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第二步兵師團''''''
'''The 2nd Infantry Division'''
[image]
'''창설일'''
1949년 12월 1일
'''해체일'''
2019년 12월 6일
'''상징명칭'''
'''노도부대'''
'''소속'''
[image]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3군단
'''규모'''
사단
'''역할'''
양구군, 인제군 지역 일대를 수색 및 경계
'''초대 사단장'''
예) 대장 이형근 (군사영어 1기)
'''해체 전 사단장'''
소장 장광선 (3사 25기)
'''위치'''
강원도 양구군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초창기 (해방정국 및 한국전쟁 당시)
3.2. 독수리 유격대 사건 (1950년 말~1951년 초)
3.3. 산악사단 전환기와 스키부대 (대한민국 제3공화국)
3.4.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대항군 역할 (2001~2003년)
3.5. 제2신속대응사단(가칭) 개편 (2018년~2019년)
4. 보병사단 시절 예하부대
4.1. 사단 직할대
4.5. 포병연대
5. 출신인물
5.2. 장교/부사관
5.3. 병
6. 기타
6.1. 근무환경
6.4. 사단가
7. 사건사고
8. 여담
9. 관련문서


육군태동의 근원을 나타내는 생성원리
一心, 시작과 끝이없는 무궁한 발전과 생동하는 부대 상징
4개 원
조국을 짊어지고 나가는 수레바퀴
외부청색원
견고한 단결을 바탕으로 애국정신 함양, 조국수호
백색원
자유, 평화, 정의를 사랑하는 백의민족
내부청색원
청년의 기백과 용사의 기상을 바탕으로 한 성난 파도
적색원
태양처럼 뜨거운 노도용사의 정열과 애국충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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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7년 12월 1일 창설하여 휴전 후 강원도 양구군, 인제군에 주둔했었던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 소속 보병사단. 별칭은 '''노도'''(怒濤, 성날 노, 물결 도).
국방개혁 2.0에 따라 2019년 12월 6일 공정사단 개념의 제2신속대응사단으로 재편하기 위해 해체되었으며,# 예하부대와 소속 장병들은 같은 3군단 소속인 12, 21사단에 합병되었다.

2. 상세


보병사단 시절 주둔했던 곳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그래도 양구보단 나으리'''로 유명한 인제, 원통, 양구에 모두 걸쳐있었다. 그래서 2사단 주둔지에 대해 12사단, 21사단, 2사단 전역, 관계자들 의견이 제각기 다 다르며, 심지어 이 사단 중 누가 더 빡센가로 병림픽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메이커 사단임에도 전방 철책 근무를 하지 않고 제3군단 예비대로 후방에서 굴렀는데, 산악전과 대침투작전 숙련도를 올린다며 계획된 훈련은 어떻게든 해치우고, 이것도 모자라서 이런저런 명분거리를 가져와서 훈련을 추가로 뛰었다. 일례로 북한이 무슨 도발을 했다, 아니면 옆동네 같은 예비대인 제27보병사단이 훈련을 빡시게 했으니 우리도 질 수 없다, 아니면 누군가 '강한 군대' 드립을 쳤으니 이를 증명해 보이겠다며 기본 3박 4일 정도의 훈련을 잡고 뛰었다.
하여간 그래선지 보병 사단들 중 가장 많은 훈련을 행하는 축에 드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군생활 중 훈련 일수를 계산해보면 대략 15일에 한 번 꼴로 훈련이 있을 정도. 특히 산악 행군과 산악 구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혹한기 훈련을 뛰어 보면 제대 후 한동안은 웬만한 추위에 끄덕 없게 된다.
훈련이 힘들고 자주 있는 만큼 전투력 또한 매우 높은 정예 사단이다. 참고로 예전 팀 스피리트 훈련 최다 참가 부대. 기본적으로 전투력 약한 부대를 한국군 대표로 보낼리가 없다. 그리고 옆에 주둔한 모 사단 연대들과의 연대 전투단 훈련에서 거의 항상 우위를 차지 한다. 2사단의 32연대 수색중대(사단 수색대도 아니고 연대 수색중대가)는 옆 화천 모사단의 지휘통제실(대대나 연대도 아니고 사단 지휘통제실!!)을 턴적도 있었다. 군생활 중 삽보다 총을 더 많이 들었다고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부대 중 하나.
참고로 민간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부대이기도 하다. 임팩트 없는 부대명과 마크로 인해 간부가 아닌 의무복무자들은 군대를 나왔음에도 잘 알지 못하기도 하는 부대. 복무 난이도는 차치하더라도 방패, 백골, 열쇠, 청성, 오뚜기, 백마 등의 특색과 특이함에 비교하면 양궁 과녁같이 단순한 마크와 노도라는 사회에서 생소한 단어 명칭은 아무래도 각인이 쉽지 않은게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간부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복무 여건이 빡센 만큼 진급도 잘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별 따는 코스 중 하나라고. 그 덕분에 후에 장군이 되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특전사에서 복무하던 간부들이 꽤나 많이 거쳐가기도 한다. 2사단장을 역임한 이순진 장군은 육군3사관학교 출신 최초로 합동참모의장에 오르기도 했다. 어느 예하부대 이등병이 취사장 선임하사(?!)의 가슴에 달린 박쥐 뱃지에 노란 별이 세개가 달려있어서 멋있다고만 생각했더니 그 의미를 알게되고나서 흠좀무 했다는... 실제로 월계관에 노란 별이 세개있는 공수 휘장이면 강하 회수 300회 이상이다. 한편, 예비군 훈련을 가보면 별로 안보인다. 여튼 그렇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면서 역사가 길고 빡센 부대.

