아예 묘사를 보면 다들 분위기를 파악한 상태라 심각한데 항우만 '장사로다!', '술을 내려라!', '돼지 다리도 드시오.' 같은 식으로 혼자 해맑게 군다.
결국 유방이 살아서 도망가자 분통이 터진 범증이 '''"어린애와 함께 거사를 도모할 수 없다! 이번 기회를 날려먹었으니, 이제 우린 유방한테 다 죽었다!"''' 라고 항우에게 크게 일갈했다. 그러나 의외로 항우는 이런 말을 듣고도 범증을 죽이거나 벌하지 않았다. 항우가 원래 자신의 최측근이나 혈육인 항씨 가문 사람들에게는 매우 관대했기 때문. 물론 이런 관대함보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코앞에서 놓쳐버린 숙적 유방이었다. 그리고 범증의 말대로 어린애 같은 항우의 방심은 끝내 파멸을 불러온다.
유방은 앞서 진왕의 항복을 받았음에도 함양을 약탈하지 않고 두었으며 진왕 자영의 안전도 보장했는데, 늦게서야 들어와 유방의 자리를 거의 뺏다시피 한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성 안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이미 항복했던 진왕 자영을 죽였으며, 진나라의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궁궐은 장장 3달에 걸쳐서 타올랐는데 그러는 동안 머물면서 어찌나 파괴하고 죽였는지, 유방이 북진한 해에는 그 풍요로웠던 관중 땅에 대기근이 돌아서 사람들이 서로 뜯어먹는 지경에 이르러 소하가 백성들을 파촉 땅으로 내몰아 먹을 것을 캐도록 해서 연명시켜야 했다. 항우가 관중을 버리다시피 한 이유 중 하나도 남은게 폐허 뿐이라서 살기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항우의 전략적 무능함을 옅볼 수 있는 사건.
이후 항우는 중원을 다스리기 좋은 입지인 관중에 남을 것을 충고하는 간의대부 한생의 반대도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관중을 버리고 팽성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가 막힌 그 한생이 항우를 일컬어 관을 쓴 원숭이 꼴이라고 조롱하자 그걸 듣고 그를 삶아서 죽였다. 후술하겠지만, 항우의 이 관중 포기는 신안대학살, 의제 시해와 더불어 항우가 초한전쟁에서 파멸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평가된다.

2.5. 서초패왕 항우


함양을 점령한 항우는 결국 잠깐이지만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사내가 되었고 이후 초 회왕을 왕에서 황제로 지위를 높여주고, 존호를 의제(義帝)로 올렸는데, 이는 회왕을 공경한다기보다는 '''자기가 초나라 왕이 되고 싶어서''' 행한 조치였다. 항우는 노골적으로 '''"의제는 아무런 공도 세운 게 없고, 진나라 멸망은 나와 장수들이 다 한 일"'''이라고 발언하며 여러 제후들을 각지에 분봉했으며, 자신은 서초(西楚)란 땅을 가지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삼아서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칭하게 되었다. 의제는 당시 매우 저개발 깡촌 중의 깡촌인 남쪽 저 멀리 장사(長沙)의 침현(郴縣)[13]으로 옮겨가게 하여 대놓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였고, 의제의 주변에서 서서히 사람들을 치워나갔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낭중(郎中)의 벼슬을 하고 있던 한신도 초나라군에 있었다. 한신은 이미 그때부터 항우에게 몇 차례 제안을 올렸지만 항우는 한신을 우습게 보고 이 제안들을 철저하게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한신은 유방의 진영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한신을 얻은 유방이 그해의 여름도 되기 전에 파촉의 험지를 넘어 삼진을 뚫고 장안을 탈환했다. 이에 항우는 일단 정창(鄭昌)을 한왕(漢王)으로 삼아 유방을 막게 했으나, 그와 동시에 제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6. 초한전쟁



2.6.1. 제나라 공격


항우의 분봉 조치는 모든 제후들의 요구 조건을 맞춰 주지 못했고, 특히 제나라의 전영(田榮)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전담 일족이 재건한 제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건국 과정에서 진승의 장초나 항량의 초의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다. 전담이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했을 때 항량이 자신을 도와줘 목숨을 건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실권을 잡을 수 있긴 했는데, 이후 전영에게 반대한 세력의 망명을 항량이 받아줘 전영과 항씨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제나라는 항량을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적어도 항우의 입장에서는 숙부 항량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기여했고, 항량이 죽은 후엔 사신을 통해 회왕에게 송의를 칭찬하며 항우가 한번 실권을 빼앗기는 상황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전영이 항우에게 불만이 있는 것만큼이나 항우 역시 전영에게 불만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 제나라 내부의 사정상, 항우가 제나라를 전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전담 일족의 제나라 재건은 완전하지 못했고, 제북군 일대에는 마지막 제나라 왕 전건의 손자 전안이 독자적인 세력을 일구고 있었다. 항우의 동맹군 중에는 전도(田都)라는 제나라 장수가 이끄는 제나라군이 있었는데, 앞서 말했듯 항씨를 싫어하는 전영은 항우에게 군대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으나 전도는 전영에게 반기를 들고 조나라 구원에 나섰다. 전안과 전도는 이후 항우를 위해 공적을 세웠다. 전담이 죽었을 때 제나라에서는 전건의 아우 전가를 왕으로 세웠으나 전영이 전가를 내쫓았는데, 전가는 항량에게 망명해 초나라 신세를 지고 있었다.
즉 항우와 전영의 사이도 나쁜 데다, 전영에 반대하는 제나라 세력은 항우의 산하에서 항우를 위해 싸웠고, 이제는 그 콩고물을 받아먹을 때가 됐다고 여겼다. 항우는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삼고 전영이 세운 허수아비 왕 전불에게는 제나라에서 교동 나라를 쪼개어 주었다. 전안은 제북왕이 됐다.
그러나 전담 일족의 세력은 역시 제나라 최강이었다. 전영은 전도의 입국을 저지해 초나라로 내쫓았고, 전영에게 추대되었지만 겁을 먹은 전불은 도망치다 이를 눈치챈 전영에게 잡혀 즉묵(卽墨)에서 살해당했다.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된 전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해서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까지 살해하여 삼제(三齊)를 망라한 세력이 되었다.
여기서 멈추지도 않고 팽월(彭越)을 회유하여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를 흔들게 만들고,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진여(陳餘)[14]에게 군사를 주어 장이를 날려버리는 등, '''항우가 세운 천하를 죄다 흔들어버리는''' 수준의 분탕질을 해내기에 이른다.
항우는 소공각(蕭公角)을 파견해서 팽월을 상대하게 했으나 그는 팽월에게 격파당하고, 이후 "유방이 그저 관중을 먹으려 할 뿐이지, 더 욕심은 없다"는 장량의 기만책에 속아 유방을 내버려두고 전영을 먼저 제압하기 위해 북진했다. 이때 항우는 영포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영포는 병을 핑계로 수천 명의 병사만 부하 장수에게 딸려 보내는 적당한 시늉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의제가 전씨 혹은 유방에게 내응할 것이 우려되었는지 기어코 사람을 시켜[15] 장강 한가운데서 '''죽이고 만다'''. 이젠 뭐 명분상의 군신 관계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제나라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항우는 성양(城陽)에서 벌어진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전영을 완전히 박살내고 전영은 도망치다 평원(平原)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죽었다.''' 이렇게 해서 전영 자체는 순식간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잠깐 동안은 장량의 말대로 행동하는 척 하던 '''유방이 항우가 제나라로 비교적 깊숙히 들어간 틈을 노려서 봄이 되자 동진을 개시한 것이다.''' 항타와 용저 등이 저지하려 했으나 격파당하고 사로잡히거나 도주하는 등 한나라와의 국경선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방이 미친 듯이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을 때 항우는 '제나라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기 위해서' 난데없이 북진을 계속하며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항복한 전영의 군사들은 생매장을 하는 한편, 힘 없는 여자들이나 늙은이들을 밧줄로 묶어 포로로 삼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의 행진은 북해(北海)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행진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마을들은 '''초나라군의 진격 루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몰살되었다.''' 항우가 이토록 엄청난 짓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항량의 죽음을 제나라의 탓이라 여겨 저지른 앙갚음이었거나, 혹은 민초들의 공포심을 부추겨 더 이상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에서 벌인 일이라면 항우의 행동은 완전한 실책이었다.
항우의 이런 충격과 공포 수준의 만행을 목격한 제나라 사람들은 겁을 먹고 버로우를 타기는커녕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모여서 반기를 들며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죽은 전영의 동생인 전횡(田橫)은 여기에 도망친 제나라 군사 수만 명을 수습해서 성양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항우는 성양을 깨기 위해 수 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워낙 저항이 완강하여 도저히 함락이 되질 않았다.

2.6.2. 팽성대전


그 무렵, 삼진을 완전 평정한 유방은 관중을 지배 영역으로 확고하게 다지고 다섯 제후들을 모아 '''5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세로 동진을 시작했다. 중간에 가로막는 제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고, 제후 연합군은 별다른 문제도 없이 제나라 공격을 나가서 텅텅 비워진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을 장악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의 결사항전에 발이 묶여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정예 3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야간에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밞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북쪽으로의 기습만 대비하고, 그외는 군기 빠진 채로 대비가 되지 않은 한나라 연합군은 무참히 살육당했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초나라군이 압승해버렸다.''' 이 귀신에 홀린 듯한 결과에 공포에 질린 연합군은 장수고 병사고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이 아예 수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해서 피해가 더욱 컸다. 수수는 한군의 시체 때문에 물이 흐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항우는 이 싸움에서 유방을 완전히 끝장내는데 실패했다. 유방을 사로잡을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으나 한 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또 한 번은 정공(丁公)이 유방을 보내주어 놓치고 만 것이다. 이후 유방은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의 군세와 합류해서 전력을 추스리고 형양(滎陽)으로 이동했고, 때마침 소하가 미친 듯이 보급을 해주어 한숨을 넘기게 되었다. 초군은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후방에 도착한 한신이 이끄는 한군[16]에게 패배해 추격을 멈추어야 했다. 그 뒤로도 한군의 보급로를 심심찮게 약탈하긴 했으나, 팽성의 코앞에 있는 구강의 왕이었던 영포가 수하의 말빨에 넘어가서 항우에게 칼을 들이미는 바람에 이쪽이 정리될 때까지 항우는 꼼짝없이 초나라 본진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유방은 후방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 형양에 방어선을 탄탄하게 굳혔다. 이렇게 기회를 놓친 대가로 항우는 제나라 때와도 비교도 안되는 늪에 빠지고 만다.
결국 이 싸움이 항우의 엄청난 대승이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항우는 '팽성의 수복' 외에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하지는 못했다. 유방을 죽이거나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고, 한군은 형양을 기점으로 계속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고, 후방에 관중과 파촉이라는 확고한 근거지가 있어 그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 결정적으로 항우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에 대해서는 승산이 없지만, 그가 없는 초나라 병력을 상대로는 승산이 있어서 양동작전, 게릴라 등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발휘될 여지를 제공했다.
또한, 항우가 남쪽으로 돌아간 틈을 타 전횡은 초나라의 세력을 제나라 땅에서 대부분 몰아내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왕으로 추대하여 다시 한 번 제나라를 부활시켰다. 즉 '''제나라에서 벌인 그동안의 싸움이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던 것.''' 다만 이 싸움의 결과로 한군에 붙었던 여러 제후들을 다시 초나라의 세력으로 끌어올 수는 있었다. 사실, 제나라가 항우 군에 대하여 워낙 결사항전으로 나왔기 때문에 설사 제나라를 점령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제나라는 다시 부활했을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결사항전한 이유야 당연히 항복하나, 항전하나 결과적으로 죽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2.6.3. 형양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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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유방은 형양을 중심으로 항우에 저항했고, 양 군은 주로 경(京)에서 교전을 벌였다. 팽성대전 이후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숴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앞서 언급되었듯 영포의 배신과 경색 전투의 패배 등으로 초군의 진격은 한동안 지지부진해졌고, 겨울 즈음이 되어서 영포용저에게 패배해 도주하자 마침내 항우가 스스로 나섰지만 그전까지를 생각하면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다시 반년이 흐르면서 한군은 거의 1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자 농성은 한계에 봉착했고 기원전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항우는 처음엔 솔깃했지만 범증(范增)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항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에 진평(陳平)은 항우의 고질적 문제였던 인색한 포상을 이용, 그간 그렇게 공을 세웠는데도 왕 자리는커녕 봉토 한 줌도 주지 않는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종리매, 계포, 용저, 범증 등이 유방과 내통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휘하 제장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항우가 이들에게 뒤늦게라도 포상을 베풀어 다독이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해하고 눈총을 주며 분위기가 무거워지던 중, 한군 진영에서는 초나라의 사자가 오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는 뒤늦게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주었다. 그런데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갑자기 형양성 공격에 소극적으로 변한 항우의 태도에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항우한테 실망하고 분노한 범증은 사임하며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범증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다고 당장 형양을 포위한 초나라 군사들과 항우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에 진평은 2천여 명의 여자들을 갑옷을 입혀 병사로 위장한 뒤,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고, 기신(紀信)이 스스로 유방 행세를 하여 성 밖으로 나가 초군에 항복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유방은 그곳을 탈출했다.
속임수에 당한 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주가가 죽어라 버티는 형양을 일단 내버려두고 성고를 함락시킨 항우는 완읍에 주둔한 유방을 쫓아갔지만, 유방은 버티며 방어만 할 뿐이었다. 항우가 유방에게 붙잡혀 시간을 날리는 사이, 슬금슬금 초나라 지역으로 숨어들어간 팽월은 초나라의 동아(東阿)[17]를 공격해서 초나라의 장수 설공(薛公)을 죽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급기야 수도인 팽성에까지 들이닥칠 기세로 움직였다. 이런 상황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항우가 팽월을 잡으러 떠나자마자 유방은 재빨리 나와 성고를 탈환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팽월을 격파한 항우가 다시 형양으로 돌아와 주가(周苛), 종공(樅公), 한왕 신이 지키는[18] 형양을 함락시켰다. 항우는 주가를 회유해보고자 했으나, 주가가 황당해 하며 "너 따위는 우리 한왕의 상대가 안 된다. 지금이라도 당장 항복하면 포로 신세는 면할 것이다!"라며 조롱하자 분노하여 주가를 팽형으로 죽이고 종공도 같이 죽였다. 한왕 신은 거짓으로 항복했다가 나중에 한군으로 탈출했다.[19]
유방은 성고가 함락되기 전에 하후영과 함께 도망쳐 한신의 군영으로 이동하여, 한신이 잠자는 사이 강탈한 군대로 다시 항우를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사이 성고는 이미 함락되었고, 마침내 항우에게 거칠 것 없이 서쪽으로만 진격하면 지긋지긋한 유방과 한나라를 끝장낼 기회가 눈 앞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이 시점에 미쳐 날뛰는 팽월의 활약으로 항우는 절호의 기회를 잃고 만다. 유방이 항우와의 결전을 포기하는 대신 초나라 후방으로 잠입시킨 유가, 노관의 군대와 합류한 팽월은 작정하고 초나라 군대를 박살내며 무려 성 17개를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는데, 팽월이 입히는 피해가 워낙 막대하다 보니 항우는 하필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기는 상황에서 팽월을 막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 항우가 대사마 조구에게 가만히 성만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으나, 당초엔 공성(鞏城)[20]에서 항우의 서진을 저지하려 했던 유방에게 역이기가 "먹을 것이야말로 하늘 위의 하늘인데, 항우는 어리석게도 성고에는 고작 죄수부대를 두어 가로막으며 광무산을 굳게 지키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이며, 승패를 가르지 못하고 마냥 전쟁이 길어지면 백성들도 지쳐버려 당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다."라고 간언했고, 유방이 이를 받아들여 수비가 아닌 공격을 선택, 조구를 욕설로 꼬여내어 쳐부순 뒤 성고를 다시 수복했고, 곧 형양으로 돌진해 종리매를 쫓아낸 후 광무(廣武)(지금의 하남성 형양시 동북의 광무산(廣武山) 또한 탈환한 뒤 그곳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재차 손에 넣었다. 성고를 탈환하긴 했지만 이제까지의 험난했던 전투로 인해 성벽이 많이 훼손돼서 방어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오창을 지킬 수 있고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광무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기껏 잡은 승기가 멀어지는 사이 팽월을 잡으러 간 항우는 동쪽으로 나아가 진류(陳留)와 외황(外黃)을 공격했지만 외황은 생각보다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을 틈타 팽월이 도망치자 외황 사람들은 성문을 열고 항복했는데, 항우는 이들이 자신을 기만한다고 여겨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 안의 장정들을 모조리 생매장해서 죽이려고 했다. 그때 13살 남자아이가 항우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팽월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여 외황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그럴 법도 하다고 하여 죽이지 않고 그냥 항복을 받아들였는데, 이전에 사람들을 죽일 때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던 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줄줄이 항복해 왔다'''. 그러나 항우가 교훈을 얻기에는 일이 너무 늦어버렸다. 항우가 이러는 사이 유방이 조구를 죽였다는 소식이 들어갔고,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귀환했다.

