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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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윤자영(尹滋英)
생몰
1894년 9월 13일 ~ 1938년 10월 14일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
본관
파평 윤씨
사망지
소련 노보시비르스크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청년운동과 고려공산당 가입
2.4.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와 국민대표회의
2.5. 공산주의 활동
2.6. 최후
3. 기타


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공산주의자로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200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윤자영은 1894년 9월 13일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파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그의 문중은 파평 윤씨 명은공파(冥隱公派)이며, 조부 윤계원(尹啓遠)은 가선대부 오위장을 지냈고, 부친 윤만박(尹晩鎛)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자식을 서울로 유학시킬 만큼의 여력은 되었고, 윤자영은 집안의 후원에 힘입어 서울로 상경했다. 그가 서울로 상경한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경한 시기는 대개 1913년 전후로 생각된다. 그는 서울로 상경한 뒤 경성공업전습소에 들어갔지만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자 중단하고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2.2. 3.1 운동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이 3.1운동의 계획단계에 참가하도록 주선한 이는 기독교청년회 총무 박희도였다. 박희도는 1919년 1월 27일 청년부 회원모집을 면목으로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과 김형기,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 송종의, 경성전수학교 학생 이공후 등 서울 시내 각 전문학교급 학생대표들을 모아놓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후 2월 12일과 14일 2차례에 걸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구내의 숙소에서 음악회 개최를 명목으로 모임이 열렸는데, 윤자영은 김원벽, 김형기, 김문진, 배동석, 한위건 등과 함께 서울 장로교회의 이갑성으로부터 여기에 초청되었다. 윤자영은 이 모임에서 경성전수학교 대표자격으로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해외독립운동의 정황과 민족대표의 동향, 동경 유학생들의 활동상을 전해들은 그는 국내 학생들의 참여 의욕을 결집시키는 작업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김성득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2월 20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회 학생간부회의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시위를 감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김성득, 김형기, 김문지, 김대우, 강기덕, 김원벽 등은 각 학교의 학생 참여에 관한 일체의 임무를 담당하기로 하는 반면에, 윤자영은 이용설, 한위건, 한창환 등과 함께 김성득을 비롯한 앞의 인물들이 구속될 경우 뒤처리와 2단계 투쟁을 맡기로 결의했다.
2월 24일에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확정되었고, 학생들도 이에 연합하여 독립시위운동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이 학생대표에게 전달되었다. 독립선언과 시위계획이 결정되자, 윤자영은 다른 학생대표들과 함께 천도교,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연합문제를 논의했다. 2월 25일 밤 정동예배당에 있는 이필주 목사 자택에서 준비 모임이 열렸고, 이 자리에서 3월 1일 정오에 탑골공원에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다음날인 2월 26일, 그들은 재차 같은 장소에 모여 계획 사항을 확인했다. 이후 윤자영은 3월 1일 당일에 김성득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에게 선언서 배포 임무를 수행하였고, 종로 부근에서 시위와 독립만세 제창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7월 만기 출소했다.

2.3. 청년운동과 고려공산당 가입


윤자영은 출소한 직후 청년운동에 뛰었다. 당시 서울에는 70개가 넘는 청년 모임이 있었지만 이렇다할 청년단체는 조직되지 않았다. 이에 청년들은 모임들을 하나로 묶어 단체를 구성하기로 했다. 윤자영은 이 움직임에 가담했고 조선청년연합회 기성회 집행위원 겸 지방부 위원을 맡았다. 이어 12월 2일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 서무부 상무위원을 맡았고, 제2차 정기회의 때는 교무부 상무위원을 맡았다. 또한 윤자영은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이끌어가기 위한 구심체를 구성하기 위해 서울청년회 조직에 나섰다. 그는 1921년 1월 27일에 이득년, 김한, 홍증식, 김사국, 이영, 장덕수, 김명식, 오상근, 한신교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를 조직했다.
이후 윤자영은 순회강연을 활발히 벌였다. 그는 1921년 6월 조선학생대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배재학생선후책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한 것을 시작으로 8월부터 전국순회강연에 나서 조치원, 연기, 청주, 창녕, 밀양, 양산, 울산, 부산 등을 순회했다. 그리고 9월8일 경남 창녕군 청년회관에서 ‘개조운동의 선구자’라는 주제로, 9월26일 울산청년회관에서 ‘청년운동의 제일보(第一步)’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21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도도한 웅변을 해 일반 청중에게 막대한 자극을 주고 갈채 속에 10시 반경 폐회했다"고 한다.
한편, 윤자영은 서울청년회 기관지 ‘아성’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1921년 3월부터 10월 사이 네 차례 간행된 이 잡지에 12편의 글을 게재했다. 이 시기, 그는 소야(蘇野), 소야((笑也), 'SY'라는 필명을 썼다. 일제측 자료엔 그의 성명이 윤소야(尹蘇野)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별명은 윤석한(尹石漢·尹錫漢), 호는 불가살(不可殺)이라 쓰여 있다. 그는 이러한 필명으로 '아성'에 시조 3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대산 바위틈에 소리 없이 흘러날 때