3. 역사



3.1. 초창기 (해방정국 및 한국전쟁 당시)


1947년 12월 1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제2여단을 모체로, 제2연대, 제3연대, 제4연대를 기간으로 대전에서 원용덕 대령을 초대 여단장으로 창설하여 1948년 여순반란 사건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1949년 5월 12일 유승열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제2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여순사건 진압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기세가 성난 파도와 같다고 하여 노도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1950년 7월 25일 대구지구 방어사령부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5연대, 16연대, 26연대 구성으로 의정부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예하부대가 도착하는 족족 의정부 전선에 축차투입하는 바람에 궤멸. 결국, 7월 24일에 사단이 해체되고 만다.
이후 1950년 11월 17일, 2사단은 서울 성동공업중학교(현 성동공업고등학교, 광희중학교)에서 17연대, 31연대, 32연대로 재편성되었으며, 이 중 17연대는 개전 초기 백인엽 연대장이 지휘 하에 옹진반도 전투, 청주 전투를 치룬 뒤 독립연대로 남아있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육본 및 1군단 직할을 왔다갔다 했다. 그 후 9월 중순 대한민국 육군 중 유일하게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그 뒤 1951년 5월 16일 용문산 전투의 뒤풀이인 파로호 전투, 9월 1일 강원 김화군 전선을 담당하다 1952년 10월 14일 저격능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1953년도에 제1야전군에 배속되었고, 화살머리고지 전투 2차전을 치루기도 했다.
1959년 8월 28일에 양구 일대로 이동한 뒤 이후 1968년 11월 울진ㆍ삼척지구 대침투작전, 1996년 9월 강릉 대침투작전 등 10여 차례 이상 대간첩작전을 수행하였다.

3.2. 독수리 유격대 사건 (1950년 말~1951년 초)