2.6.4. 광무 대치


팽월을 물리친 항우는 다시 돌아와 형양 동쪽에서 포위당해있던 종리매을 구원하고 수 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산 위에 틀어박힌 유방을 물리치기도 곤란했고,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식의 인질극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 급 제안에 "우리가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네놈 아비의 국물을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라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했다. 이에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천하가 혼란한 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 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항우와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써 싸우려고 한다"고 무시했다. 이러자 항우는 장수 하나를 내보내서 시비를 걸었는데, 잠시 동안은 못본 체 하는 것처럼 굴던 한군은 그 장수가 세번째로 나왔을 때 다짜고짜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을 내보내서 초나라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 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판했다.

"하나, 팽성에서의 약속을 위반했다. 당초에 초 회왕과 제후들이 먼저 관중에 입성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이러한 제후들과 회왕의 맹약을 묵살하고 최초로 관중에 진입한 자신을 협박하여 파촉으로 쫓아버렸다."

"둘, 주군인 초 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써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 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례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 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 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 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 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아홉, 의로써 우리 모두가 초 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 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한낱 도적놈을 토벌하려는 것뿐이니, '''너 따위는 내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죄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으로도 충분하다!'''"

더 이상 참지 못한 항우는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쏴서 유방을 맞혀 버렸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이를 참으며 또 다시 한 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히네!"라고 능청을 떨면서 달아났다. 당연히 쇠뇌에 가슴을 맞았으니[21] 유방의 부상이 가볍지는 않았지만 허세를 부려서 무마한 것. 이 때가 항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막무가내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항우는 어떻게든 기책으로 난국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항우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2.6.5. 몰락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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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바로 '''한신의 북벌이 거의 완수 직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유방이 항우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이 한신은 위, 대, 조, 연나라를 모두 평정하고 이제 제나라마저 평정 직전에 있었다.
그나마 항우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오긴 했다. 그건 바로 역이기가 제나라를 언변으로 복속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한신이 괴철의 꼬드김에 넘어가 동맹 성사 직전 제나라를 공격 한 덕에, 뒤통수를 맞은 제나라 잔존 세력이 크게 분노하여 역이기를 죽이고 원수 항우와 손을 잡는 강수를 택한 것. 이에 응한 항우는 용저(龍且)에게 20만이라는 대군을 주어 제, 초 연합군을 결성해 대항하게 하였다. 항우가 직접 가면 좋았겠지만, 결국 직접 가지는 못 했다. 다만 고작 보름 정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방에게 조구가 패배해 모든 게 틀어졌으니 같은 행동을 하기가 불안했을 수도 있다. 소설 같은 매체의 영향으로 유방의 군사적 능력이 폄하되는 편이지만, 유방은 결코 군사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항우와의 싸움을 제하면 유방은 자신이 나선 거의 대부분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지휘관이다. 한신이 북벌할 동안 직접 항우를 상대로 계속 판을 이끌어나갔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항우도 직접 가지만 않았을 뿐이지 20만이라는 대군을 보낸 데다가 자신이 신임하는 용저를 보냈고 그와 더불어 부관으로 주란이 함께 있었고 제왕 전광과 더불어서 전광이 모아온 제나라의 남은 병력까지 합해져 있었던 만큼 한군에 비해 결코 불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신은 오히려 유수 전투에서 용저가 이끄는 제, 초 연합군을 격파하고 용저를 참살하였다. 이로써 화북의 대부분이 한신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한신은 사실상 항우, 유방과 맞먹는 거대한 세력권을 가지게 되었다.
용저의 대패로 인해 항우는 결과적으로 초한전쟁의 패배자가 된다. 유수 전투를 단지 한신용저만의 전쟁이라기에는 병력 규모도, 양쪽이 얻은 이득도 피해도 어마어마한 셈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유수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신을 막았더라면 유방의 통일은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중요한 전투였지만, 용저가 대패를 당했기 때문에 대세는 이미 유방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항우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수하의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설득하게 했지만, 한신은 "항우 그 자가 날 어떻게 대접했나? 유방은 밥 주고 옷 주고 장군 시켜주고 다 해줬는데 이제 와서 날 찬밥 취급한 항우의 편을 하라?"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며 거절해 버렸다. 한편 팽월은 이 와중에 또 튀어나와 양나라 쪽을 공격해 항우의 보급로를 끊어 놓았다.
이후 반년 정도 대치를 지속했지만 항우에겐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여력이 없었다. 한동안 가왕 신청 등으로 늑장을 부리던 한신도 202년 8월 즈음에는 초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6.6. 사면초가패왕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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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는 유방의 세력이 건재하고, 북방은 한신이 모조리 평정해 버린 상황. 게다가 영포 역시 유방의 편을 들고 있고 후방에서는 팽월이 계속해서 날뛰고 있었다. 이렇다 할 패전도 없이 항우는 최악의 형세에 놓이고 말았는데, 한군은 오창의 보급을 통해 군량이 풍부한 반면 초군은 지독한 팽월의 후방 교란 때문에 보급도 충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 즈음에는 근흡이 성고 부근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당장 코앞에서 형양부터 양읍에 이르는 보급로가 차단당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이때 유방은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형양 포위 때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던 항우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선 결국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승낙했고, 사로잡았던 태공여후를 보내주었다. 협약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 이 말을 듣고 수긍한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였지만, 오히려 고릉(固陵)(하남성 태강현(太康縣) 남쪽)에서 항우의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침내 성 밖으로 나온 유방에게 또 미련을 가진 사이 관영에게 팽성이 함락당하는 바람에 퇴로가 끊어져버렸다.[22] 게다가 관영은 지체없이 진성으로 향해 대치중인 항우의 후미를 쳤으며, 유방 또한 합공을 가하자 항우는 이번에도 소득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되고 만다.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마지막 해하 전투에서 항우는 패배하였고, 산 위로 도주하여 농성하려 했다. 그러자 한군은 초나라 군을 포위하고는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렀다. 패배에 상심해 있던 항우는 이 노랫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워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항우조차 이럴 지경이니, 대부분의 병사들과 심지어 항백, 종리매, 계포 등의 최측근에 이르기까지 더는 가망이 없다 여기고 한밤을 틈타 탈영해 버리고 만다. 마음이 복잡해진 항우는 우미인과 남아있던 신하들과 함께 밤중에 술을 마시면서 슬픔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力拔山兮氣蓋世(역 발 산 혜 기 개 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時不利兮骓不逝(시 불 리 혜 추 불 서 하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骓不逝兮可奈何(추 불 서 혜 가 나 하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우 혜 우 혜 내 약 하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항우, 〈해하가(垓下歌)〉

항우가 노래를 부르자, 우희(虞姬)도 답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漢兵已略地(한 병 이 략 지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았으매

四面楚歌聲(사 면 초 가 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大王義氣盡(대 왕 의 기 진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賤妾何聊生(천 첩 하 료 생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우희, 〈해하가〉

결국 그 패왕 항우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항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 정사에는 이후 우미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초한지에서는 우미인 자신이 항우의 걸림돌이 된다며 이 직후 자결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워낙 극적인 장면이라서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각색된 경극장국영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 패왕별희다.

2.6.7. 영웅, 오강에 지다


항우는 그날 밤으로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를 수 있는 병사 800여 명을 이끌고 한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날이 밝은 뒤에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방은 관영(灌嬰)을 시켜 5천여 기병으로 항우를 추격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남은 수하가 겨우 100여 명밖에 없었다. 이윽고 항우는 음릉(陰陵)(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서북)에 이르렀는데, 길을 잃어버린 항우는 밭을 가는 노인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일부러 길을 속여 왼쪽이라고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이것은 민심이 항우를 이미 떠났다는 복선이었다. 사기열전에선 이 대목에서 '왼쪽'(左左)을 두 번 강조하여 민심의 이반, 전란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 등을 이 두 글자 안에 함축시켰고,[23] 후일 문인들에게 이 대목은 그야말로 극찬을 받았다. 항우는 결국 늪지대로 접어들어 한군의 추격군과 조우하고 말았다. 항우는 100여 명으로 5000군의 포위를 뚫는 괴력을 발휘하며 천신만고 끝에 동쪽으로 길을 뚫어 동성(東城)에 이를 무렵에는 수하의 병사가 고작 28명에 이를 뿐이었다. 그리고 한군의 추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추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 항우는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고 있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다음부터의 기록은 사서치고는 묘사가 풍부한 사기에서도 거의 소설 수준으로 묘사가 살아있는 부분이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 없이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그리고는 남은 기병들을 4방향으로 달려나가게 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한나라 장수의 목을 베겠다!"

이윽고 항우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고, 그 모습을 본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엎드려 버렸다.''' 결국 항우는 한나라 장수 한 명의 목을 베었는데, 마침 항우를 추격하던 적천후(赤泉侯) 양희(楊喜)는 항우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질책하자 양희와 양희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서 몇 리를 달아나 버렸다.'''
항우와 그 기병들이 다시 모일 무렵, 또 다시 한군은 포위하여 왔다. 그러자 항우는 말을 달려 한나라 도위 한 명을 죽이고 수십에서 백여 명에 이르는 병사들을 죽이고는 기병들을 다시 모으니, 두 명만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항우는 기병들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병사들은 모두 엎드려서 말했다.

'''"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항우는 계속 도망쳐서 오강(烏江)에 이르렀는데, 오강의 정장(亭長)(진나라 때 가장 적은 지방 행정 단위로, 매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 관리를 정장이라고 했다. 유방도 본래 정장 출신이었다)은 배를 타고 기다리다가 항우에게 말했다.

"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 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항우는 거부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24]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오추마를 정장에게 주었다.

