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忠武公 金時敏
충무공 김시민'''

[image]
충민사에 모셔진 김시민의 영정.[1]
'''시호'''
'''충무공(忠武公)'''
'''군호'''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본관'''
안동 김씨
'''이름'''
김시민(金時敏)
'''자'''
면오(勉吾)
'''출생'''
1554년 조선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2]#
'''사망'''
1592년 조선 경상도 진주 진주성
[image]
진주성 공원에 있는 김시민 장군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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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김방경의 12대손이다. 중훈대부(中訓大夫) 행 사헌부지평(行司憲府持平) 겸 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을 지낸 아버지 김충갑(金忠甲)과 참봉 이성춘(李成春)의 딸 창평 이씨(昌平 李氏) 사이에서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김시회(金時晦)·김시람(金時灠) 등 형 2명이, 아래로는 김시신(金時愼)·김시진(金時進) 등 동생 2명이 있었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8세 때 마을의 가축들에게 해를 입혔던 큰 뱀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국조인물고는 정조 때 편찬된 서적인데 정조 때에도 김시민 고향의 사람들 사이에서 "저곳이 바로 김시민 공께서 뱀을 쏜 곳이다"라는 소문이 구전되었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몸집도 크고 도량이 넓었으나 힘이 강한 것만 믿고 공부는 좀 덜 하면서 목소리만 크게 냈다는 식으로 평가받기도 했었다.
1578년 무과 훈련원시에 급제해 겸사복이 되었다.[2] 1583년에는 니탕개의 난에 참전했으며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대과)에 급제하여 전체 4등인 을과 3등에 합격하였기에 단숨에 품계를 건너뛰어 종6품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병조판서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건의한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직하고 낙향했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병조판서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격분한 김시민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발로 밟아 부수면서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받을 수 있는가!"라며 소리치고는 바로 벼슬을 던지고 물러갔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다혈질이고 남성적인 면이 매우 강한 천상 무인이었고 자존심도 매우 강했다.
이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군기시 판관이 되었고 1591년에는 진주판관에 제수되었다.

2. 임진왜란 초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군이 패주하자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달아나 은신했다. 그러다 이경은 병사하고 김시민만 남았다가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이 온다는 소식에 비로소 산에서 나와 김성일을 맞이했다. 당시 진주는 목사 이하 병사들이 다 도망가서 비어 있었다. 김성일은 김시민을 독려해 병사들을 모으고 방어 준비에 만전을 기하게 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어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 진해,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 의병장 이달, 홍의장군 곽재우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에서 재격파하여 고성, 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하였다.
거창의 사랑암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김시민은 진주목사로 취임하자 곧바로 염초 150여 근과 총통 70여 병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이어 9월에는 진해로 출격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행재소로 보내는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3] 이렇듯 임진왜란 초기의 행보를 보면 과감한 작전을 벌이는 모습을 종종 보였는데 위의 개인적 성격 역시 그의 전법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다.
김성일 막하에서 종군한 이로의 <용사일기>에 김시민이 거창에서 왜군을 격파할 무렵의 재미있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김성일이 진양의 수비를 김시민에게 맡겼지만 경상감사 김수의 구원 요청이 오자 김시민은 진양을 비우고 거창에 주둔하던 김수와 합류해 거창의 왜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앞장서서 싸우다가 그만 왼발에 총상을 입었다. 이 때 김성일은 진양을 지키고 있어야 할 김시민이 본인의 확인도 없이 성을 비우자 놀라서 김시민을 잡아오라고 시킨다. 당시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로써 경상도 일대의 군사를 총괄했기 때문에 그의 허락없이 임지를 이탈한 행동이니 문제가 있는 행동이며 김시민은 이미 한번 도망가 숨은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김성일 입장에서는 김시민이 임지를 비우고 도망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를 들은 김시민은 싸우다가 발을 다쳤다는 것을 핑계 삼아 가마를 타고 사람들에게 업혀 와 일부러 김성일 앞에서 다친 왼발을 까내어 보여주는 기행을 벌인다. 김성일은 가볍게 훈계만 하고 허락 없이 진양을 비운 일을 불문에 붙였다. 하지만 장수된 처지에 몸을 아끼지 않아 부상을 입은 저돌적인 행동이 결국 그의 목숨을 위협할 것을 예견하고 "시민의 정신이 어지러워졌으니 아마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이 곧잘 간과하는 사실인데 김성일은 이미 김시민과 비슷한 사람을 겪어본 적이 있는데 바로 홍의장군 곽재우. 이쪽도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과 전투 의지가 어마어마했고 윗사람에게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이라 자주 트러블을 일으켰다. 하지만 곽재우와 김시민에게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으니 전투 의지는 충만했으나 철저하게 계산하여 불리한 싸움은 최대한 회피하고 몸을 아꼈던 곽재우와 달리 김시민은 앞장서서 싸우는걸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3. 진주 대첩