참고로 1950년 11월 사단 재편 과정에서 32연대가 창설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17연대 1대대 부대대장으로 있던 김영필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 후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출갈 때 그동안 정들었던 1대대 예하의 독수리유격대원들을 함께 데리고 가려 했다. 이 독수리 유격대원들은 1950년 10월 포천 신읍에서 최종성과 최종철 형제를 포함한 63명으로 결성되었다.
하지만 예나저나 유격전을 할 정도면 정예 병력이기에 1대대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고, 이에 김영필 3대대장은 유격대가 있는 매복지까지 트럭을 몰래 추진해 기어이 빼내는 월권을 저지르고 말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유창훈 1대대장은 김영필 3대대장에게 그들을 원대복귀시키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김영필 3대대장은 "이들은 본디 민간인이기에 특정 부대에 예속될 이유가 없고, 유격대원들 또한 3대대에 있기를 희망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나 '군법회의에 소환하겠다'며 위협이 이어지자 김영필 대대장은 마지못해 유격대원들을 종용시키지만, 이에 유격대원들은 "우리가 너희들 장난감인줄 아느냐? 17연대고, 32연대고 다 필요 없다. 태백산으로 들어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펴겠다."며 반발했다. 그래도 김영필 대대장의 간곡한 설득에 마지못해 트럭에 올라타 원대복귀했다.
하지만 이 앙금은 그 뒤에도 남아 51년 2월 5일 밤 10시경, 17연대 1대대로 복귀한 유격대원들은 군장을 풀어놓고 저녁 식사를 위해 집합하려 했는데 무장 현역들에게 포위당한 뒤 도망병(!)이라는 이유로 창고에 감금되었고, 유격대장 최종성을 포함한 5명의 간부가 정보과로 끌려가 탈영의 책임을 지고 대원들에게 "여기서 절대 무너지지 말고, 여기서 받아주지 않으면 김영필에게 가라"는 등 마지막 당부를 남긴 뒤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끝으로 총살된다. 게다가 남은 대원들조차 '''부정한 놈들이라며 팬티 차림으로 중공군이 있는 적지로 추방당했다.''' 그 뒤 칼바람을 피해 골짜기에 모인 유격대원들은 연장자인 김익수 소대장이 "이렇게 된 건 김영필의 책임이니 그를 찾아가자" 며 주장해 어찌어지 32연대 3대대에 합류, 이후 경북 지역에 숨어든 북한군 10사단 유격대와 접전을 펼치다 전쟁 후반기엔 고지 쟁탈전에도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군번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기에 휴전 후 민간인 부대는 해체하라는 국방부령에 따라 해체 수순을 밟았고, 소속 장병들은 현지 입대(소속 변경)를 하거나 귀향했다. 하지만 적전도주로 국군에게 총살당했다는 오명은 여전히 이들에게 꼬리표로 붙어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그나마 뒤늦게나마 국방부 조사가 들어가 그 꼴을 당하고도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점이 입증돼 명예복구와 더불어 16명의 위패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봉안되었다. 또한 생존 독수리유격대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현재도 32연대 창설기념일이면 32연대와 3대대를 방문해 당시를 되새기며 부대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후술할 국방개혁으로 32연대가 2019년 말 해체되었기에 이제는 관계자들의 모임으로 치뤄질 가능성이 높다.

3.3. 산악사단 전환기와 스키부대 (대한민국 제3공화국)


그 뒤 1967년 국방부육군의 3개 사단을 각각 특정한 전투환경과 작전에 적합하도록 전문화/특화시키는 특성화 사단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중 제2사단은 산악사단으로 선정되어 1968년 1월 23일부로 당시의 미 육군 제10산악사단을 벤치마킹하여 산악전투에 특화된 산악사단으로 전환한 적이 있었다. 이외에 육군 제11사단은 상륙사단으로, 제5보병사단은 공정사단이 되었다. 이를 위한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1967년 12월에 2사단 수색대가 산악사단의 스키훈련 부대로 지정되어 진부령의 흘리 스키장에서 설한지 스키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로써 1961년부터 한국군 최초로 전투용 스키훈련을 시작한 육군 특전사에 이어 육군 2사단 직할 수색대대가 '''국군에서 두 번째로 전투용 스키훈련을 실시한 부대'''가 되었다.# 한편 세 번째는 1970년 1월부터 스키훈련을 시작한 해병수색대이다.
참고로 과거엔 이런 전투부대용 스키부대가 아닌 체육부대 개념의 스키부대도 있었는데 민간 스키선수들이 입대해서 군생활 동안 스키훈련을 하고 국내외의 스키대회에도 참가하였다. 육군의 스키체육부대는 1958년 3군단 직할로 창설됐었다. 과거엔 스키체육부대 뿐 아니라 축구와 야구체육부대 등도 각 군마다 존재했었다. 그러다가 체육인에 대한 체계적 훈련/관리를 위해 통합된 국군체육부대(상무)가 생기면서 각 군 별 체육부대들은 없어졌다.
이 육군 특화사단 체제는 2년도 못가서 운용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2사단도 산악사단에서 도로 일반보병사단으로 원위치됐지만, 2사단 예하 부대의 스키훈련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976년부터는 32연대 3대대에 스키대대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32연대의 3대대는 특수부대/수색부대가 아닌 대한민국 국군의 일반 보병부대 중에선 유일한 스키훈련 부대가 되었다. 그후 겨울철 혹한과 갖은 악조건 속에서 노르딕 스키 활강과 스키를 이용한 전술훈련 등을 했다. 이 32연대 3대대는 국군의날 행사에도 참가하여 그 위용을 나타내었는데, 그 첫 번째 참가 행사로 예정됐었던 1976년은 8.18 판문점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한 비상 발령으로 행사연습 도중 참여가 무산되었고, 이후 1977년 건군 29주년과 1978년 건군 30주년, 그리고 1981년 건군 33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 분열/행진 부대로 참가했다.
노도부대의 스키부대 임무는 1981년 건군 33주년 국군의 날 행사를 끝으로 그 임무가 해제되었고, 그 후로는 육군의 스키훈련 임무가 특전사 한 곳으로 일원화되었다.