"나는 그대가 장자(長者)임을 알겠다. 나는 이 말을 5년 동안 타고 다니면서 이르는 곳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었다. 내가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에게 이 말을 맡기겠다."

초한지 등 설화에서는 오추마가 배 위에서 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나온다. 또한, 마지막까지 따르던 26명의 장병들은 끝까지 항우와 함께하려 했으나, 항우가 강제로 배에 태워서 도망치게 했다고 묘사한다. 문정후의 영웅 초한지에선 이 병사들을 항우의 거병부터 최후까지 수없이 많은 악전고투를 뚫고 바로 전날까지도 있었던 수많은 탈영의 기회를 전부 마다하고 버텨낸 강력한 전사들로 묘사했다. 그 외에 다른 초한지의 판본에서도 이 장병들을 위에 언급한 강동의 자제 8천 명 중 마지막까지 생존한 정예 부대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항우를 섬긴 측근들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항우가 강제로 도망치게 할 때도 "주군의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당장 배에 올라타라"라고 말하고, 장병들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끝까지 명령을 따른다는 극적 묘사를 추가하기도 한다. 다만, 실제 역사 기록에는 항우의 명령으로 말에서 내린 뒤 짧은 무기만 들고 항우와 함께 한나라 추격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고 나온다.
사기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항우는 말에서 내린 후, 한나라 추격군과 정말 최후의 싸움을 벌였는데, '''항우 혼자만 수백여 명의 한군을 죽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추격군은 관영이 이끄는 5000명의 기병 부대였다는 것이다. 즉, 말도 없이 단신으로 기병 수백을 썰어버렸다는 말이다. 관영은 유방의 장수들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맹장이고, 5천 기병은 유방이 직접 엄선한 정예 기병대일 것이다. 즉, 항우를 완전히 끝장내는 마무리 카드로 투입된 병력을 상대로 저런 저력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항우도 몸에 열 군데가 넘는 상처를 입었는데, 항우는 문득 여마동(呂馬童)을 발견하고 "너는 내 부하였던 녀석이 아니냐?"고 물었다. 여마동은 차마 대꾸하기가 겸연쩍었는지 옆에 있던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항우가 맞다"며 딴청을 부렸고, 항우는 그런 여마동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

그리고는 '''천하를 호령했던 패왕 항우는 자결하여 그 파란만장한 최후를 끝마쳤다.''' 천하무적의 항우가 이렇게 죽자 왕예는 그 목을 베어 가졌고, 뒤이어 수십여 명의 기병들이 서로 항우의 몸을 밟는 난리통 끝에 자기들끼리도 죽이면서 항우의 시신을 마구 토막내었고 결국 양희, 여승, 양무, 여마동이 남은 조각들을 하나씩 취하고 상을 받았다. 이후 그 시신을 한 번 조립해서 맞춰 보자 딱 맞아떨어졌으므로 5명은 모두 책봉되어 열후가 되었다. 고조공신후자연표을 보자면 고조 공신 열후 143인 중 양무가 서열 94위, 여마동이 서열 101위, 항우의 머리를 가져간 왕예가 서열 102위, 양희가 서열 103위, 여승이 서열 104위가 되었다.
수많은 전선을 휘저으며 얻은 상처와 훈지를 뒤로 하고 이제 천하의 주인은 유방이 되었다. 둘의 악연을 생각하면 본래는 무덤 같은 걸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겠지만, 항우의 나라인 초나라 땅은 다 항복하는데 정작 한때 봉토였을 뿐인 노현 땅의 사람들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하려 하자 마음이 약해졌는지 항우의 목을 보여준 뒤 항복하는 것을 조건으로 항우를 노공(魯公)으로 봉하고 곡성에 안장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일 이후 항우의 장례식에서 울다가 돌아가기도 한 유방은 남아있는 항씨 일족과 투항한 초나라 인물들은 노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름 관대하게 대우한 대신 항우 본인의 경우엔 이름을 막 부르며 왕 취급도 못하게 하는 유치한 형태로 복수를 했다.
허나, 후대에는 사마천에 의해서 본기에 기록되고, 한고조의 라이벌인 패왕이라는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왕의 대우는 충분히 받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2.6.7.1. 역사적 사실인가?

항우의 이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설화인 게 아닐까? 하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야사가 아니라 사기와 자치통감이라는 정식 역사서에 분명하게 나오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정작 사기에서는 그 다음에 항우가 '동성에서 죽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성에 도착한 이후 오강으로 갔다는 기록과 모순이 된다. 또한 동성에서 28기만이 남아있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사기 관영전에서는 동성, 역양에서 초나라 장병 1만2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링크 항우본기의 내용상으로는 항우를 비롯해 오강까지 도주한 당사자들이 그 과정에서 모두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끼리 나눈 대화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도 약간은 미심쩍다.
사실 위의 링크에 달린 많은 질문에 무리수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동성에서 28기만이 남아있었다는 구절은 지휘 체계의 붕괴로 얘기해도 들어맞는다. 12,000명의 지휘 체계가 유지되었다면 관영의 5,000철기는 되레 잡아먹힐 뿐이다. 동성, 역양 인근에서 12,000명의 지휘 체계가 무너진 패잔병을 잡았다고 봐야 한다. 28기 이후 바로 오강으로 날아가며 구성이 듬성해지는 것은 여기까지 28기에서 사로잡은 인원의 진술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이후 항우 이외의 인원의 이탈과 죽음 등으로 쓸 만한 기록이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링크에서 설명하는, 몇 가지 무시하기 어려운 근거들이 있다.
  • 위에도 언급된 대로 사기의 항우에 대한 총평에서는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에서 죽었다"고 기술한다. 또한 사기의 고조 본기에서도 관영을 보내어 항우를 동성에서 추살했다고 기술한다.
  • 한서의 고제기와 관영전에서도 관영이 장졸 5명과 함께 항우를 동성에서 참했다고 서술한다.
  • 한서 고후문공신표제에서 5명의 공적이 항우를 참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체를 얻었다는 것과는 명백히 다르다.
물론 항우가 오강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도 사기에 기록된 정사인 것은 분명하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서로 상반되는 기록들이라도 어찌저찌 아귀를 맞추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 가지 예시를 들자면, 항우를 잡는 책임자 관영이 항우를 놓치고 오강까지 도망가게 만든 잘못을 추궁당할까 봐 유방에게 항우를 동성에서 죽였다고 허위보고를 했고, 유방도 이미 항우가 죽은 이상 관영의 잘못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관영의 보고를 그대로 기록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다만 진실을 아는 오강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기들끼리만 간직하고 있었고, 이것이 사마천의 귀에 들어가 기록되었다고 보면 된다. 즉 공식적으로는 항우는 동성에서 죽었고 실제로는 오강에서 죽었으며, 사마천으로서는 어차피 죽은 이상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판단해서 양자 모두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의 이야기.

3. 평가


"항적과 같은 이는 이를 가질 수 없었다. 범증을 얻고도 쓸 수 없었고, 진평을 얻고도 쓸 수 없었고, 한신을 얻고도 쓸 수 없어, 모두 원망하여 엎어져서 버리고 떠나게 했고, 단지 필부의 하찮은 용기로, 도전하는 중에 자웅을 가리고자 해, 힘과 세력이 곤궁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장차 달려나가 한의 장수 한 두 명을 죽여, 사지에 할 힘이 있음을 보였으니, 이것이 초가 천하를 잃은 까닭이다. 그런즉 항적이 망할 때, 또한 어찌 천하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범준(范浚)의 향계집(香溪集)'''

항우는 한때 천하의 주인이었으며, 그 위세는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항우를 크게 비판했던 사마천조차 항우를 본기에 등재시키며 항우가 중국의 지배자였다는 점만은 확고히 했다. 하지만 최후엔 결국 패배했는데, 이는 사실상 '''자업자득'''에 가까웠다. 결국, 역사적으로 패배자가 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체 왜 졌는가?"를 따져보는 작업이 될 텐데, '''항우에게는 패배할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3.1. 군사적 능력


'''초(楚)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이미 진(秦)의 군사를 깨뜨리고 항우(項羽)는 제후들의 장수들을 불러 보았는데,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 제후들의 장수들 중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감히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항우의 지휘 능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목.

'''패왕(覇王)'''

항우에게서 유래된 패왕(覇王)은 역발산기개세와 더불어 항우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현대에 이르면서 패왕이라는 칭호는 '너무나 강하여 적수가 없는 최강의 인물'에게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 패(覇)라는 칭호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항우다.[25]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쓰는 패왕(覇王)이라는 언어의 시초가 바로 항우인 것. 패왕(覇王)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패자의 칭호임에도 불구하고, 2200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최강을 상징하는 칭호로써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항우가 그 당시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근, 현대전과는 다르게 항우가 활약하던 시대의 전투에서는 군을 지휘하는 장군의 용맹이 군 전체의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화기 등의 발명이 아예 없었던 완전한 냉병기의 시대였기에, 군을 이끄는 지휘관의 역량이 전투의 승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가우가멜라 전투, 거록대전 등. 이런 시절에 압도적인 수적, 전술적, 전략적 불리함 속에서도 거록대전, 팽성대전, 고릉 전투처럼 오히려 상대방을 항상 궤멸시켜 버렸던 ''''패왕''''이 바로 항우다. 오죽하면 한나라 군사들은 항우가 온다는 소식만 들어도 다 이긴 전투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일례로 거록대전, 전영을 물리친 전투, 팽성대전, 고릉 전투, 심지어 마지막 해하 전투조차도 측면 부대가 움직이기 전까지 항우는 한군을 몰아붙였다. 전술적 영역에서 그는 '''최고이자, 최강의 지휘관중 한 명'''이었으며, 그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으로 거병 후 고작 2년만에 진의 멸망을 확정지으며 유방을 포함한 모든 제후들을 무릎 꿇리고 중국의 패자로 군림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이토록 단기간에 항우만큼 무지막지한 전공을 쌓아올린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마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견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항우 개인의 무력과 카리스마는 중국사를 통틀어도 최강으로 여겨질 정도다.''' 역사서인 사기에는 항우가 엄청난 패기와 카리스마로 군중을 제압하고 병권을 가져가거나, 항우의 패기에 제후들이 서로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며,[26]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만인지적이었고, 과거나 지금이나 항우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 세가지가 ''''패왕', '역발산기개세', '만인지적'이다.''' 해하 전투에서는 실제로 항우가 큰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니, 모든 적군들이 놀라서 엎드리며 길을 터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더군다나 이 때의 상대가 평범한 보병들이었던 것도 아니고, 고작 항우와 그 부하 28기를 잡기 위해 출전한 용장 관영과 정예 5천 기병 및 다수의 장수들을 상대로 이루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압도적이다. 항우가 꾸짖으니 적의 장수와 말이 놀라서 몇 km를 달아났다.
더군다나 오강에 이르러서 말에 타지도 않고, 항우를 추격하던 5천 기병 부대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고 나오는데, 항우 혼자서 무려 수백명의 기병을 죽여버렸다고 나온다. 전술, 전략적 판단과 군사 지휘력 및 통솔 능력 또한 고대사 최고라 평가받을 정도인데,[27] 아무리 초한전쟁 당시에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이 다수였다고는 하나, 이는 항우의 초군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항우의 지휘력과 통솔력이 빛을 발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병력의 질은 서로 비슷한데, 항우가 지휘하는 군대는 일당십에 패기가 하늘을 찌르는 군사가 되어 있고,[28] 상대쪽은 반대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간다면 그것은 항우의 전투 지휘 능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방증이 된다. 특히 고작 3만의 군사로 60만 대군과 정면에서 맞붙어서 초토화 시키고 별다른 피해 없이, 적군 30만 명을 살육하는 경우는 곤양대전[29]과 함께 중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도 손꼽히는 대전으로 인정받는다. 또한 이는 훗날 항우의 괴력과 군사적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가 된다.
또한 무력과 통솔력 및 카리스마에 묻혀서 조명이 잘 안 되는 사실인데, 항우는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영역의 전술적 능력 또한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록 대전에서 적의 보급을 끊거나 한신보다도 먼저 병법에서 배수의 원리를 응용하는 등,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다른 장수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애초에 항우가 힘에만 의존했다면 유방, 장한, 한신, 팽월 같은 당대 최고의 명장들을 상대로 붙을 때마다 개박살을 내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저돌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전략적 후퇴 판단 역시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다. 수도 팽성이 점령당하자 지체 없이 원정군에서 정예만 추려서 구원군을 편성하고, 후방에서 편성한 전력을 거의 손실하지 않고 팽성으로 왔다는 사실만으로 항우의 전술적 능력 및 판단력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특이한 것은 곽거병과 함께 중국사에 흔치 않은 기동전 스타일의 지휘관인데,[30] 팽성대전에서 먼 거리를 신속하게 달려와서 분산된 적을 기습해서 각개 격파하는 전술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동성을 이용해서 적의 취약한 지점을 찔러 돌파한 뒤 그 여파로 혼란에 빠진 적을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나라 원정이나 유방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최전선과 후방을 오가며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면,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오랜 행군에 지치고 공격하는 쪽이, 든든한 요새에 의지해서 지키는 쪽보다 더 열세인 것은 당연한데, 항우는 병력의 일부만 추려 가서 광활한 중국 땅을 이리 저리 내달려서는 숨 쉴 틈도 없이 서쪽 성을 쳐부수고, 동쪽으로 다시 마구 달려와서는 또 쳐부쉈다. 결국 유방-팽월의 기각지세를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똥개 훈련이라는 식의 조롱을 받는 것이지, 이 기동전만 떼고 본다면 항우의 전투능력은 경이롭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전투력 외에도 정말 기괴한 사항이 있는데, 식량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해도 '''절대로 자멸하지 않는다.''' 거록대전 때, 식량을 거의 전부 불태워버리고도 이후 신안대학살까지 반년을 넘게 버티더니 그 상태로 관중까지 진격한 일화와, 팽월에 의해 보급로가 아무리 파괴되어도 무려 몇년 간, 도통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삼국지관우를 포함한 여러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전쟁에서 보급은 한번만 잘못되도 그대로 자멸, 혹은 매우 큰 패배로 이어질 만큼 중요한 사항인데,[31] 항우는 어느 누구보다 보급로 공격을 많이 받았고, 식량이 아예 끊어진 적도 제법 있었는데, 보통이면 순식간에 쫄쫄 굶고 모랄빵 나서 관광당하는게 정상인데도 식량 때문에 전투에서 밀리거나 졌다는 기록이 아예 없다.[32] 팽성대전처럼 하루치 식량만 존재하면 어떤 상대라도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일까?
이상과 같이 항우의 전술적 판단력과 군사 지휘 능력은 기나긴 중국 전사(戰史)에서도 그 맞수가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야전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나 전공 및 일신의 무력으로만 본다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 그나마 리처드 1세 정도가 견줄 만하다.
결과적으로, 항우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끈 전술적 차원의 싸움에서는 해하 전투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항우가 정치적으로 실책만 반복하면서도 그렇게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전투력 덕분이다.