1592년 10월 전라도 진공에 실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통해 전라도로 진공할 목적으로 나가오카와 하세가와가 이끄는 3만의 대군을 진주성으로 보내 진주성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것이 진주 대첩이다. 이에 김시민은 3800여 명의 병사로 10배에 가까운 3만 대군에 맞섰고 곽재우, 최경회 등의 의병들은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해 진주성에 힘을 보탰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는데 성 안의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수적으로 많았던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적의 탄환을 맞았고 곤양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은 이후 사경을 헤매다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4]

4. 사후


조정에서는 김시민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했지만 애석하게도 교서가 당도한 것은 김시민이 죽은 이후였다. 이후 김시민은 선무 2등공신에 제수되었고[5] 진주의 충민사에 배향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때 김시민의 선무공신첩은 일본인에게 팔려 영원히 보지 못할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에 사연이 소개된 뒤 전국민적인 성원에 힘입어 국내로 돌아왔다.
진주에서는 죽은 후에도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김시민이 전사하자 성 안에 울음소리가 천둥같았고 호남영남의 인사가 다 조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찌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김시민의 묘를 고향으로 이장할 때도 운구할 때 백성이 앞다투어 수레를 끌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 없었으면 우리가 죽은지 오랠 것입니다."라고 통곡했다고 한다.[6]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시민의 조카 김유가 진주를 지나게 되어 한 초가에 묵게 되었다. 김유가 김시민의 조카였음을 안 초가집의 노인이 자신이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김시민을 모셨다고 하며 김유의 손을 잡고는 "어찌 김 사또의 공적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진주시에서는 김시민의 시호를 따 경남진주혁신도시 지역의 이름을 충무공동이라 명명하였으며 충무공동과 상평동 사이를 흐르는 남강에 새로 사장교를 지어 김시민대교라고 하였다.
한편 일본은 김시민의 분전으로 인해 진주성 공략에 실패한 뒤 김시민에 대한 원한을 불태웠으나 김시민이 전사한 줄도 몰랐다. 이후 1593년 6월, 10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재침공하였다. 진주성은 일주일 동안 일본군 10만 대군을 상대로 버텨왔으나 함락되었고 다수의 장수들과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던 6만명 가량의 백성들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일본군 역시 다수가 전사하여 전력 소모가 매우 컸다.[7] 이때 일본군은 진주성을 지키던 진주 목사 서예원[8]을 잡아다 죽였는데 서예원을 김시민으로 착각하여 "목사(여기서는 김시민을 지칭)를 죽였다"라고 보고하며 서예원의 목을 본국에 보냈다고 한다.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에서 '''모쿠소 호간(木曽判官)'''이라는 괴물이 일본군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리지만 용맹한 일본 장수에게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게 되었다. 앞의 목증(木曽, もくそう)은 일본인들이 이름으로 착각한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이며 뒤의 판관(判官, はんがん)은 벼슬의 명칭이다. '모쿠소란 이름의 판관'이란 뜻. 목사가 목증이 된 이유는 김시민의 직책이었던 목사의 '사(使)'자가 16세기 한국어에서는 'ㅏ'가 아닌 아래아 발음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목사'와 '목소'의 중간 정도 되는 발음이었고 이렇게 '목사'를 접한 일본군이 이것을 '모쿠소'로 알아듣고 일본에 전하여 일본식 발음이 비슷한 한자인 曽(そう)으로 가차한 결과인 것이다. 그만큼 일본군은 김시민을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비슷한 예로 거북선을 복카이센 沐海潛(=목해선)이라는 괴물배로 부르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 배를 퇴치한다는 내용의 연극 또한 성행했다고 한다. 정작 고니시 유키나가는 거북선 때문에 굶어죽을 뻔 했다. 일본인들의 착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목을 베어 본국으로 가져온 적장이었다는 점이 모쿠소가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다시 말해 에도 시대 일본의 정신 승리 연극에서 일본군이 먼저 쳐들어온 침략 행위를 미화시키고 필사적으로 진주성을 지키는 김시민은 졸지에 악마가 된거다.김시민은 유명한데 이순신은 유명하지 않았다? 18세기에 일본에서는 지라이야라는 마법사 괴도를 다룬 소설이나 연극이 유행했는데 지라이야의 정체가 '조선의 악마 모쿠소 호간의 아들', 즉 김시민 장군의 아들이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일본을 침입한 요괴라는 소설까지 나왔다고 한다. 지라이야 재일설김시덕 교수의 글
아들이 없어서 형 김시회의 아들인 김치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었고 김득신이 바로 김시민의 손자다.
인조 때 도원수를 지낸 김시양(金時讓)은 김시민의 사촌 동생이다.
김시민의 묘지는 처음에는 충청북도 괴산군의 선산에 있었다가 충주 살미면 무릉리로 이장했다. 그러다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해서 1976년 현 위치인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이장하고 사당인 충민사를 세웠다. 본래 김시민의 위패는 진주의 충렬사에 배향했으나 고종 때 전국의 서원 및 사당을 철폐하면서 충렬사도 훼철하여 김시민의 숙부인 김제갑의 사당인 충열사에 합사했다가 충민사로 고쳐 세운 것.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5.1. 불멸의 이순신