가랑잎에 길이 막혀 갈 곳 잃고 울던 물결

지금에 정강수(淨江水)되어 전로탄탄(前路坦坦)

정강수(淨江水) 흐르는 물 너의 기세 건장하다

천리장정(千里長程) 먼먼길에 몸살없이 왔다마는

가는 곳 대양(大洋)이어든 쉬지말고

대양이 어디메냐 너의 동경 유토피아

가다가도 길잃거든 내소리 곧 들을세라

참소리 내 소리 듣고 정로(正路)로만

또한 윤자영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는 출옥 직전인 1920년 6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사회혁명당에 가입했고 1921년 5월 해외 망명지에서 결성된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이 결성될 때에도 참여했다. 이 공산당은 같은 시기에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과 구별하기 위해 상해파 공산당이라고 불렸다. 1921년 3월, 그는 '아성' 1호에 '유물사관요령기(唯物史觀要領記)’를 기고했다. 이것은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서문에 나오는 사적유물론의 공식을 번역한 것인데, 이 번역문의 끝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이 자본가적 사회형태와 함께 인류 역사 전기가 종결을 고할 지니라.

윤자영은 부르주아 사회는 인류 역사 전기의 최종 단계이며, 그것 다음에는 인류 역사 후기가 도래한다는 미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일부로 이 구절을 끝에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그는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노동운동의 효시로 조직된 단체로, 윤자영은 61명으로 구성된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다.