3.2. 정치적 능력


사람들이, 초나라 인간들은 원숭이 꼴을 하고 갓을 쓰며 사람 행세를 한다고 하던데, 과연 그랬군.

한생, 금의환향하겠다며, 중국 최대의 요충지인 관중을 버리고 서초로 돌아가는 항우를 비꼬며.

하지만 하늘이 내린 무력과 군사적 능력, 그리고 천하의 모든 세력을 무릎 꿇린 카리스마와는 별개로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정치적 판단력은 최악이나 다름 없었다. 2년 만에 패기와[33] 군사적 능력만으로 제패한 중국 땅을, 4년 만에 정치적 실책으로 잃었을 정도. 이런 무식함은 그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을 필부지용으로 만들었고, 전쟁은 아무리 만인지적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의 또 다른 예시로 남고 말았다.
분봉 문제로 괜히 척을 져서 싸우지 않아도 될 세력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잠재적인 적들을 줄인답시고 민초들을 학살하고 다닌 끝에 백성들한테 증오받아 민심을 크게 잃었고, 아군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항우의 질투심과 의심에 질려버린 천하의 인재들이 끝내는 항우를 버리고 줄줄이 적인 유방 측에 붙어버리게 만드는 등, 항우가 초한 대전 내내 보여주는 행보는 과연 그에게 대전략이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다. 정치적 능력과 연계된 전략적 개념에서 항우는 어이를 상실할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라이벌인 유방이 스스로는 항우에게 맞서 지구전을 펼치고, 한신을 보내 북방을 평정하고 여러 제후들을 하나하나 끌어모아 소모전으로 항우의 전쟁 수행 능력 쪽을 고갈시킨다는, 시대를 한참 앞서간 총력전을 실행한 것에 비하면 항우는 "일단 눈 앞에 적이 있다면 때려 부수고 보자"는 전쟁이라고 보기 힘든 '전투'의 관점으로 전쟁을 벌였다.
심지어 그 유방 하나에게만 제대로 집중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는데, 전반적으로는 자신에게만 세력을 집중시킨 나머지 정작 태연히 후미를 치러 온 팽월을 제때 막지 못해 식량 보급 문제로 몇번이고 본진과 최전방을 오가야했기 때문이고 후반에는 상술한 대로 한신을 막지 않았던 것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것이다.[34]
또한 유방이 관중, 파촉에서의 지원은 물론 형양 북쪽 오창 지역까지 확보해 식량 보급을 원활히 한데 반해 항우는 지역 자체는 식량 보급이 문제있는게 아니었음에도 끝까지 팽월 하나에게 발목이 잡혀 식량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35] 결국 초나라라는 국가는 총력전에서 뒤떨어지고 항우가 없는 곳에선 패배만을 거듭하며 피해가 누적된 끝에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종합적으로, 거시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인물인 건 확실하다. 전략적인 이점의 설명을 듣고도 관중을 버리고 고향에 자랑하기 위해 되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항우가 취한 행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또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20만의 포로를 묻어버리고, 함양에 입성해서 진왕 영자영을 죽이고 대학살을 자행하는 모습, 그리고 이후 멋대로 제후들을 분봉하고 걸리거나 저항하면 학살하는 모습은 항우의 국가관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자신의 심복에 대해서도 제대로 신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진평에게 제대로 이용당해 유일한 책사이자 대외적으로라도 양아버지로 칭하기도 했던 범증을 스스로 버리기도 했다.[36]
이런 모습을 보면 항우는 "천하를 아우른다."는 의미보다는 마치 전국시대의 개념으로 진나라를 대했다. 타국을 정복하고 외국인을 학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본래 관중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던 강소성 출신 유방이 관중의 사람들을 위로해서 인심을 후하게 산 부분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부분. 각 국가 간의 배타적인 소속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유방이 유독 특이했던 면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항우의 외국인 차별은 심한 수준이었으며 이 와중에 장한 등은 또 총애했으니 여기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이후 이어지는 분봉 조치도 마찬가지다. 이때의 모습으로 보면 항우는 중국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예 이해를 못 하거나 혹은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 때문에 군현제 등에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초 회왕, 즉 초 의제를 대하는 항우의 태도에서도 그 정치력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데, 숙부인 항량이 옹립한 의제를 자신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죽여서 자기 발판을 무너뜨린 작자가 항우다. 훗날 위 태조실권은 없지만 자신에게 명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군주를 어떻게 다뤘는지만 봐도 항우의 선택은 한심한 수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의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양치기 신분으로 그 출신이 의심스럽다 해도 자신의 숙부인 항량이 직접 찾아 모셔오며 초나라 왕으로 받들면서 정통성을 확보한 인물이었고, 항우가 의도적으로 의제를 배제하고 분봉을 통해 각지로 흩어버리기 전까지 초 회왕 밑에서 항우와 함께 싸운 군웅들은 그 속내가 어떠했건 간에 명목상으로는 의제의 신하들이었다. 거기다 항우의 견제로 의제는 제대로 권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항우의 뜻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굳이 암살해야 할 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의를 굳이 찾자면 항량 사후 항우와 척을 진 것에 대한 분풀이뿐이었다.
항량이 의제를 옹립한 이유가 정통성에 있음을 볼 때, 아직 천하를 차지하지 못한 항우가 의제를 죽이는 것은 스스로 정통성을 차버리는 역적 인증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정치적 식견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37][38] 오죽하면 초한쟁패기까지는 그저 '옛날 이야기 속 미담'으로만 전해져내려오던 선양이, 항우가 남긴 오점 이후에는 선양을 하지 않으면 항우와 동급으로 싸잡아 폭군 인증으로 역사에 남겨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굳을 정도였다. 실제로 초한쟁패기 이전의 하, 상, 주, 진 등의 왕조 교체도 전부 무력 정벌로 이루어졌지 선양 같은 (표면상으로라도) 온건한 방식의 천자 교체는 없었다. 그리고 초한쟁패 이후 왕망전한을 멸망시킨 시점에서 선양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조비, 사마염 등이 반복하면서 필수적인 절차가 된다. 후한에서 조위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비가 9번이나 제위를 거절하며 선양 쇼를 벌인 이유가 바로 항우 때문이다.
이후 위 무제 조조에게 사실상 예속된 헌제가 400년 통일 한 왕조의 정통성을 잇고 있던 것에 비해 초 의제의 존재감이 미약한 측면은 있었다곤 해도 의제를 살해한 건 엄연한 반역 행위였으며, 이는 일전에 항우와의 친분을 따라서 사실상 항우의 기분내키는 대로 이루어진 분봉 책정과 합쳐져 기존의 도리와 위계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킴으로써 말 그대로 군사만 많이 모아서 깃발을 내걸면 어떤 인간이든 왕을 칭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난세를 열었다. 그래서 유방은 초한전쟁 후 숙손통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런 위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항우 사후 반란을 일으켜 유방과 대치한 영포가 당당하게 "나도 황제 한번 해보려고 반란했다!"라고 유방에게 일갈할 정도로 초한전쟁에 이르러선 명분이란 것의 가치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고,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지에서 앞서 있었던 항우였다. 특히, 자신의 숙적인 유방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원래라면 반란군으로 비난받아야 할 유방을 역적이자 학살자인 항우를 치는 의인이자 의제의 후계자라는 명분을 쥐어주었다.[39]
자기 마음대로만 하다 보니 하는 말이 앞뒤가 안 맞기도 했는데, 한 예로 의제를 쳐내면서 "회왕 그 자가 한 게 뭐가 있는가, 천하를 평정한 건 전부 나와 장수들의 공이 아니냐?"고 했지만 이 말을 한 게 약조대로 공적을 세운 유방에게 제대로 땅을 주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분봉에서도 공적의 유무는 자신과의 친소를 잣대로 하여 맘대로 무시하였다. 의제는 공이 없으므로 대우해주지 않겠다면서 정작 공을 세운 사람들도 푸대접한 것.
의심 가는 신하를 숙청하는 방식 또한 세련되지 못했는데, 대표적으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한 마당에 굳이 초 회왕의 약속을 형식상으로나마 지키겠다며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봉했다. 이건 원래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였어야 했는데 유방의 조리있는 변명과 번쾌의 대담한 시위에 의해 실패하면서, 유방에게 관중왕 자리는 주기 싫지만 그렇다고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그냥 내쫒으면 자신의 권위에도 손상이 올 것 같으니까 대충 얼버무리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진평의 이간질 작전에 흔들렸을 땐 범증을 바로 실각시키거나 하다못해 구금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야금야금 자잘한 권한만 빼앗는 등 소심하고 이도저도 아닌 대응을 취하곤 했다. 범증의 경우 바로 출사표를 내고 떠났으니 망정이지, 반역을 일으키거나 아예 유방에 투항해버렸다든가 항우와 대립각을 세워 다투었다면 다른 장수들과의 사이까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40]
때문에 항우에 대한 평판이 급속도로 나빠졌음과 동시에 비록 전장에서는 전무한 활약을 보였으나 '''되레 이기면 이길수록 점점 불리해지는 희한한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고위급 인사만이 아니라 일반 병사나 포로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복한 병력들을 데리고 있기 부담스러우면 무장 해제를 한 후 변방으로 내쫓아버리면 그만인데 항우는 오히려 모조리 죽여버리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즉, 항우의 패배는 한족,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는 그만큼 큰 다행인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 따위로 해선 안 될 짓만 골라서 행동했기 때문에 결국 패했다.

3.2.1. 복고주의


이러한 모습을 항우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항우가 가진 세력로 문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스스로가 초나라 귀족의 후예이자 초나라 땅에서 거병하여 그 세력이 주축이 된 항우로서는 초나라 땅이 아닌 관중을 중심지로 삼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41] 진나라에 대한 잔혹한 모습 역시 통일 진나라와 그 제도에 반감이 극심한 세력으로서는 당연하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모습이 항우의 개인적인 개성 때문이든 혹은 그 세력 자체의 모습 때문이든, 초나라 귀족 가문 출신 항우가 춘추전국시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과 반대로 유방과 그 패거리는 오히려 그 출신 성분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구시대적', '복고주의'적이었다는 평가는 항우의 문제점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일단 당시 반진을 기치로 일어난 군벌과 인물 가운데 구 6국 귀족 출신은 사실 적지 않다. 위왕 위표, 한왕 한신, 장량, 제나라의 전씨 일족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누구도 항우만큼 심각한 문제점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특히 항우의 학살은 사실 진나라에 대한 적대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항우는 제나라에서도 잔혹무도한 모습을 보였고, 그 심각한 대학살은 당시는 물론 춘추전국시대에도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잔혹한 악행이었다. 항량이 죽자마자 초 의제와 신하들이 가장 먼저 항우부터 쳐내려고 했던 것부터가 그 전의 양성 학살의 잔인함 때문.
항우가 복고적인 봉건제를 택하여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방식도 엉망진창이었다. 유방은 견제를 위해 파촉에 처박아 놓았지만 항백의 설득 하나로 한중까지 지배 영역으로 퍼주는가 하면,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제나라의 장수에 불과했던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봉하고 본래 제나라 왕을 교동왕(膠東王)으로 옮겨버린 일 때문에 전영의 분노를 샀으며, 그 전영은 자신이 직접 들고 일어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서 항우가 세운 천하를 단번에 뒤흔들어 버렸다. 전영의 협조를 얻은 진여도 항우가 자신을 돕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에 봉하지 않아 불만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이후 정말 지독하게 항우를 괴롭힌 팽월에게 항우는 아무런 봉국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알아서 적을 만든 셈이나 다름없는 것.
항우의 분봉은 춘추전국 시대의 가치관으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항우가 명분으로 삼은 '복고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항우는 ''''정통성 있는 구 6국의 후예'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자기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정통성 있는 한왕 성을 유방과 가깝다는 의심만으로 살해해버리고 대신 자기 부하를 한왕으로 앉혔으며, 월왕 구천의 후예들을 푸대접하면서 굳이 오예를 형산왕에 앉히더니 나중에는 그조차도 쫓아내고 땅을 강탈했다. 위왕 위표는 땅을 반쯤 빼앗기고 항우의 직속 부하가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결국 한왕 성의 조카 한왕 신은 유방의 충실한 부하가 되었고, 위왕 위표는 항우를 한 번 배신하고 유방 측에 붙었다. 오예도 본인의 활약상은 알 수 없지만 북월이 유방 편을 든 것은 분명하다.
항우는 형식적으로는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여 천자로 삼고, 자신은 패왕(覇王)이 됨으로써 춘추오패와 같은 정치적 위치에 자신을 놓았지만 결국 초 회왕을 죽여버렸으니 오히려 스스로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 쓴 꼴이 되어버렸다. 구세대의 춘추시대 패자들은 비록 실질적으로 천하의 권력을 잡고 패도를 펼치기는 했으나, 그 패자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이 모시던 '''주 천자를 살해한 전례는 없다.''' 항우는 그러고도 스스로 패왕임을 계속 자칭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모순의 극치였다.
이처럼 항우의 정치적 행동은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사상적 기초가 전혀 없이 '''그저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 뿐이었으며''',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의 정치 활동을 오직 군사력으로만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그 잘못을 지적하면 같은 편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잔인하게 죽여버리니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이처럼 근본적인 정치 사상 측면에서 결함을 가지고 있는 항우의 통치는 항구적인 체계가 될 수 없었다. 항우와 같은 막나가는 방식으로는 상대가 유방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반란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제나라 전씨, 연나라 장도, 조나라 장이, 월나라 오예는 유방이나 한나라 세력과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42] 즉슨 한나라의 군국제와 대비해서 항우의 봉건제와 복고주의 성향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항우의 행동을 보면 사실 그것이 복고주의적인 것도 아니었고 그냥 우격다짐식의 폭정이나 다름없었다.