3.4.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대항군 역할 (2001~2003년)


2001~03년까지 32연대 3대대가 중대급 KCTC 대항군 부대 역할을 수행하였다.[2] 물론 대대 전체가 간 건 아니고 5개 중대 중 전투중대 2개 + 본부중대 일부가 일정 주기로 KCTC 훈련장에 나가 있고, 대대에 잔류한 나머지 절반의 인원들은 경계근무불침번, 행정업무도 절반의 병력으로 수행하여야 했다. 물론 이는 대항군 훈련장에 나가있는 인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신 KCTC 자체가 훈련인 만큼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연간 훈련에서는 모두 제외되었으나(유격은 제외되었으나 혹한기는 뛰었다.) 대대 인원이 반토막 난 만큼 대대원들은 말이 안나오게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투입 전 전문 대항군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대항군 훈련은 물론, 훈련이 없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대항군들은 삽과 곡괭이, 톱 등을 들고 작업해야 했으나 상술했듯 절반의 인원으로 이를 소화해야 했으니 그 고초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KCTC 훈련장에 나가있던 장병들은 딱히 좋았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일단 숲 속 한복판에 조성된 숙영지는 각 소대원들이 부대끼는 24인용 텐트(및 부속 텐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급조된 화장실과 천장이 뚫린 샤워장에서 볼 일을 해결했다. 심지어 설거지도 개울가에서 해결해 전반적으로 마치 월남전에서나 볼 법한 원시적인 생활을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대대장, 주임원사가 숙영지까지 잘 드나들지 않았고, 간부들의 터치도 적어 옷차림, 이동군기 등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게다가 훈련, 교육, 작업 모두 없는 날은 자유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우기엔 물골(배수로)작업하고, 맑은 날은 총기손질이나 마일즈 영점 맞추고는 했다. 게다가 먼저 훈련나간 옆 중대가 거지꼴로 돌아오면 동정심과 더불어 다음은 우리 차례라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래도 3대대 대항군의 전투력은 현재의 KCTC 전갈부대의 전투 능력만큼 타부대를 압도했는데, 이는 훈련을 하러 오는 부대에 비해 대항군이 지형적으로나 훈련 횟수로나, 경험으로나 당연히 앞설 수밖에 없기 때문. 그래서 2003년 대항군 대대에서 일반 대대로 환원되기까지의 2년간 전적은 무패(648전 648승)라고 한다.
심지어 포병까지 전군 최초로 KCTC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여간 덕분에 여기 참여한 사단 장병 대다수는 마일즈 장비는 중대급이든, 소대급이든 아주 질리도록 도가 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이 시절엔 똥군기조차 거의 없었다. 실제로 훈련이 많고 고되면 대충 씻고 빨리 자야 다음날 버틸 수 있기에 (아주 중대한 게 아닌 한) 갈굴 여력도 없다. 요약하면 "피곤하니 빨리 정리하고 자자". 심지어 병장 진급해도 딱히 좋지만은 않았는데, 이는 계급이 오를수록 책임과 할 일도 많아지기에 더 힘들어지고 골아파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예를 들어 오늘 중대전술 갔다오면 야밤에 전반야/후반야 투입되고 내일 오전 과업이 주특기이고 오후는 진지 보수이고, 그 담날은 사격... 이런 식.