배우는 정의갑[9] 변복(?)한 이순신이나 권율과 접선하여 책략을 짜는 등 지장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강조되어 묘사되었다. 본작 중에서는 진주성을 지킬 때 지원군을 끌고 온 유숭인을 성 안의 지휘체계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10] 들이지 않는 부분이 나오는데, 두 장수의 카리스마가 폭발한다. 두 장수는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뒤 극중에서 유숭인(김영선 분)은 적의 1/20도 되지 않는 군사로 닥돌을 감행했으나 결국 큰 피해를 입히진 못했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김시민''': "성문을 열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우병사 영감. 지금 성문을 열면 왜군은 물밀듯이 들이닥칠 것이오. 허면 진주성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적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외다."

'''유숭인''': "앞으로의 싸움이 꽤나 고단할 겝니다, 김 목사"'

'''김시민''': '우병사 영감...'

'''유숭인''': "우리의 분전이 진주성 사수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오이다." "무운을 빕니다."

실제 역사는 드라마에서 묘사된 모습의 이유가 아니였으나, 진주성 전투를 예고하는 장치로써 상관인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자기희생으로 매우 비장하게 각색하여 "삶과 죽음이 뒤엉킨 6일"이라는 예고에 걸맞도록 처절한 전투 장면을 예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진주 대첩은 불멸의 이순신 79회~80회에 걸쳐서 등장한다.[11] 김시민의 최후는 실제 역사와 꽤 다르게 묘사했다. 실제로는 저격당한 후 며칠간 사경을 헤매다가 순국을 하였으나, 드라마에서는 성벽을 넘어 쳐들어오는 적군을 진삼국무쌍마냥 막던 중에 저격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망 시기 또한 역사와는 다르게 일본군을 물리치고, 휘하 장수인 곤양군수 이광악에게서 승전 보고를 듣던 도중에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 것으로 표현됐다.

5.2.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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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 2: 조선의 반격에도 등장하는데, 시나리오상으로 조선의 반격은 임진왜란 한참 후의 시기이므로 원래는 죽었어야 할 사람이나, 영웅 수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죽은 김덕령과 함께 멀쩡히 등장하며,[12] 거의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명의 3시 진영을 초토화시키고 전사한다.
명의 이여송과 더불어 임진록 2 유이의 창장으로, 아이템인 흑철창을 장착할 경우 쐐기찌르기라는 기술을 사용하여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게 특징이다. 레벨업을 다한 김시민이 사용하는 흑철창은 근접 영웅이나 줄 법한 대미지를 원거리에서 주기 때문에 강력하다.[13] 그 이외엔 아무런 기술이 없으므로 순전히 몸빵용이라서 큰 인기는 없지만, 초반에 빨리 뽑을 수 있다는 점 외에 아예 개성이 없는 권율보다는 백배 낫긴 하다. 1차 진주성 전투를 지휘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주변 유닛들에게 주는 버프는 방어력 증가 버프다. 보통 방어력 버프는 마법계 영웅들이 주는 편인데 근접계 영웅이면서도 방어력 버프를 주는 꽤 이례적인 케이스.

