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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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의열단 소속
본관
풍산 김씨[1]
출생
1884년 7월 21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북면 오미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2]
사망
1928년 2월 20일 (향년 43세)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4년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3]#에서 아버지 김병규(金秉奎)와 어머니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의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어서 일본어를 1달만에 익혀 상주공립보통학교(현 상주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독학으로 금산지방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채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하여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의열단에 가입해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제 주요 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피신했다.
이후 의열단은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 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으로 보냈다. 덧붙여서 김지섭이 의열단에 가입할 때 의열단원들 사이에서 "일제가 보낸 스파이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았다고한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경로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4]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 운반선 '덴조야마마루'를 통해 1923년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게 되는데 12월 31일 덴조야마마루는 일본 후쿠오카현 야와타 제철소에 도착했다. 10일간 배 밑의 창고에서 지내며 하루에 주먹밥 1~2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데다가 자금마저 녹록치 않아 교토 야와타시(市) 여관에서 1월 3일까지 머무르다가 도쿄로 출발했다. 그러나 도쿄로 출발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제국 의회'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 밀항인 신분인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 의회'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황거(천황의 궁성)로 바꾸게 된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충격을 받고 목숨바쳐 의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24년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천황이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二重橋)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5][6]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체포된다. 이후 검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1927년 10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8년 2월 22일 옥 중에서 병사해 45세로 순국했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 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촉도(蜀道, 중국 사천성 촉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보다 험하고 태나라보다 더욱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독립운동가 김지섭 의사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순국하기 전에 쓴 이다.

3. 여담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이지만 이름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유는 김지섭 의사의 의거를 일본 정부에서 묻었기 때문. 천황을 신성시하던 당시 일본에서 이런 습격은 고위층 수십 명의 옷을 벗길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건이다.[7] 실제로도 사건 이후 내무차관 스카모토가 책임을 추궁당했으며 교토 지방의 경시총감과 경찰부장이 파면당하는 여파가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다른 의열단원들과는 다르게 천황 암살 "미수"에 그쳤기 때문이다.
김지섭의 묘소는 처음에는 일제가 화장해버린 유골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매장했다가 이후 이장해서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 있다. 현재 이 묘는 예천청주정씨재실(유형문화재 제315호), 대지재사(유형문화재 제173호)와 함께 '감자'라는 프로젝트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감자는 생전 김지섭의 별명으로 김지섭의 김지를 잘못 읽어 감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의열단원들은 모두 그를 감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세 다쓰지가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고 한다. 그는 "김지섭은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역사 과목의 시험에서 비중있게 다룬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열단원 김지섭을 무시하던 수강생들에게 최태성 강사가 쓴소리를 했다. 덕분에 수강생들이 김지섭에 대하여 각인하게 되는 순기능도 있는 듯. 오죽하면 '최태성 강의 듣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저 썰이다.', '최태성 강의 듣고 김지섭 문제 틀리면 사람 아니다.'라든가... 사실 그 이전에 어쩌다 어른에서도 이 일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1] 27세 섭(燮) 항렬.[2] 풍산 김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재봉·김만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풍산 김씨 집성촌이다.[4] 아편코카인밀수하는 일본인으로 가장했다고 한다.[5]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의 창고에서 숨어 있었다.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10일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이 습기를 먹게 되었기 때문에 불발탄이 났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나머지 2개는 안전핀도 안 뽑고 던졌다고 한다.[6] 자료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는 어떻게 한인애국단 제1호가 되었는가」의 저자 배경식이 기재한 당시 자료에 따르면 불발되었다고 알려진 수류탄 중에 안전핀을 뽑지도 않고 던진 것도 있다고 한다.(해당 각주는 5번 각주에서 안 터진 수류탄이 전부 습기를 먹은 탓이라고 서술되어 있을 때에 작성되었다)[7] 1932년 이봉창이 쇼와 천황을 습격했을 때는 도심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졌기 때문에 묻을 수 없었고 실제로 고위층 수십 명이 책임을 통감하며 옷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