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전투
1. 개요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한 한국전쟁 초기에 의정부시 정면을 방어하던 국군 (구)수도사단(제7사단)과 증원된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3사단과 제4사단 그리고 제105전차여단의 침공을 받아 치른 방어전투.
2. 배경
북한군은 동두천과 포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에 주공 군단인 제1군단을 투입하여 1950년 6월 26일까지 서울과 한강교를 점령하고 한강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격멸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제1군단은 동두천∼의정부 축선에 제4사단과 1개 전차 대대, 포천∼의정부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하였다. 그리고 제2제대로 제13사단과 제15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제2제대까지 포함하여 이 지역의 전체 북한군 병력은 4만 8000명을 상회하였다.
한편 이 당시 일대의 38선 경비는 (구)수도사단, 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맡고 있었는데, 서쪽 동두천은 제1연대가, 동쪽의 포천 방면은 제9연대가 담당하고 3연대는 예비대로 이들의 후방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단예비인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중인 제2사단 제25연대가 배속되어 6월 15일까지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제25연대는 병영 문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도 오지 못한 채 경상도 빨치산이나 소탕하고 있었고, 그렇게 (구)수도사단은 예비연대가 없는 상태와 주말 외출·외박으로 인해 4,500여 명만이 부대에 잔류한 채 6·25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3. 전투 전 상황 (동두천 ~ 포천 전투)
북한군은 공격 첫날 의정부를 장악할 계획이었다.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4사단은 제16연대를 전곡 남방의 사라동에 전개시키고 제18연대를 아미리에 전개시켜 전선돌파를 시도했다. 이 때 제16연대가 전곡에서 한탄강을 건너 초성리 방향으로, 제18연대가 동이리 부근에서 임진강을 건너 도감포∼화방촌 간의 소로를 따라, 그리고 제107전차연대의 전차들이 3번 도로를 따라 초성역 쪽으로 공격해 옴으로서 동두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공격으로 동두천 경계를 담당했던 제1연대 2대대가 3시간 만에 와해되었다. 그러나 제1연대는 휴가 및 외박 등으로 인한 병력 부족, 그리고 성능이 뒤떨어지는 무기 및 장비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까지 동두천을 지켜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후 더욱 격렬해지는 북한군의 보병·전차·포병 협동공격에 밀려 동두천을 포기하고 이날 22시경 덕정으로 철수하였다. 덕정초등학교에 집결한 제1연대 병력은 약 70%정도로 감소한 상태였으며, 이곳에서 재편성과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한편 포천 전방을 지키던 국군 9연대 2대대도 북한군 제3사단 제7연대를 맞이함으로서 포천 전투가 시작되었고, 뒤따르던 북한 9연대는 7연대가 정면 공격을 하는 사이 서쪽 영송리~가양리 방면을 타고 87번 국도로 포천까지 우회 진격해 9연대 주력을 포위, 측방에서 급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2대대의 저항이 거세자 이 계획이 틀어져 버렸고, 이 틈을 타 제9연대의 나머지 대대는 가랑산과 천주산으로 저항선을 옮겼다. 그러나 이조차도 전차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어 17시 경에 태릉과 퇴계원읍 등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육군본부는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조기에 방지하기 위해 의정부를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결의로 서울 부근에 주둔한 부대 뿐만 아니라 후방에 있는 부대들도 의정부 일대에 집중 투입하기로 해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와 제18연대, 포병학교 소속의 2개 대전차중대와 기갑연대의 장갑소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대를 비롯하여 대전의 제2사단, 대구의 제3사단, 광주의 제5사단이 황급히 출동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너무도 긴박했기 때문에 후방지역의 부대들은 완전편성을 갖추지 못한 채 대대단위로 각각 출발하였고, 서울에 도착한 각각의 단위부대들도 후속하는 본대와 합류하지 못한 상태로 전선에 축차투입돼 3연대를 시작으로 차례대로 얻어맞았고, 북한군은 이들을 유린하며 의정부로 밀려들었다.
4. 전투 경과
이렇게 의정부 북쪽이 유린당하는 동안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에게 (적에게 탈취된) 동두천과 포천을 탈환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노도와도 같았던 북한군의 기세를 생각하면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음에도 제7사단은 5개 대대(수습된 1연대 2개 대대, 3연대 2대대, 18연대 2개 대대), 그리고 제2사단은 5연대 2개 대대를 수습해 재탈환 공세를 준비한다.
6월 26일 새벽 3시 제2사단이 먼저 포천을 향한 공세를 시작하며 축석령의 3연대와 합류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그곳엔 적 전차들만이 기다리고 있어서 쫓기듯 퇴계원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뒤이어 16연대 2개 대대가 출동해 지연전을 펼쳤으나 1대대 특공대가 로켓포로 선두 전차를 집중 공격해 진격을 잠시 멈추는 정도에 그쳤다.
한편 제7사단은 오전 8시에 1연대는 동두천, 18연대는 양주군 신산리를 향해 반격을 시작했고, 1연대는 놀랍게도 동두천-소요산까지 진출하였으나 18연대는 신산리 북동쪽 봉암리 부근에서 적과 접전 중에 와해되었다.
그러나 포천을 맡은 제2사단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짐으로서 동두천에 진입한 부대들은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따라서 이들은 분산·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같이 다급한 상황에서 의정부 북쪽 금오리에 포진한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제2포대장 장세풍 대위 등과 함께 105mm 곡사포로 북한군의 전차를 공격해 무한궤도를 파괴했으나, 후속 포탄 장전 도중 다른 전차의 공격으로 2포대장, 6번포대원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오후 1시 북한군 전차대가 의정부 시내에 진입했고, 이 시기 열차로 이동해온 2사단 25연대는 의정부 남쪽 백석천에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 5시 전차 20여대를 앞세운 북한군 행렬을 맞이하나,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멋대로 사격을 하는 바람에 위치가 발각되었고, 북한 전차들은 멀리서부터 국군 진지들을 유린하며 백석교를 건넜다. 한편 백석교 밑에 숨어있던 대전차 분대장은 다섯번째 전차가 교량을 건널 무렵 이를 파괴해 길막에 성공하나, 후속 전차의 포격에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그래도 이로 인해 북한 전차들의 진격로가 막혀, 후속 전차들은 의정부로 되돌아갔고 선두 전차 4대는 16연대 2대대를 상대하고 후속 부대를 기다리다 이날 밤 25연대 11중대 특공대에 의해 2대 가량을 손실한다.
6월 27일 재개된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25연대 장병들이 분투하나, 탄약 부족으로 와해됨으로서 의정부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됐다.
5. 결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자 그 영향은 문산 방면의 제1사단, 춘천 방면의 제6사단, 동해안 방면의 제8사단에게 후방이 돌파, 특히 수도 서울이 함락될 수 있다는 전술적·심리적 충격을 주어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철수하게끔 만들었다.
한편 포천 전투에서 살아남은 7사단 9연대 1대대원들은 태릉의 사관생도들과 합류해 내촌-태릉 전투를 치룬다.
이후 (구)수도사단은 서울 함락을 계기로 해체되었고, 수경사가 재편된 신생 사단에게 1연대와 '수도' 명칭을 물려준 뒤 낙동강 전선에서 7사단으로 재창설된다.
6. 참고 자료
- 『6·25전쟁 60대전투』(온창일 외, 2010)
- 『알아봅시다 6·25전쟁』(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 『6·25전쟁사: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2(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