5.3. 천하제일상 거상


초보자 퀘스트를 깨다 보면 김시민 고용권을 그냥 주기에 초보자들이 초반에 '''장수가 없을 때''' 사용하는 장수. 김시민의 기술인 연옥술 자체는 엄청나게 강력한 기술이였는데, 너프 먹고 소위 구멍 뚫린 연옥술로 바뀌면서 망한 케이스. 또다른 기술인 쐐기찌르기는 평타 기반 스킬이기에 한계가 뚜렷하고 신립 등의 더욱 강력한 평타 기반 장수에 밀려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김시민의 진가는 레벨 100이 넘어서야 발동하는데, 근처의 팀원들에게 마법 저항력을 증가시키는 패시브 스킬 '격려'가 발동된다(최초 마법 저항력 10%). 100 이후부터 레벨이 높아질 수록 마법저항력이 더욱 증가하기 때문에(최대레벨인 250레벨이 될 경우 마법저항력이 85%다! 3만원짜리 캐시템과 맞먹는 가격의 해왕갑옷이 40%란 것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저항력.) 후반에 굇수로부터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편이다. 주력장수가 아닌 보조장수로 쓰이는 편.
뒤늦게 패치된 김시민 2차는 신라시대 대장군 김유신으로, 스킬은 총 3개로 땅에 불이붙는 쐐기찌르기인 화염찌르기와 데미지가 높은 범위 마법인 회전창, 그리고 결정적으로 격려 패시브가 짤리지 않고 역시 가지고 있다. 주력 스킬인 회전창은 범위가 좁고 데미지가 불안정해 항우보다 안좋다고 하지만 신수 등등의 더욱 강력한 주력 용병을 갖게 되면 해고가 답인 항우에 비해 올체 찍고 패시브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김유신이 활용도가 더 높다. 그러나 회전창의 묘한 성능으로 인해 보통은 군모의창이나 현명창을 채워주고 그것을 이용해 레벨업을 하거나 올체찍고 쩔경 먹인다.

5.4. 징비록(드라마)


배우는 박정우. 28화에서 진주 대첩을 이끄는 모습이 나온다.

6. 여담


  • 유시민 작가의 "시민"이라는 이름은 유 작가의 아버지가 김시민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 추후 건조될 세종대왕급 구축함 Batch-II의 명칭에 충무공 김시민이라는 명칭을 쓰자는 제안이 경남도에서 나온 바 있다. 김시민 장군도 이순신 못지않게 훌륭한 인물이니 함명으로 쓰이는데 모자람이 없지만 문제는 해군에서 충무공은 예부터 이순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명칭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받아들여질지 의문. 게다가 충무공 이순신함도 이미 있다.
  • 이순신과도 공통점이 많다. 시호가 같은 충무라는 점, 패주하는 아군을 수습한 뒤 벌어진 대전투에서 승리한 점, 명장이라는 점, 승리가 코앞인 상황에서 적의 탄환에 의해 전사했다는 점 등이다.

7. 관련문서



[1]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2007년 1월 22일 표준영정을 바꾸기로 했다. 표준영정은 1977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인데, 김시민 장군은 사망할 당시 39세였지만, 영정은 나이가 많은 노인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영정은 각계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을 통해 다시 제작될 예정이다.[2] A B 1581년 부평부사가 됐다가 파직된 기록이 실록에 있지만 이는 동명이인일뿐이다. 이제 막 원시에 급제한 하급 무관에게 전국 40여개밖에 없는 큰 고을의 목민관을 임명할 리가 없다. 게다가 부사는 종3품관이 임명되었기에 품계상으로도 임명될리 만무하다. 현대로 따지면 청와대 경비대 신병이 짬 좀 먹었다고 시장에 임명시키는 것과 다름없다.[3] 하지만 진주성에서 전사한 뒤 상여가 함양에 이르렀을 때야 임명장이 도착해서 실제로 맡지는 못했다.[4] 임진록에서는 전투가 끝나고 군사들과 함께 사상자를 수습하고 있는데 죽은 척하고 엎드려 숨어있던 조총병 하나가 김시민의 이마를 쏘아 전사했다고 기록되었다. 아마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벽에서 적군의 시체를 바라보다 죽은 척하던 일본군에게 총을 맞은 황진의 오마쥬인듯.[5] 원균 따위가 1등공신이었다.[6] 인조 시대가 되어서야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순신노량 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백성들이 통곡을 하며 운구를 붙잡아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7]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10만 대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협박성 명령으로 인해 꾸려졌고 가토 기요마사, 타치바나 무네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구로다 나가마사 등 일본군의 적장 대부분이 모두 달려든 규모였음에도 함락에 일주일이 걸렸고 일본군도 진주성 장악 및 군사 재정비 이후 전라도 침공을 하지 못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다.[8] 서예원은 의병 도대장 김면의 중위장이다.[9] 전작 무인시대에서는 이의민의 개막장 아들인 이지영을 연기하였다.[10] 오늘날로 치면 김시민은 투스타인데, 유숭인은 쓰리스타라고 볼 수 있다.[11] 79회는 전투의 서막이고, 본격적인 전투는 80회에서 등장한다.[12] 이 게임의 시나리오는 조선이시다 미츠나리와 연합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공격한다는 허구의 스토리다. 자세한 건 임진록 2 문서를 보자.[13] 이 게임의 원거리 영웅들의 기본 공격력은 이령#s-1을 제외하곤 60인데, 근접 영웅의 기본 공격력은 조승훈을 제외하곤 100이다. 그런데 김시민이 흑철창을 끼면 기본 140 정도의 공격을 원거리에서 퍼붓는다는 말. 그 원거리 범위도 일반 궁수나 조총병보다 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