3.2.2. 학살


아무리 사람 목숨이 쉽게 죽어나갔던 과거 시대이고 또 전쟁 중이었다지만 항우의 처사는 분명 도가 지나쳤다. 사실 도가 지나쳤다는 수준을 넘어 춘추전국시대에도 항우 수준으로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경우는 없었다.[43] 당대에도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으며, 후대 역사가들도 두고두고 악행이자 패착으로 지적했다. 한마디로 옛날 기준으로 봐도 심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민심이 떠나 항우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실책 그 자체였다.
항우는 전쟁 도중 적국의 포로나 점령지의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가장 잘 알려진 건 신안대학살이지만 알고 보면 항우가 저지른 학살은 한두 번이 아니다. 기록된 사례만 하더라도 다음과 같다.
  • 양성 학살: 항량 생전, 별동대로 출전하여 양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주민들을 생매장했다.
  • 성양 학살: 유방과 별동대로 움직일 때 성양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다만 이 건은 항우 본인만의 결정인지, 유방의 동의가 있었는지, 주체가 유방이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이후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오랫동안 성양 인근을 방어선으로 삼고 버텼고, 유방이 위기인데도 성양 주민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을 보면[44] 이때도 항우가 학살을 주도했거나 적어도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신안 학살: 기원전 207년 음력 11월 항복한 진나라 군 20만을 생매장한 대학살이다.
  • 함양 학살: 기원전 207년 음력 12월 진왕 자영을 죽이면서 함양성의 진나라 주민들도 같이 학살한다.[45]
  • 제나라 학살: 기원전 205년 겨울 반기를 들어 제나라 왕이 된 전영을 성양에서 토벌하고 항복한 포로들을 생매장한 뒤, 계속 북해까지 북진하면서 고을을 마주칠 때마다 백성들을 학살했다.
  • 외황 학살 미수: 여기서도 학살을 자행하려고 하다가 소년의 설득을 듣고 그만두었다.
그 외에도 사람을 태워 죽이거나 삶아 죽였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오죽하면 사마천은 항우가 파묻어 죽인 사람이 천만 명은 될 것이라고 적었을 정도.[46] 유방과 팽월 또한 드넓은 초나라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다녔기 때문에 초한쟁패기가 끝난 후의 한나라가 통계를 낼 수 있던 당시 중국의 인구는 고작 500만 명에 불과하였다.[47]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력도 개판이 되어 신하들과 장수들이 말이 아닌 소를 타고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 항우가 2년만에 중국을 제패하고 4년만에 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결과다. 한 고조나 다른 군벌들 또한 학살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기록자들도 항우가 독보적으로 엄청나게 학살한 것만은 인정하고 있다.
각종 협약 등이 체결된 현대의 전쟁과 과거의 전쟁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를 동일선상에 놓을 순 없지만 항우는 '''그 당대에도 이미 심각하게 비난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윤리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대에도 항우의 경쟁자인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본다면 이는 윤리적인 부분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전략적으로도 최악의 악수였다. 상식적으로 고을을 점령을 해도 '''백성들을 모두 죽여버리면 영토를 차지한 이득이 전혀 없다.''' 세금, 군역, 노역을 담당할 주체들이 모두 사라지는데다 그 영토를 아예 폐허로 만들 계획이 아니라면 죽어버린 사람들을 대신할 인원들을 자국 어딘가에서 데려다 이주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이 고스란히 자국의 손해로 남는다. 전쟁이 많았던 춘추전국시대에서조차 전쟁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는 '읍성'을 땅따먹기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땅과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민간인'''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 항우의 학살이 문제인 건 적군을 죽이는 정도는 남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항우가 적군뿐만 아니라 '''민간인인 '고을'과 도시인 '성' 자체를 학살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우는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는 잔혹성을 보였다. 춘추전국시대진나라백기장평대전에서 조나라군 40만을 몰살한 사례가 떠오를 정도. 게다가 백기의 경우, 비록 잔혹성으로 인해 전국에서 욕은 먹었지만 학살의 목적이었던 '조나라를 일어서지도 못하는 불구로 만들어 버린다'는 '''목표 자체는 달성'''한 것에 비해 항우는 그것도 아니었다.
항우의 학살에서 분풀이 외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면 '본보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학살은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으며, 각국의 백성은 그저 '죽지 않기 위해서' 당연하게도 항우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정복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항복하면 살려주되 저항하면 다 죽이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순순히 따르면 안전하다니 대부분 항복했을 테니까. 그런데 항복하든 안 하든 죄다 죽는다면 아무도 항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 죽일 놈들을 하나라도 더 같이 끌고 가겠다고 이를 갈 뿐이다. 결국 항우의 학살은 기껏 항우가 그 천재적 무예를 발휘해도 군사와 수고와 시간만 낭비하고 전세를 질질 끄는 원인이 되고 만다. 반면에 유방은 진작부터 이 부분에서 강약 조절을 하는 법을 배웠다. 진나라 공격 도중 항우가 항복한 양성을 파묻었다는 이야기에 겁을 먹은 태수가 차라리 버티려고 하자 그 부하의 요청을 받아들여 목숨을 보전해주는 건 물론, 지위도 그대로 유지시켜주자 주변 읍성에서 앞다퉈서 문을 열게 만들었고, 이 이미지 전략에 낚인 조고가 유방과의 밀약을 통해 항복하려고 호해를 죽이자 더 이상 마이너스밖에 없는 조고 따윈 시원하게 팽하고 그대로 진격해 간단히 함양까지 접수했다.
가장 극심했던 진나라에서는 당연히 적대감이 폭발하여 한신은 유방에게 전략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더욱이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학살과 도륙을 당하여 살아남은 것이 없게 되어 천하 백성들은 모두가 원망하며 아무도 항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나, 단지 그의 위세에 눌려 복종하고 있는 체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패자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천하 인심을 잃고 있습니다."

"또한 삼진(三秦)의 왕은 모두 진나라 장수들 출신으로, 그들이 진나라 장군으로 몇 년간을 군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싸움 중에 전사시킨 진나라 자제들의 수효는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나라의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무관(武關)을 통해서 관중으로 진입하실 때, 터럭 하나도 건들지 않음으로 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하고 법삼장(法三章)만을 두기로 백성들과 약속함으로 해서 진나라 백성들치고 대왕께서 진왕(秦王)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기》회음후 열전 중'''

이후 관중은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항우와 유방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랄지는 너무 뻔한 일이다. 참고로 이 진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한 번 천하를 통일해본 경험이 있는 나라다. 또한, 유방이 동진하고 있을 때 재빨리 끝낼 필요가 있던 제나라에서의 싸움은 쓸데없는 학살로 오히려 사람들의 증오만 사고 한없이 길어지게 되었다. 일단 유방의 세력은 팽성대전으로 격파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전횡이 제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바람에 항우의 제나라 원정은 결과적으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 되고 말았고 팽성대전 역시 전략적 목표라 할 수 있는 유방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미가 상당히 반감됐었다. 그리고 팽성대전 이후의 한나라는 법까지 뜯어고치며 징병 제외 대상인 노인들도 전쟁터로 보내고, 자원은 나오는 족족 보급으로 보내는 수탈이 따로 없는 가혹한 총력전 체제로 이행했는데, 안그래도 대기근이 돌아 난장판이 된 와중에 이랬는데도 한나라 백성들은 일체의 봉기 없이 이 모든 걸 감내했고, 심지어 이를 주도한 소하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얼마나 항우에 대한 공포가 사무쳤으면 '''유방 눈치를 보느라 일부러 행패를 부리게 만들 만큼 존경했다.'''
사실 이쯤 되면 백성들도 자기들 쥐어짜고 사지로 보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래도 안 그러면 항우가 우리 다 죽이겠지?' 하고 자기들끼리 납득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가난해지고 '''죽을 수도 있는''' 곳으로 보내는 유방이랑 '''100% 죽이는''' 항우랑 누가 낫냐고 보면 당연히 전자니까. 그리고 사실 유방이 수도의 구중궁궐에 편히 앉아 장수들만 보내 싸움 시키던 왕도 아니고, 관중만은 어떻게든 보전하려고 그 앞에 수비라인을 만들어 필사적으로 항우와 싸우며 구르던 중이었다. 유방 입장에서야 관중이 자기 심장이나 다름없는 지역이니 목숨 걸고 지키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미 항우의 칼춤 아래 대량의 유혈을 겪었던 관중 사람들에겐 유방이 구세주로 보였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유방은 전시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으면 틈틈히 관중에 들러 노인들을 불러 연회를 벌이고 백성들을 위무하고 세자를 세워 후방을 튼튼히 하는 등의 민심을 돌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한 지역을 점령하기는 힘들지만 민심을 얻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다. 점령하기 위해 들인 손해를 그대로 감수하면서 점령지를 위해서 베풀어야 하는데 결국 손해가 갑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쥐어짜인 백성들의 봉기나 어설프게 민심을 베풀다가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반란으로 몰락한 정복자들도 꽤 많다. 그런데 유방의 경우에는 그게 아주 쉬웠다. 유방이 성인군자라고 불릴 만큼 선행을 한 것도 아니고, 지식인들을 감화시킬 만큼 학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백성들이 경외할 만큼의 명문가[48]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항우가 앞뒤 구분 없이 다 죽여버리는 바람에 유방으로서는 아무것도 베풀 필요 없이 그냥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항우가 저질러 놓은 짓들은 알아서 대비 효과를 만듦으로써 유방을 도와주는 일들뿐이었다.
칭기즈 칸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이 군사적으로 뛰어났고, 이들도 학살을 벌였지만 항우와는 그 결과가 다르다. 칭기즈 칸은 자신과 싸우거나 항복을 거부하던 상대는 용서 없이 도륙했고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엔 풀 한포기도 남기지 않았지만, 먼저 항복을 청하는 경우엔 그대로 받아줌으로써 상대의 저항 의지를 꺾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주로 반란과 저항에 대해서 학살을 벌였지만 자신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베풀었고, 그 지역의 유력자들은 자신의 신하들과 동등하게 대우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의 문화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점령지에서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방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이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역사적으로 항우 정도의 지위에 올라간 군주는 아무리 학살을 저지르고 다녀도 최소한 항복하는 사람은 잘 받아주는 등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썼는데 항우는 '''채찍만 죽도록 썼으니 누구라도 항우에게 적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항우가 13살짜리 어린아이의 설득을 따라 학살을 그만두고 항복을 받자 학살을 자행할 때는 그토록 저항하던 성들이 줄줄이 항복하는 장면은 항우의 판단력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 미수에 그쳤지만 자기가 천하를 거머쥐면 시황제분서갱유를 벤치마킹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일화도 존재한다. 이쯤되면 항우가 천하통일을 하지 못한 것이 중국인들에게 다행이기도 하다.

3.3. 인사상 실책


"항왕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맹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군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하가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하니, 아녀자의 인자함일 뿐입니다."

《사기》회음후 열전. 대장군이 된 한신이 유방을 만난 자리에서 항우를 평하며.

"'''항우는 그나마 있던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나에게 패한 것이다.'''"

유방이 자신이 승리한 이유를 논하며.