3.5. 제2신속대응사단(가칭) 개편 (2018년~2019년)


2018년 11월 22일자 강원일보 보도에 따르면 국방개혁 2.0에 따라 제2보병사단은 병력들을 인접 부대들에 나눠 보낸 뒤 경상북도에서 공정사단으로 재편될 거라고 한다.#
2019년 3월 28일자 아주경제 보도에서도 2사단이 공정사단으로 개편될 가능성이 높다고 나왔다.#
2019년 4월 16일 추가 보도에 따르면 예하 연대들을 인접 부대들에 통합시킨 뒤, 대신 제2작전사령부 예하에 있던 특공여단들을 사단 예하에 배속시켜 공정사단 개념의 ''''신속대응사단'''으로 개편할 것임이 확정되었다. 다만 사단 사령부는 이전 보도에서 경북으로 이전한다고 했던 것과 달리, 해체된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 사령부 자리로 옮겨갈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당시 기존 부대들을 어떻게 할 지 계획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부대 내외로 이와 관련된 많은 소문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그 중 GOP 경비, 기계화보병,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관련된 게 많았는데, 특히 KCTC 대항군 경력이 있는 32연대를 과학화 훈련장에 병합하거나 각 부대들을 21사단, 12사단에 편입시키는 설, 아니면 이들 사단과 병력 및 장비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각각 경비 여단과 기계화보병사단으로 나눌 거라는 소문이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결국 17연대는 12사단, 31연대는 21사단으로 이관, 통합되었고, 32연대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대신 경북 경산 및 경남 사천에 주둔하고 있는 201특공여단과 세종 및 계룡에 위치한 203특공여단이 향후 재창설 때 배속될 예정이다. 또 현재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2사단 사령부는 11기계화보병사단과 통합돼 없어진 경기도 양평의 (구)20기계화보병사단 사령부 자리로 본격 이전하였다.
[image]
한편 사단이 주둔했던 인제, 양구 지역의 경제에 2사단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단이 해체 후 이전한다는 소식에 지역 주민들이 매우 강하게 반발하며, 똑같이 27사단 해체 직전의 화천군 같은 여타 전방지역들과 연계해 2019년 8월 말에는 병사 휴대폰 사용시간 축소 등 공동 민원을,# 9월 초에는 철원, 양구, 인제, 고성 등 도내 5개 시·군 접경지역 실무단들이 화천군청에 모여 각 부대 해체와 관련된 회의를 하며 공동 반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2020년 양구의 악명 + 휴대폰 사용 + 코로나 통제까지 겹쳐 양구는 유령도시가 되었다.
게다가 2사단 장병 입장에서도 2사단이 해체 후 이전해도 정든 부대가 사라지거나 뿔뿔이 흩어진다는 아쉬움은 있어도 양구에 대한 악감정은 드높아 양구 상권이 망하든 말든 별 상관이 없다. 사실 좋은 추억이 있어야 양구에 존치한다는 의견이라도 낼 게 아닌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지역 경제 지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019년 12월 6일 부대개편식을 갖고 해체되었으며, 추후 제2신속대응사단으로 재탄생하면 제7기동군단에 배속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 7군단 예하에 제2신속대응사단 창설준비단이 활동하고 있다.
자세한 건 제2신속대응사단 참조.