2.4.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와 국민대표회의


윤자영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망명한 시기는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 사이로 추정된다. 그가 해외에서 활동한 첫 기록은 1922년 10월에 러시아의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서 확인된다. 당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검사위원회는 두 개의 파로 나뉘어 갈등을 벌이는 고려공산당의 완전 연합을 요구했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책임아래 연합중앙간부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열린 두 파의 통합대회에 위임장을 가진 참석자가 128명에 달했는데, 그중 상해파가 이동휘를 비롯해 68명으로 다소 우세했다. 윤자영은 이 모임에서 상해파 소속으로 마산지역 대표를 맡았다.
윤자영은 대회 의장으로서 의사 진행을 담당했고, 대회가 끝난 뒤 코민테른에 파견되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가 회의 결과에 반발해 치타에서 별도로 회의를 가지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코민테른은 베르흐네우진스크 통합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부인하고 해결책으로 조선문제위원회를 조직해 12월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해산을 명령하는 한편 극동부 산하에 꼬르뷰로를 설치했다. 꼬르뷰로는 상하이에서 열리게 된 국민대표회의에 양 파의 대표를 파견했으니, 상해파와 윤자영과 이르쿠츠크파의 장건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윤자영이 상하이에 도착한 시기는 대략 1923년 2월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국민대표회의에 경북지방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는 회의 시작 이후 개조파의 일원으로서 '시국결의안'을 제안하고 통과시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현실에 맞게 고치자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가 제시한 개조론의 기본 방향은 "피압박 민족들의 혁명운동과 우리 혁명가들의 단일전선 수립"을 목표로 삼아 임시정부를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윤자영은 상하이의 상황을 꼬르뷰로에게 보고하면서 신조직 건설론, 임시정부 개조론,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유지론의 세 파가 호각세로 대립하고 있으니 이것을 하나로 묶으려면 임시정부의 개조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알렸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이르쿠츠크파가 창조론으로 나아간 것과 정반대였으며, 따라서 그는 개조론을 성사시켜야 한는 부담을 안았다. 그는 임시의정원에 상해파 의원이었던 문시환을 통해 국민대표회의로 하여금 임시헌법을 개정할 수 있게 만들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가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끝내 흐지부지된 뒤, 윤자영은 꼬르뷰로로부터 국민대표회의의 실패를 초래한 원흉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이로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게는 "부르주아들의 모임인 임시정부를 옹호한 반동분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2.5. 공산주의 활동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윤자영은 상하이에 자리잡았고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3년 7월2일 그가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서 ‘임시헌법개정기초위원’에 임명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의지를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해 달성해보려고 했던 노력으로 생각된다. 그는 임시정부 의회활동에 참가하면서 줄곧 새로운‘통합회의체’ 또는 ‘대동단결체’ 조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던 1924년 1월 6일, 그는 동경 이중교(二重橋) 폭탄 투척 사건을 일으킨 의열단김지섭이 도쿄에 잠입하는 것을 도와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 하지만 윤자명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4년 4월5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팔선교(八仙橋)에 자리잡은 삼일당(三一堂)이란 교회에서 청년동맹회를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본 윤자영은 11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1924년 4월 5일, 윤자영은 상하이에 삼일당이란 교회에서 청년동맹회를 창립하고 11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청년동맹회는 좌우연합체였다. 주도자들은 “민족적 일치단합 아래 동포청년이 대동단결해 희생적 정신으로 사업에 당하면 반드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청년동맹회를 발의했다. 이후 그는 청년동맹회 상임위원을 맡아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청년동맹회 활동 이면에는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와 관련된 활동도 있다. 유명무실해진 꼬르뷰로를 대신하기 위해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가 결성됐는데, 이것이 오르그뷰로라 불리는 단체다. 윤자영은 이 단체에서도 지도적 인물로서 기관지 ‘거화(炬火)’의 편집을 담당했다.
그 후 1925년 8월부터 1926년 2월까지 상하이 대학에서 청강하던 윤자영은 국내에서 제1차 조선공산당 관련자 검거를 피해 상하이로 도피한 김찬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로 하고 1926년 만주 지린성으로 이동해 중국공산당 만주총국 설치 작업에 착수했다. 이후 윤자영은 5월 16일 상하이파 인물인 김하구와 함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결성해 착수했고, 화요파의 최원택, 조봉암, 김동명과 함께 만주총국을 설치하고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신병을 이유로 선임부장 직책을 사임했는데, 아마도 화요파에게 권력이 넘어가자 사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윤자영은 1927년 3월 모스크바로 갔다가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으며, 1927년 7월 용정에서 상하이파 공산주의자그룹인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던 1928년 코민테른이 <12월 테제>를 발표해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민족부르주아와의 결별’과 ‘일국일당제’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인사회주의자들은 독자적 혁명조직을 해체하고 중국 혁명조직에 가입해야 했다. 이동휘와 김규열은 12월 테제에 근거해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재건설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윤자영은 여기에 가담했다.
1929년 2월 말, 윤자명은 동지들과 함께 지린성 둔화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3월 둔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기관지 ‘볼셰비키’를 발행해 조선공산당 재조직문제·전술·조선혁명·토지문제 등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며 선전에 주력했고, 윤자영은 조직부를 담당했다. 1930년, 이들은 순차적으로 국내에 진입했다. 1월 책임자인 김철수가 먼저 입국했고, 5월부터 10월까지 윤자영, 안상훈, 송무영, 홍달수, 조덕진, 김일수 등 간부들이 속속 잠입했다. 이들의 목적은 국내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체 조직을 금지하고중국공산당에 입당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윤자영은 국내로 들어오자마자 미리 입국해 조직을 만든 김일수 아래에서 조직부 책임을 맡고 함흥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극동부를 통해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해체 명령을 내리자, 윤자영은 "이는 비공식적인 것"이니 공식적인 해체 명령이 있을 때까지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극동부가 "그랬다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며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를 해산해야 했다.

2.6. 최후


1931년 12월 일제 경찰의 수사를 피해 북간도로 탈출한 윤자영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주특별위원회 선전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인 1932년 9월 26일,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특별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정일영(丁一英)이라는 당명(黨名)으로 작성된 이 문서에서, 그는 이론적·정치적 훈련을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협력해 줄것을 요청했다. 국제레닌대학은 각국 공산당 중앙간부들의 교육·훈련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국제레닌대학 입학 청원은 거절당했고, 대신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이 허용되었다.
1934년, 윤자영은 당시 반당분자로 낙인찍힌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동조자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수년간 수감되었다가 1938년 10월 2일 노보시비르스크주 내무인민위원회로부터 총살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14일 총살되었다. 향년 44세.

3. 기타


그는 1958년 12월 19일에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윤자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