한신과 유방 등 당대의 인물들이 항우를 평가했다 치면 입을 모아 항우의 인색함을 비웃었을만큼 항우는 사람을 부리는데는 정말 노골적으로 무능했으며, 이는 항우가 겪게 되는 모든 난관의 근원이 된다.
최측근에 대한 대우도 미묘한 면이 있었다. 항우를 내내 따르며 공을 숱하게 세운 종리매, 용저, 계포 등은 18제후 분봉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따로 영지를 챙겨주었다는 얘기도 없었으니, 이런 점을 진평이 이간질에 이용해먹은 결과 제일 먼저 범증이 이탈. 용저는 군공으로 제나라 땅을 취하고 싶었던 욕심에 한신에게 굳이 정면으로 덤볐다가 역으로 패배해 사망하고, 나머지는 사면초가에 이르자 모두 항우를 버리고 떠난다. 계포의 경우엔 아예 3대에 걸쳐서 한나라 왕조를 섬기기도.
이외에도 인재들을 버리거나 중용하지 않아서 이들이 유방 측에 붙어서 대활약을 하거나 항우의 실책을 유방이 대폭 활용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아래는 그 예시.

3.3.1. 한신


유방의 천하 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군인 한신은 원래 항우의 사람이었다.
한신은 항량 시절부터 항씨 일가를 따라다니며 종군했고, 항우에게는 여러 계책을 전했지만 '''항우는 모조리 씹어버리고''' 한신을 한직[49]에 머무르게 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죽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지도 않았다. 용저유방이 알고 있던 한신의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을 빌어먹고 가랑이나 기던 찌질한 과거사를 항우라고 몰랐을 리 없을 테니, 범죄자가 되지 않은 결단은 인정하지만 끽해야 딱 그 정도의 팔푼이로 취급했거나, 그 정도의 관심도 없어서 그저 키만 크고 칼 찬 놈으로 취급했든가 둘 중 하나.
물론 한 고제 측에 가서도 처음엔 별 중용되지 않았으나, 소하의 추천으로 유방은 그를 중용하게 된다. 결국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인 유방은 한신을 중용해 항우를 멸하게 된다.
정작 한신도 자기 스스로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한 항우를 비웃은만큼 아랫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베풀었으나 이와는 정 반대로 자기 동료들과 윗사람들에 대한 처신은 개차반이었고, 결국 그를 경계하던 한고조여후에 의해서 결국...

3.3.2. 팽월


항우의 숨통을 끊은 것이 한신이라면 전쟁 내내 항우의 목을 조른 것은 팽월이다. 유방을 밀어낸다 싶으면 후방 쪽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팽월의 유격전에 항우는 한 번은 다 이긴 상황까지 가 놓고도 결국 몰락하고 말았는데, 이 팽월은 항우의 분봉 당시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에 원한을 가져 유방에게 가담한 것이다.

3.3.3. 진평


반간계를 이용해 항우의 거의 유일한 책사인 범증을 몰락으로 이끄는 큰 성과를 내고, 훗날 여씨의 횡포로부터 유씨들을 구원해 천하를 안정시킨 한나라 최고의 충신 진평 또한 원래는 항우의 사람이었다. 진평은 항우 휘하에서 은나라를 꼬드기는 데 큰 공을 세우는데, 은왕 사마앙이 삼진을 공격하던 유방에게 다시 붙어버리자 은나라 정벌을 담당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항우를 보고 도망가게 된다. 다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고, 항우는 대우가 별로인게 문제라며 비판했으며, 나중에 항우를 버린 이유를 따지는 유방에게 항우가 친족만을 믿고 자신을 중용하지 않아서라고 고백하긴 했다.
진평은 결국 친구의 추천으로 유방 밑에 들어가게 되고, 멀리서 헐레벌떡 도망쳐 오느라 힘들었을테니 좀 쉬라는 말에도 내가 지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 계책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였고, 이에 감복한 유방은 진평이 이것저것 비리를 저지르고 구린내를 풍기고 다님에도 불구하고[50] 살아 생전은 물론 죽어서까지 진평을 아주 요긴하게 써먹는다.[51]

3.3.4. 영포


초한쟁패 말엽에 유방의 밑에서 용맹하게 싸우며 초나라를 괴롭힌 영포도 원래는 항우의 사람이었다. 유방은 영포를 설득하기 위해 자기 밑의 수하라는 사람을 영포에게 보냈는데, 영포가 저울질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항우의 사신도 영포에게 도착했다. 그러자 수하는 항우의 사신에게 영포가 유방 측에 투항했다고 외쳤고, 결국 영포는 사신을 죽여버리는데 항우도 이에 질세라 인질로 쓸 수 있는 영포의 가족을 바로 죽여버렸다. 그런데 사신을 죽였으면 이미 돌아섰다고 판단하는 게 당연한 선택이긴 하다. 일단 이렇게 돼서 항우가 자신을 다시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족을 죽여버리자 영포는 유방 밑으로 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삐딱선 타서 수도가 함락되는 와중에도 간만 보던 신하를 설득하려고 사신까지 보내놨는데, '''그걸 죽이고 적한테 귀순했으니''' 어지간한 성군도 당연히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항우의 단편적인 안목을 잘 보여주는게 적장의 가족은 훌륭한 인질이다. 당장 유방의 가족들을 영포의 배신 직전에 인질로 잡아 살려두고 멸망 직전까지 매우 잘 활용해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영포의 가족들도 일부만 죽이거나 하는 식으로 처벌하고 나머지는 인질로 써먹을 수 있었는데 지 성질대로 다 죽여버린 통에 매우 적절히 써먹을 패를 그냥 날려버린 꼴이다.
결론적으로 영포 부분만큼은 항우의 잘못이라 할 수 없다. 먼저 삐딱선을 타서 두 세력 사이에서 간을 보다가 수도인 팽성까지 점령당하게 만든 것은 영포 쪽이며, 그러고도 항우는 영포를 굳이 징벌하려 하진 않았는데 '''영포가 먼저 직접적으로 항우의 사신을 죽이며 배신한 것이기 때문.''' 영포의 가족이 몰살당한 것도 반년 넘게 항우와[52] 싸우다가 패배하고 도망치고 나서 남겨진 것을 죽인 것이라서 이 부분은 오히려 당연한 대우였다. 유씨 일가에 대한 대우와 비교해 약간 일관성이 없고 그것때문에 제법 손해를 본 면은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신안대학살과 의제 시해 등 뒤가 구린 짓에 매번 동원당하는 영포의 불만을 고려하지 못한 점이 문제였을 듯하다.

3.3.5. 의제


항우는 의제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 주장을 세우기 시작하자 그를 대낮에 습격해 죽여버리는데 이로 이득을 본 사람 또한 유방뿐이었다. 실권은 항우에 비하면 약했지만 의제는 분명 중원의 천자였으며, 반진 운동의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항씨 가문이 반진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범증의 의견을 따라 몰락한 초나라 왕통을 이었다는 정통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며, 이는 대대로 초나라에 충성한 명문가로서 충의를 보여준 것이었다. 범증은 항량에게 "초나라 사람들은 진승이 초 회왕의 한을 풀어 초나라를 다시 일으킬 줄 알고 환호했는데 그 자는 스스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사람들이 강동 출신인 당신에게 호응하는 건 당신이 초나라 귀족 출신이라 그런 것이니, 왕이 될 생각은 접고 회왕의 후예를 옹립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 하였고, 이를 들은 항량이 회왕의 후손을 찾아 초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의제였다.
근데 항우는 그것을 깨버렸을 뿐더러, 그 수완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도 결국 유방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었다. 물론 언젠가는 의제를 제거하긴 해야겠지만, 시기도 방법도 완전히 글러먹었다는게 문제다. 어차피 의제가 호락호락 선양해 줄 인물이 아니라면 후사를 남기기 전에 비밀리에 독살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고 이런 공작에 도가 튼 범증 또한 분명히 조언을 했겠지만 정작 항우는 일을 그렇게 진행할 성격이 아니고 무엇보다 그럴 참을성이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물론 항우의 머릿속에서 천하는 이미 평정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가장 유력한 라이벌이던 유방은 한중으로 쫒아냈으니 설마 뭔 일을 하겠냐는 게 홍문연 이후 그의 일관적인 생각이었으니.
중국 사학계에서는 '''항우의 결정적인 패착을 의제를 시해한 것'''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초한쟁패기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의제를 허수아비로 치부하지만, 역사학적 관점으로 볼 때 의제의 시해는 단순하게 볼 수 없다. 아무리 실권이 없고, 세력이 약해도 의제는 그 자체로 항우의 주군이며 초나라의 왕(君)이자 새로운 통일 왕조의 군주였다. 그런데 단순히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신하(臣)인 항우가 의제를 죽였다는 것은 단순한 세력 다툼이 아니라 당대의 가치관 자체를 뒤엎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굳이 유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칠국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춘추 전국 시대부터 군주는 신하와는 다른 격으로 존재하였으며, 유교의 군정지론, 군주별이신을 끌어붙일 것도 없이 신하는 이유를 불문하고 군주에게 충(忠)을 바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 시대상에서 단순히 자신과 의견이 다르고 유방만을 편애한다는 이유로 주군인 의제를 시해한 것은 당대의 가치관을 완벽히 부정하는 행위였으며, 그런 항우에게 반감을 가진 것은 둘째 치고 '''"너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주군을 죽이는데, 나라고 못할 것은 뭐냐?"'''라는 명분을 주게 되어 중국 전역에서 반란의 씨앗을 심게 만든다.[53] 아군으로 남은 사람들과의 관계조차 원만치 못했는데, 팽성이 점령된 상황부터가 항우 휘하의 제후들이 조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항우가 자기 주군을 죽인 마당에,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에 붙는 것쯤은 그들 입장에선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렇게 다들 간만 보고 줄타기만 하다가 다른 곳도 아닌 수도를 허무하게 빼앗겼던 것이다. 이후로도 유방과 팽월의 철저한 기각지세에 비해 항우와 휘하 제후들은 말만 초나라 세력이지 뭔가 따로 노는 느낌이 강하다.
다만, 초한전쟁 당시 명분이란 것의 가치가 유독 희미하기도 했고, 항우가 딱히 내부 반란으로 몰락한 것도 아니므로[54] 의제의 정치적 존재감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지만, 일단 의제 암살 과정에서 영포가 항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어 이후 유방 쪽으로 붙어버렸고, 명목상의 주군조차 없어진 유방은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왕을 거쳐 황제까지 자연스럽게 오를 수가 있었으니 별 이득 없이 손해만 봤다는 점에선 크게 차이가 없다. 어떻게 보면 이미 정치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의제를 유방이 꺼내 들어서 항우의 명분을 깎아내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굳이 죽이지 않고 이용해먹을 수 있었던 의제를 굳이 죽였던 항우의 잘못이 더 크겠지만. 당장 유방은 의제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널리 알렸다.

3.3.6.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진나라 멸망 이후 항우는 천하를 재편할 기회를 잡았으나 '''논공 행상을 엉망진창으로 처리'''해버림으로써 제나라에서 반란이 터지고 아버지, 아들 하던 장이, 진여는 완전히 원수가 져서 분란이 끊이질 않았다. 냉정하게 사람을 쳐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공평하게 분배할 자신이 없으면 어느 한쪽이라도 확실하게 챙겨줘서 일부의 충성이라도 확보해야 했다. 근데 그것도 못 했다. 대표적으로 제나라 전씨들은 제나라 땅을 빼앗겨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결정적으로 유방은 진나라 땅을 받지 못해 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제나라 땅에서 난이 터지고 유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중 땅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천하 대권을 잡을 기회를 잡는다.