4. 보병사단 시절 예하부대


이 시절 사단사령부 및 직할대, 예하 연대 대부분이 양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7연대와 포병연대는 1개 대대를 뺀 모두 인제군(정확히는 북면 원통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양구의 전방을 맡은 21사단, 인제의 전방을 맡은 12사단을 지원하는 예비 사단으로서 3군단을 구성했었다.
참고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양구까지 차로 가려면 소양호 주변 지역을 빙빙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102보충대에서 2사단으로 배치를 받으면 춘천 쪽 선착장에서 LST라는 수송선에 오르길 기다려야 하는데, 통영 YTL 침몰 사건 때문에 탑승하자마자 군화를 벗어야 했다.(...) 이후 소양호를 가로질러 양구 선착장까지 이동하면 60트럭을 타고 사단 신병교육대로 이동했었다.# 그나마 이후 도로망이 확대됨에 따라 춘천에서 홍천을 경유하는 식으로 이동했으며, 양구로 직접 이어지는 배후령터널이 뚫린 뒤에는 46번 국도를 타고 이동했다.
또한 102보충대에서 각 부대 신교대로 떠나보낼 때 21사단 배속 장병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출발했는데, 다들 제 갈길 찾아가는 와중에 버스가 올 때까지 혹은 버스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 볼수록 버려졌다는 왠지 모를 으스스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양구의 악명은 기간병들 사이에서도 유명한지 이따금 절대 21사단이나 2사단으로는 가지말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물론 102보충대가 사라진 뒤에는 직접 사단 신병교육대로 가게끔 바뀌었다.

4.1. 사단 직할대


  1. 공병대대
  2. 정비대대
  3. 보급수송대대
  4. 화생방지원대
  5. 수색대대 - #
  6. 의무근무대
  7. 정보통신대대
  8. 헌병대
  9. 전차중대
  10. 항공대
  11. 방공중대
  12. 무인항공대

4.2. 제17보병연대 쌍호


[image]
※ 2019년 10월 12사단으로 소속변경
  • 연대본부(본부중대, 통신중대, 수색중대, 수송대, 의무중대, 전투지원중대)
  • 1대대 인천상륙
  • 2대대 화령장전투
  • 3대대 수도탈환


