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숭인
柳崇仁
1565년(명종 20) ~ 1592년(선조 25)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관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2. 생애
유숭인은 1565년 아버지 유빈(柳濱)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6년에 홍원현감(洪原縣監)에 오르고 1587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다. 1592년 함안군수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성이 왜군에 포위당하자 관군 및 고을 백성을 규합하여 성을 지키고, 곽재우의 의병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왜적을 추격하여 적 47급을 베어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다시 휘하장병을 거느리고 진해에 이르러 당항포 해전에서 패하고, 밀려오는 왜적을 맞아 이순신과 협공하여 이를 무찔렀다. 이어서 금강을 따라 침입하는 적과 대항하여 직산현감 박의(朴誼)와 함께 격퇴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특진되었다. 그해 9월 24일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가배량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과 함께 창원에 주둔했으나 진주성으로 가는 일본군에게 밀려서 창원성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27일에는 창원성마저 넘어가자 김시민이 있는 진주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진주성에 도착했을 때 김시민이 성문을 여는 것을 거절했는데, 이는 김시민보다 더 상관인 유숭인이 성내로 들어오게되면 김시민이 짜놓은 계책이나 지휘 계통 등에 혼선이 생김을 염려함이였다. 결국 유숭인은 돌아가다가 일본군과 만나 교전 중 전사했다. 본인은 이런 김시민의 뜻을 알았다고 하며 이 이야기를 들은 곽재우는 "저런 인사가 진주성의 지휘관이 되었다니, 백성들에게는 복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진주성에 자신이 들어가면 정말 지휘체계에 문제가 생기고 더불어 중요한 길목 역할을 하는 진주성이 함락되면 조선의 위기이기도 해서 자신이 대신 희생한 셈이다. [1] 조선왕조실록 선조 경남일보 특별기획 진주성대첩 참조 바람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진주대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지라 출연한다. 배우는 김영선 씨.[2] 지원군으로 진주성에 왔지만 김시민이 지금 행군 중인 왜군들 때문에 성문을 열지 말라고 지시하자 서로 눈빛만으로 의도를 알아차리자 유숭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부하들에게 결사를 각오한 연설을 하고 돌격하다가 같이 전사한다.[3] 고증과는 다르지만, 진주성 전투가 당시에 엄청 치열했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부분.
[1] 종2품이었던 유숭인이 정3품이었던 김시민보다 상관이었으나 입성을 명령하지 않고 돌아간 것은 서로의 이해가 통했단 뜻이다. [2] 용의 눈물에서 공양왕을 연기했으며, 성우인 김영선과는 동명이인이다.[3] 이 때 연설의 모습을 보면 지금것 자신들을 따라와준 병사들에 대해 자랑스럽고 고마우면서도 그들이 겪을 운명에 대해 알기에 연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서글픈 분위기가 서려 있는 것이 압권. 그러나 병사들은 그럼에도 충성스럽게 받아들이며 적들을 향해 돌격해 모두 장렬히 쓰러지고, 유숭인 역시 총알을 맞고 수차례 칼에 베인 끝에 앞으로 쓰러져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