3.4. 총평


[image]
'''사기 항우 본기'''
항우는 하늘이 내린 무력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고, 명문 귀족으로서 기품있는 언행과 혈통을 타고났으며, 한신과 왕릉과 진평 등, 당대의 모든 인물들이 입을 모아 공손하고 자애로운 태도를 지닌 청렴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허나, 그것은 한신이 말했듯이 보통 남자의 그릇이었고, 군주의 그릇에는 미치지 못했다. 상관에 대해 교만하고 부하에 대해서는 인색하였으며, 측근들을 신뢰하지 못했고 친족만 편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거슬리면 학살을 남발하였다.
유방에게 먼저 관중을 빼앗기고, 군주의 총애도 빼앗긴 시점에 유방의 천하로 흘러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구도였으나, '''항우였기에 단순히 일신의 무력과 군사적 능력만으로 유방을 비롯한 모든 제후를 무릎 꿇리고 중국의 패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존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항우의 사고관은 고작 일개 제후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왕이 되었는데도 자세는 군벌"이었던 것이다. 특히 '자기 나라'인 초나라에만 관심을 뒀지, 천하의 백성을 모두 품으려는 마음이 없어 안팎을 극단적으로 차별하여 인심을 잃었고, 상과 벌이 불공정했으며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데도 어느 순간에 손바닥처럼 뒤집었기에 아랫사람에게 미움을 샀다. 무엇보다도 항우는 너무 잔혹했다. 난세의 군주로서 필요한 요소가 무력과 카리스마를 제외하면 거의 결핍된 상태였다. 이는 오만무례하다는 소리[55]를 들었어도 군주가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은 제대로 보여준 유방과 크게 대조되는 점이다. 말하자면 '''유방은 항우와 반대로 이름없는 평민집안 출신에 언동이 품위없이 천박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무력과 집안 외에는 모든 면이 최저인 항우보다 나았다.'''[56]
사실 항우의 이런 실패는 항우의 출신 성분과 나이, 항량의 죽음 등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결과다. 항우는 초나라 귀족 출신인데, 춘추전국시대 귀족으로서 과거 제도와 문물에 대한 향수가 있었고, 출신 성분과 주위의 사상은 덕분에 기본적으로 복고주의를 내세웠다. 사실 학살 문제만 해도 항량 및 범증 등 모두가 방관했던 행동이므로, 항우 개인보다는 당시 초나라군 전체의 문제로 보이는 면도 있다. 신안대학살의 계기 중 하나가 초나라 군사들의 포로 학대로 인한 반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문제는 시대는 변하는데 애매한 복고주의만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항우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본질적으로 사상적 구심점도 없었고, 자신에게 거스른다는 이유로 초나라의 군주였고 당시 천자인 초 의제를 죽이는 하극상을 일으켜서 자신이 만든 질서를 부정해 버렸다.
나이도 문제인게 거병할 때가 24세, 오강에서 자결할 때가 31세. 즉, 너무 젊었던 탓도 크다. 아무리 과거에는 10대 중후반부터 성인 대우해 주었다고 하지만 경험이 없는 풋내기인 건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난 무장으로서의 능력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미묘한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정치적 안목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정치적 능력 결여는 항우의 제후 봉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준도 없고 정의롭지도 않아서 모두에게 불만을 주었다. 물론 젊은 만큼 새로운 시대상에 맞는 사상과 문물 습득에 개방적일 법도 한데, 정작 항우는 모난 성격으로 남의 말도 안 들어서 공부할 이유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공부도 검술도 병법도 때려치운 일화만 봐도 드러난다. 거기다 너무나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신감이 문제였다. 차라리 유방을 그대로 관중왕으로 인정하고, 의제 체제 하에서 정치 싸움을 벌였다면 군사적 역량 외의 요소의 필요성을 느끼고 성장할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범증이 주도한 홍문연에 의해 항우는 자신의 무력을 맹신하게 되었다. 이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은 후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항우가 믿고 따랐던, 그렇기 때문에 항우를 제어할 수 있었던 항량이 너무나 이른 시점에 죽었다는 것. 당시 항량은 항우에게 없는 귀족으로서의 식견과 정치적 역량, 사상적 구심점, 행정적 능력 등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항량이 정치적, 행정적 문제를 직접 다루고 항우는 군대만 관리했다면 항우가 보여준 정치적 실패나 전략적 문제는 발생 안했을 터였다. 혹여 항우가 항량 밑에서 경험을 쌓고 정치를 맡았다면 훨씬 괜찮은 성과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초나라의 상황이 열악해지고 한신의 북벌이 완수되는 형양 전투 후반부터 광무 대치 기간의 항우는 그저 감정 가는 대로 움직이는 행동에서 벗어나 전투 외에 다른 수단을 꽤 많이 시도해 보는 모습을 보인다. 13살 남자아이의 말을 받아들여 학살을 중지하거나, 하찮게 여겼던 한신의 독립마저 인정할 생각으로 회유를 시도하고, 그토록 이를 갈았던 제나라 전씨와 동맹을 맺는 등. 문제는 그동안의 행실이 있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때는 이미 항우의 성장을 기다려 줄 형세도 아니었다는 것이지만. 또한, 범증 말고 믿을만한 인재도 없었다. 항우를 옆에서 보좌하며 항우를 그나마 말 듣게 할 수 있던 숙부 항백은 유방의 측근인 장량과 친해서 사실상 첩자 짓을 했다. 무턱대고 왕에 올랐다가 처신에 실수한 탓에 몰락한 사례는 진승, 한신, 노관 등, 항우 외에도 당대에 나름 많기도 했고.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본인의 그릇보다 너무 큰 자리를 맡았다. 덕이 있고 정치력이 뛰어난 군주 밑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의 역할을 맡았다면 최소한 한신과 같은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남았을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군주라는 직책을 맡아서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말았다. 동시대에 손꼽히는 서양의 명장이었던 한니발과는 정 반대의 케이스, 한니발은 카르타고 전체를 통솔할만한 그릇이었지만 [57] 한 방면의 사령관이라는, 자신의 그릇에 비해 작은 직책을 맡아서 나라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만약 한 고조를 이겼다 쳐도 잘해 봐야 나디르 샤처럼 전쟁질 노략질로 폭군 노릇이나 하다 제2의 한 고조가 나와서 반란으로 죽고 중국은 다시금 통일되거나 아예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전란이 다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항우는 죽기 전에 '''"나를 망하게 한 건 하늘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보통 이 말에는 항우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맹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오히려 매우 정확한 평가가 된다. 싸움은 잘 했지만 민심을 잡는데 실패하여 하늘에게 버림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항우의 패인과도 들어맞기 때문이다. 주나라천명 사상과 연관지어 해석한다면, 이는 항우의 입을 빌어서 항우의 부도덕함을 스스로 자인하게 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우는 싸움은 잘 했지만 천명을 잃은 탓에 하늘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던, 다른 말로 하면 천벌을 받은 것이다. 물론 역사가들이 황당무계한 발언 취급하는 것도 그렇고, 그 항우가 민심이 천심임을 알고 뉘우치며 뱉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저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 아이러니하게도 맞아떨어진 걸로 보인다. 설령, 진짜 후회하며 한 말이라도, 죽기 직전에야 깨달았으니 너무 늦은 뒤였다.
결론적으로 '''항우는 국지적인 전투에서는 수없이 승리했지만, 전체적인 국면에서는 유방에게 앞서지 못했다. 항우는 전투 전술에는 뛰어났지만, 전쟁 전략에 앞선 유방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이중톈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항우 주변에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 있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유방의 주위에는 이익만 밝히는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유방에게 기대어 작위(벼슬)를 구걸하고 식읍(재산)을 얻고자 했다. 이런 염치없는 인간들의 욕망을 잘 알고 있는 유방은 이들에게 적당히 벼슬과 재산을 주면서 잘 구슬려 이용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유방의 한나라가 시작된 후 중국에서 항우처럼 바보 같고 순진하고 제멋대로인 영웅은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음험하고 이익만 밝히는 비열한 음모가와 어리석고 진부한 서생들만 늘어났다. 항우가 자신의 실패를 통탄하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라고 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항우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것으로, 이 때부터 중국에서 호연지기를 가진 호랑이와 표범의 시대가 끝나고 주인 말을 잘 듣는 개와 양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있고 예의 바르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항우처럼 인생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그렇게 살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기에, 그렇게 살았던 항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진나라가 실정하자 진섭(陳涉)이 먼저 일어났다. 이어서 천하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그 뒤를 따라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항우는 한 치의 영토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들판에서 일어나 세력을 잡고 3년 만에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멸했다.

이어서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이윽고 항우가 관중을 버리고 초나라에 돌아와서는 의제를 쫓아내 죽이고 자립하자 제후왕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해서 난이 일어났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58]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기》 항우 본기'''


4. 기타 이야깃거리


  • 패자라고는 해도 짧고 굵게 살다 간다는 남자의 로망을 체현한 인물이라 그런지 후세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높다.
역사의 박한 평가와는 다르게도 그의 연대기는 너무나도 드라마틱하며, 또한 개인적인 면모에서 비롯되는 일화도 많이 남겼기에 중국 본토에서는 역사적 평론과 관계 없이 크게 흠모받는 인물이다. 중국인들이 한을 고대 '중화'의 집대성으로 보면서도 한과 대립한 항우를 한 축으로 삼은 초한지라는 소설까지 나왔다는 걸 생각해 보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무시한 사례로도 꼽히고.
  • 사마천사기에서는 한고조에게 패배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제후를 다루는 세가나 신하와 반역자를 다루는 열전 대신 천자의 기록을 수록하는 본기에 항우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사기는 천자와 제후를 나누는 데 명분보다 실제 세력과 영향력을 중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기에서 유방 다음에 나오는 것도 명분상 천자가 아니라 태후로서 실제로 천하를 호령한 여후다.
  •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가 죽은 오강에 와서 그를 기리는 시를 짓기도 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권토중래.
>勝敗兵家不可期(승 패 병 가 불 가 기 병가의 승패는 기약할 수 없으니
>包羞忍恥是男兒(포 수 인 치 시 남 아 부끄러움을 참는 것도 남아의 일이다.
>江東子弟多才俊(강 동 자 제 다 재 준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았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 토 중 래 미 가 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올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 패왕이라는 칭호는 항우가 호칭이 필요하다고 부르자 장량"삼황오제, 춘추오패, 전국 9왕 같은 호칭들이 많으니 택일하십시오."라고 답하여 패와 왕을 섞어서 스스로 패왕이라 붙였다고 전한다. 이 때 범증은 춘추오패의 결말이 모두 좋지 못했다는 점과 왕 칭호의 격이 너무 낮다는 점을 들어 항우에게 다른 명칭을 권했으나 묵살당했다. 그리고 범증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패왕이라는 호칭 때문에 '패'라는 글자의 의미도 어느 정도 변질이 되어서 무력적이고 강압적인 의미를 많이 띠게 되었다.[59]
  • 삼국지조조에게 데꿀멍하는 민담도 있다. 어느 날 조조가 항우에게 바위를 기어다니는 를 가리키며 "공께서는 힘이 산을 뽑을 정도로 강한데 이 이를 죽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항우는 코웃음을 치며 다른 바위를 들어 이가 기어다니는 바위를 내리찍었는데 큼지막한 바위들 사이의 틈이 컸는지 이는 죽지 않고 여전히 바위 위를 기어다녔다. 이를 본 조조는 항우를 비웃으며 "천하 장사가 이만한 이도 못 잡는단 말인가!"라고 말한 후 손가락으로 이를 톡 터뜨려 죽여 버렸다. 이것을 본 항우가 기겁을 하여 조조에게 굽신댔다는 훈훈한 민담 한 토막. 실제 항우가 저 정도로 무식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우가 능력을 가지고도 그 힘을 엉뚱한 데다가 쓰기도 했던 역사적 행적을 생각하면, 이 민담은 항우와 조조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민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역적이라 지탄받은 항우는 나라를 세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군담소설의 권선징악을 이루었는데 조조는 망하지 않고 나라를 세우고 천수를 누렸으니 권악징선이라 할 만하다.
  • 종종 삼국지의 최강 무장이라 꼽히는 여포와 비교를 하는 경우도 보인다. 당장 네이버에 검색에도 "항우하고 여포하고 누가 더 쎔?"이라는 초딩같은 질문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최강 논쟁은 언제나 그렇듯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중국에서의 무력 비교는 거의 대부분 항우가 기준이다. 이 때문에 삼국지에서는 그 어린 나이에 인간 병기급 활약을 보인 손책항우의 재래라며(소패왕, 즉 작은 패왕) 그의 용맹을 있는 대로 추켜세우는 묘사도 존재한다. 애초에 여포가 삼국지 최강자라는 인식은 연의가 띄워준 것이 크다. 또한 당대에 곽가도 여포의 위력이 항우에 못 미친다고 평가하였다.[60] 중국의 용맹한 장수에 대한 묘사를 보면 거의 언제나 '그 모습과 무용이 능히 항우와 견줄 만했다'는 뜻을 가지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의 여포보다 '실제 역사 기록'의 항우가 훨씬 강하게 묘사된다. 팽성대전거록대전만 살펴보더라도 이게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무용을 자랑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과거 맹장에 대한 우위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중국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상상할 수 있는 최강의 장수자리에는 항우가 자리잡고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말 그대로 남자의 로망이 형상화되었다 볼 수 있는 것이 항우기 때문.
  • 항우 장사는 바로 이 항우에게서 비롯된 단어다.
  • 시각에 따라서 항우가 아니라 흉노묵돌을 최대의 적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어느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무력이나 카리스마는 항우가 월등히 뛰어났지만 유방, 항우, 묵돌의 직업은 군주이지 장수가 아니다. 항우가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승장구했음에도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강조된 바이다. 묵돌은 항우에 비해 문맹이었지만 지혜로움은 항우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반면에, 항우는 용맹했지만 감정적으로 행동하여 쓸데없는 살육을 많이 저지르고 자멸하였다. 묵돌과 항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 작용한 것.
하지만, 묵돌이 상기한 것처럼 승승장구하며 중국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중국 자체가 항우와 유방으로 나뉘어서 건곤일척의 혈전을 벌였던 것에 크게 기인한다. 만약 초한전쟁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국력 소모가 없었더라면 결코 묵돌이 그렇게 활약했을 수가 없다. 당장 초한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진시황이 통치하던 시절, 진시황이 몽염을 보내어 흉노를 완전히 쓸어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 초한지를 쓴 이문열은 항우의 자살에 대해 "그가 태어나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개인 일생이 후대 사람들까지 기억할 정도로 흥미로운 점과 별개로, 항우의 정치적 능력을 생각하면 나름 납득이 되는 평가.
  • 생전의 업보 때문인지 죽어서도 말년이 곱지 못했는데 문화대혁명때 항우의 묘와 우희의 묘가 파헤쳐지고 석사자만 남게 되었다. 다만, 실제로 항우와 우희의 유골이 묻혀져 있는 묘는 아니다.

