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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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트라키아 지방 출신의 병사로 시작하여 근위대장, 더 나아가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인물. 다만 문맹이었고 정치력이 부족하여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존하여 통치하였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450년에 현재 북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태어났고 트라키아식 이름인 이스토크로 불린 유스티누스는 10대 시절 고트족의 침공을 피해 콘스탄티노플로 피난을 떠났다. 전란의 와중에 누더기 옷과 빵 한 덩이 외의 재산을 챙겨오지 못한 그는 입대를 선택했고, 이것이 청년 유스티누스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다.
군대에 쉽게 적응한 유스티누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시절에 장군을 거쳐 늙은 황제가 사망할 무렵에는 코메스 엑스쿠비토룸, 즉 근위대장에 까지 이르렀다.
2.2. 즉위와 교회 통합
칠칠맞은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근위대장 유스티누스를 지목했고[1] 얼마 후 자연사하였다.[2] 유스티누스는 시민들에게 돈을 뿌리며 환심을 샀고, 518년에 시민의 환호 속에 즉위하였다.
평생을 병영에서 생활한 그는 학식이 부족하였고, 문맹에 가까웠다. 이에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자신의 조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3] 를 수도로 소환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 결정이 동로마 제국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당대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519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주도로 동로마 사절이 로마 교황청에 파견되었고,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레오 1세부터 끌어온 동서 교회의 대립인 아카키우스 대립이 종결되었다.
525년에는 조카가 서커스단 출신의 여자인 테오도라와의 결혼식을 합법화 하기 위해 고위 관리가 하층민 출신 여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법을 폐기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킬리키아 지방의 도시인 아나자르부스[4] 가 황제의 이름을 따서 유스티노폴리스라고 명명되었다.
2.3. 죽음
526년, 시리아에 지진이 발생하여 안티오크가 파괴되었다. 복구 사업을 지시하던 황제는 건강이 악화됨을 느꼈고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후계자로 결정한 후 527년 4월에 자연사 하였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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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일푼의 피난민 출신에서 시작하여 근위대장을 역임한 후, 황제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지만, 조카의 후광에 의해 묻히는 인물이다. 심지어 그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창시자라는 사실도 웬만한 서양사 애호가가 아닌 이상 비전공자들은 알지 못한다.
4.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다음날 아침 자신의 침실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했는데, 유스티누스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권)[2] 당시 88세 ![3] 누이의 아들, 즉 외조카라 성이 달랐다.[4] 현재 터키의 도시인 아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