5. 어록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 없이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다.'''[61]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萬人)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6. 기타 창작물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계보)





[1] 지금의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2] 실제로 사실만을 쓰겠다는 사상이 주류가 된 나라는 고대에 매우 드물었다. 물론 호왈백만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 동네이니만큼 병력의 수 등은 뻥튀기되어 있을 확률은 염두에 둬야 하지만.[3] 가장 대표적인 게 초한지패왕별희.[4] 참고로 본기는 황제만 들어간다. 왕이나 제후는 세가에서 다룬다.[5] 원래 춘추 때 지금의 하남성 심구현(沈丘縣)에 있었던 소 제후국의 이름이었으나, 노희공(魯僖公) 18년 기원전 643년 노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후에 다시 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6] 다른 곳에서 사람을 죽여 오(吳)로 숨어들어 왔다.[7] 여기에 대해서는 항우가 워낙 힘이 장사라 적수가 없어서 굳이 칼을 사용하는 '스킬'까지 익힐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니면 현대의 중국 무술처럼 실전에서 불필요한 과도하게 많은 동작들을 오랜기간 익히게 하는 방식이라 실전을 추구하는 항우가 이런걸 더 배워봐야 인생낭비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8]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는 일. 가령 한국 곳곳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진흥왕이 순수하고 인증용 비석을 세운 것이다.[9] 유방은 비슷한 상황에서 "사내라면 저 정도는 해 봐야지!"라고 말했다.[10] 당시 한 척은 약 23cm이므로 지금으로 따지면 약 184cm 정도다. 저 때 항우는 거인이었다. 저 당시 성인남성의 평균 키를 155cm라고 가정해보았을 때(명나라 시절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55cm정도로 알려져 있으므로 기원전 2세기에는 더 작을 것이다.) 184cm인 항우가 약 1.187배가 큰 것인데, 이를 현재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 키인 173cm에 대입해보면 대략 205cm의 신장이 나오게 된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205cm인 남성보다도 훨씬 커 보였을 것이다.[11] 훗날 소하에게 몸보신의 계책을 귀띔해주었던 그 사람이다.[12] 송의는 제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항량은 교만해 있어서 장한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예측했는데 마침 이게 맞아떨어져 항량이 살해당했고 이를 제나라 사신이 초 회왕에게 말해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13] 후한 말의 계양 인근.[14] 원수가 된 장이는 항우의 결정으로 상산왕이 되었지만 진여는 왕이 되지 못했다.[15] 항우 본기에서는 공오(共敖)와 오예(吳芮)가 이 일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경포 열전에서는 영포가 부하를 시켜 죽인 것으로 나온다.[16] 패잔병들을 규합한 군대였으며 관영이 큰 활약을 했다.[17]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동북의 아성진(阿城鎭).[18] 본래 위표도 있었지만 주가와 종공에게 살해당했다.[19] 한왕 신이 흉노로 배신한 후 하는 말을 보면 이때 일이 상당히 괴로웠던 듯.[20] 지금의 하남성 공의시(鞏義市) 경내 서쪽 낙수(洛水) 서안에 있는 고을로, 중원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 중의 하나였다.[21] 특히 쇠뇌는 활보다 위력이 더 강하다.[22] 이상하게도 항우본기에선 광무 대치 즈음에 팽월에게 죽었다는 설공이 관영 열전에선 이때 관영에게 죽었다고 나온다.[23] 휴대성이 극히 떨어지는 죽간에 글을 쓰던 시기라 당시 한문은 최대한 간결하게 썼다. 그런 한문에서 똑같은 글자를 두 번씩이나 반복한 것은 집필자의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24] 참고로 강동은 후한 말기 오나라를 건국하는 손씨 일가가 자리를 잡아 개발의 시초가 되기 전까지 진짜 촌구석이었다. 정장이 강동은 협소하다고 한 표현에서부터 이를 알 수 있다. 이때 항우가 권유를 받아들여 강동으로 도주해 재기를 도모했을지라도 발달도 제대로 안 된 지역에서 예전만큼의 기반을 갖추는 건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해도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이전에 한나라가 그냥 놔둘 리가 없다. 당장 여기서도 강동의 백성은 수십만 규모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육가 왈 한나라의 군 하나 정도가 된다. 물론, 거기서 전쟁이 더 길어져서 국력 소모가 계속됐다면 중국은 정말 흉노에게 끝장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즉, 강동으로 가서 권토중래를 노린다는 것은 정말 항우에게나 유방에게나 뒤가 없는 선택이라는 것.[25] 항우 이전에도 패(覇)라는 칭호를 가지고 천하를 호령했던 이는 여러명 있었지만, 그들은 권력과 지위에 의지해서 패자가 되었지, 항우처럼 군사적 능력과 카리스마 만으로 천하를 제패한 이는 없었다.[26] 회계에서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송의를 참살하고 상장군이 됐을 때, 거록대전 때 등.[27] 그 한신조차도 마지막에 유방, 팽월, 영포 등 당대 최고의 명장들을 필두로 한 압도적인 수적 우세로 완벽한 다굴을 하기 전까지는, 항우를 상대로 이기지 못했다.[28] 본 문단의 맨 위 인용문에 나오는 표현.[29] 광무제가 이끄는 1만의 현한군이 43만의 신나라 군을 격파.[30] 중국은 일찍부터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고 거기에 대규모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화북 평야와 대량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빠른 도시화 덕분에 고대부터 만명 단위의 대규모 동원이 가능했는데, 이 때문에 중국의 명장들은 기동전 보다는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회전(會戰)과 공성전에 능한 타입들이 많다.[31] 실제로 항우와 싸운 유방의 경우도 소하를 위시한 훌륭한 장수와 관료들이 보급을 끊임없이 해줄 수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점은 더욱 더 대단한 것이다.[32] 해하 전투는 식량 때문에 패배한 전투가 아니다. 식량 등 보급이 아닌 전술적 상황이 너무나 불리했기 때문에 진 것.[33] 과장이 아니고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정말 '''항우의 패기에 제후들과 군중이 압도당해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항우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다.[34] 뒤늦게 용저에게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 막으라 했는데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더 빠른 시점에서도 20만까진 아니라도 대군을 보내 막을 수 있었단 소리다. 게다가 그 20만은 한신과 이 지역 군세에 참패하고 용저는 생포당한 뒤 참살당했다. 실제로 한신이 아직 제대로 점령/설득하지 못했을 초창기였으면 적어도 지역 전체를 상대하진 않았어도 됐으니 형편없이 참패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35] 몇번 만나서 부딪힌 적은 있었고 이 때마다 승리하긴 했지만 애초에 팽월은 항우와 만나면 직접 맞상대하지 않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 살아돌아갔기에 이 승리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36] 다만 이건 범증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는데, 범증은 성격이 상당히 괴팍하고 고집스러워서 홍문연때 반드시 유방을 죽이라고 몇번이나 우겼고 항우가 싫다함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밀어붙이려 했다. 물론 범증의 선구안이 결국 맞긴 했지만 이 당시 항우와 유방은 한나라 말기의 원소조조같이 압도적인 세력 차이를 가지고 역학관계가 굳어진 상태라 여기서 암습까지 해서 스스로 굽히고 들어오는 유방을 죽여버리면 민심과 유력자들의 신용을 잃는 건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이때 암살이 결국 실패하자 항우의 면전에 대놓고 "니 성격이 그렇게 아이같으니 결국 유방한테 잡혀 죽을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평소에 자기 역정을 못참는 인물이었다. 유방과 장량이 서로 자신을 굽히고 인정해서 별 불화가 없던 것과 정반대로 범증과 항우 둘 다 자기 성깔을 전혀 억제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진평은 원래 있던 갈등을 벌렸을 뿐이었다.[37] 사실 항량이 죽은 상황을 이용해 아첨한 송의를 총애하게 된 의제로 인해 허무하게 실권을 찬탈당하는 바람에 자기 집안이 일으킨 군대에서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하극상을 저지른다는 어이없는 상황을 돌파하며 시작부터 관계가 꼬였던데다, 나중엔 홍문연까지 저지른 마당이니 의제를 제거한 것 자체는 불가피했던 면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문제는 다들 보라고 왕들까지 동원해서 대놓고 의제를 죽여버리고 역적질을 벌이다보니 알아서 욕을 먹게 되었다는 것.[38]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항우가 모든 권력을 차지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미 명분만 남았을 뿐, 허수아비였던 의제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39] 유방이 출진할 때 한 노인이 의제의 죽음을 울면서 알리자 유방은 공분하여 의제의 제사를 지내고 자신이 의제의 후계자임을 공고히 했다. 또, 광무 대치 때도 유방은 의제를 살해한 사실을 두고 항우를 크게 꾸짖어서 한나라군의 사기를 높였다. 설마 유방이 의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그랬을리 없음에도 이런 정치적 쇼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세웠기 때문에 결국 민중과 선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항우를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40] 그리고 사실 이쪽이 진평의 원래 노림수였을 테고.[41] 진작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던 제나라가 초나라의 바로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후에 한신을 두려워하기도 했고, 누가 예측했을리야 없겠지만 항우가 떠난 뒤 곧바로 대기근이 관중을 휩쓸기도 했다.[42] 이 중 장이는 결국 유방에게 귀순하게 된다. 이후 한신과 함께 큰 공을 세워서 아들 장오가 공신 서열 3위에 임명받고 유방의 사위가 되는 등 크게 대우받았다.[43] 그나마 후술할 백기등 진나라가 잔혹한 행보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포로 학살의 경우였고 항우는 포로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학살했다. 그리고 학살은 최악의 짓이지만 도덕적 면모는 잠시 치워두고 말하자면, 그래도 백기는 학살을 통해 최소한 전략적인 이득이라도 취했다. 백기가 일으켰던 학살로 인해 조나라의 장정이 씨가 말라 더 이상 조나라가 진나라에 대항할 여력을 없앴기 때문. 하지만 항우가 저지른 학살은 본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백기는 죽기 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크게 반성했지만, 항우는 그런 것 없이 하늘 탓만 했다.[44] 초한전쟁 때는 주요 지도자가 대부분 피지배층 출신이라 백성들에게 밉보이면 바로 등을 돌려버린다. 비슷한 시기 제나라 전영이 이런 식으로 위기에 빠지자 백성들에게 바로 피살당한다.[45] 반면 함양 주민을 돌본 숙적 유방은 항우의 만행과 대비되어 훨씬 쉽게 민심을 얻게 된다. 즉, 항우의 큰 실책.[46] 다른 사서의 기록에서도 하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니다 보니 이민족들도 한고조에게 붙었을 정도다. 일례로, 광무대치 때 이민족의 장군 누번이 유방의 진영에 합류하여 욕설을 퍼붓던 항우군의 장수를 활로 사살했다는 말이 나온다.[47] 이는 500만 명만 남았다는 소리가 아니고, 행정에서 통계를 낼 수 있던 인구가 500만 명이라는 뜻이다. 물론 후의 인구 성장 속도를 고려해도 500만보다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48] 예를 들어 삼국지유비처럼 황실의 친족이라든가.[49] 초한전에서 군주의 곁에서 극을 쥐고 따르는 집극랑이라는 일종의 말단 경호원직에 앉혔다는 대목을 통해 대략적인 푸대접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50] 여기에는 원래 진평이 하는 일이 이간질 같은 구질구질한 일이니 '장 담그는 데 구더기 좀 묻을 수도 있지 뭘' 하는 식으로 유방이 배려해 주었다는 의견도 있다.[51] 유방 사후 여씨 천하가 된 한나라에서 여씨들을 축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들이 진평과 주발이다.[52] 정확히는 용저와.[53] 반대로 유방은 촉 땅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초 의제의 제사부터 지냈다. 이는 다른 제후들과 차별점을 두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이 초 의제의 후계자로서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해 버렸던 것이다. 사실 휘하의 하극상도 문제였겠지만 유방에게 명분을 준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초 의제를 시해하여 항우가 보게 된 가장 큰 피해일 것이다.[54] 항우가 도주 끝에 오강까지 도달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자살하는 순간까지 항우의 근거지인 강동은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팽월에게 점령당한 외항 등의 성들이 잠시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거야 당장 성 안에 있는 팽월에게 죽을 수는 없으니 나온 행동일 뿐이지, 완전히 항우에게 등을 돌려서는 아니었다.[55] 아예 '''''' 같다는 말을 들었다. 항우를 꺾고 천하를 잡은 황제에게 폭군이라고 에둘러 말한 셈.[56] 특히, 유방은 상스러운 언행과 몸가짐을 거리낌 없이 보였지만, 마찬가지로 남의 말을 듣고 좋은 점을 취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이 남들에게 무례한 욕설을 하듯 자기 밑의 부하들이 자신을 대놓고 까거나 독설을 날려도 이를 수긍하거나 웃어넘겨 내로남불이 없었다. 무엇보다 상벌이 정확했다. 실제로 유방은 평생 싫어한 옹치가 공을 세우자 그를 제후로 봉했고, 한신이 왕작을 달라는 주제넘은 요구를 해도 일단 들어줬다. 이런 행동들은 한군의 결정적인 균열을 막았다.[57] 실제로 정치적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군사와 관련된 능력이야 두말할것도 없고.[58]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로 이 구절이 논란의 원천이다. 동성에서 다시 오강으로 갔다가 강을 건너라는 정장의 말을 거절한 후 단신으로 적병 수백 명을 죽이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묘사하고는, 정작 죽은 곳은 동성이라는 모순된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59] 원래 '패'는 천자인 주나라 왕을 잘 섬긴 제후에게 주었던 칭호였다.[60] 출처: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289[61] 실제로 이 대사 후에 항우는 엄청난 무용을 보여주며 자신의 몇백배나 되는 군사들을 뚫고 오강까지 탈출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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