4.3. 제31보병연대 백호


[image]
※ 2019년 12월 21사단으로 소속변경
  • 연대본부
  • 1대대
  • 2대대
  • 3대대
부대 예명은 백호부대. 1대대는 신병교육을 담당하며, 2대대(승공)와 3대대(통일), 의무, 전투지원중대, 수색중대는 하나의 울타리안에 있다. 1대대와 2대대는 신막사이며 3대대는 현재 구막사이나, 수색대대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수색대대 막사가 개수되는 바람에 시궁창. 3대대도 신막사로 개수를 검토중인데 차일피일 미루고있는 중이다. 하지만 2000년대~00년대 중반까지 3대대가 단일건물 즉 아파트 식의 신막사였고 1대대와 2대대는 완전 예전 구형 막사였다. 나무 관물대에 침상마루.
여름이 되면 3대대는 물 부족에 시달린다. 또한 물탱크가 뒷산 중턱쯤에 있기 때문에 보일러병이 여름만되면 땀을 뻘뻘흘리며 물탱크에 있는 물을 확인하러 가러 올라가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 글을 읽는 31연대 2대대, 수색, 의무중대 장병이 있다면 여름에 물을 아껴쓰자. 신병교육대대가 실거리 사격을 할 일이 있으면 나머지 대대 장병들은 도보로 1시간 거리에 있는 1대대 실거리 사격장까지 멀쩡한 인도를 두고 2대대 뒷산을 넘어서 가야한다.
부대가 한 울타리를 치고 사는데, 연대는 부대가 커지면서 주변 땅을 잡아먹은지라 군부대 안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위병소 출입 및 보안 문제로 항상 주민과 위병소 근무자들간의 마찰이 잦다. 근무체계가 바뀌어 담당하던 전문팀이 빠지고 다른 팀이 해당 근무를 맡으면서 아예 관리가 안되던 시절도 있었다.
부대 입구에서 올라가는 중간에 교회가 있으며 백호연대 전 인원과 길 건너의 수색대대,화학지원대 장병들을 수용한다. 이는 성당과 법당도 마찬가지로, 31연대와 길 건너 수색대대, 화학지원대 장병들을 수용한다. 좀 기괴한게, 교회가 언덕 맨 위에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성당이 자리한다. 성당에서 교회를 올려다보면 짓누르듯 자리잡고 있는 묘한 배치. 게다가 성당 옆에는 무명봉분이 하나 떡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예하 부대인 수색중대는 2 대대 → 본부 → (수색) → 3대대로 독립적으로 따로 막사를 운용하던 중대 였으나 (2006년까지) 이후 신막사 건립등의 이유로 타 부대와 같은 막사를 쓰게 되었다.
훈련이 미치도록 많은 연대. 특히 2대대의 경우 2000년대 초 당시 위관급 장교로는 건국 이래 최초로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김승겸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 중령 시절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사단 전체에서 악명높은 빡셈을 자랑했다. 일주일 내내 교육훈련에 수요일마다 분대단위 사격(사로내에서 빵야빵야가 아니다. 사로위에 도열하여 총 내리고 있다가 분대장 구령에 맞추어 3점사로 북한군 타겟을 개발살내는 그런 사격이다. K3 사수도 사로위에 서서 연사로 갈겼다) 훈련마치고 주둔지 복귀하면 다음 훈련 준비하는 그런 대대였다. 후에 김승겸 중령은 대령 진급 후 1사단 12연대장으로 부임하였고[3], 이후 장성 진급 후 제28보병사단장으로 부임하셨다고 한다. 사고많은 부대에 해결사로 가신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해결사 역할을 잘 수행했는지 중장진급과 동시에 제3군단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9년 군단장 임기를 마치고 육군참모차장을 맡은 뒤 2020년 대장으로 진급,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31연대는 사단 예비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소문이 나돌만한 것이, 17연대는 인제 원통 지역, 32연대는 양구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고 31연대는 가장 후미에 위치해 있다. 실제로 1996년 대침투 작전시 17연대와 32연대는 일부 병력만 차출된 반면에 31연대는 신병 교육대대와 주둔지 경계 병력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 연대가 출동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단 주력이라 여겨지던 17연대가 있음에도 주야장천 훈련에 불려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게다가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작전 당시 2개월 넘게 X성산 - X대산 - X로봉 등으로 돌아다녔다. 제27보병사단(이기자부대)와 함께 그 가운데서도 차단선 최전위에 위치했다고 알려진다. 실제로 그 당시 전과도 있었다. 다만 전공을 올린 병사가 상근 예비역이어서 다른 현역들을 멘붕 시켰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7중대의 송관종 일병이 작전 중 전사하였으며 사후에 상병으로 진급되었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당시 전공을 올리면 남은 군생활은 거의 면제 수준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최상급 부대로부터 중대장에 이르기까지 휴가증을 받아 한 동안 쉰 다음, 간첩을 사살했으므로 민간인보다는 못하지만 나오는 포상금도 챙기고 남은 기간은 이리 저리 강연하러 다니면서 군생활할 수 있다는 소문. 그런데 공로를 세운 병사가 상근예비역에 남은 현역 생활도 채 2개월이 안남은 상황. 다른 병사들의 심정을 짐작할 만하다.
페이스북 등 인터넷에서 떠도는 2011년 3월 외박나온 군인들을 민간 고등학생이 폭행한 사건의 피해 군인들 소속이 31연대 소속이었으며, 신병교육대대 신임 대대장이 부임직전 훈련병으로 위장하여 훈련받은 부대도 31연대다.
2019년 말 31연대는 21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21사단 예비연대인 63연대는 31연대에게 신교대를 포함한 작계지 및 인원들을 인계하고 해체 수순을 밟았다.


4.4. 제32보병연대 독수리


※ 2019년 12월 부대해체


4.5. 포병연대



  • 연대본부
  • 제18포병대대 충무 - (2019년, 21사단으로 소속 변경)
  • 제62포병대대 화랑 - (2019년, 21사단으로 소속 변경)
  • 제63포병대대 인헌 - (2019년, 12사단으로 소속 변경)
  • 제633포병대대 무공 - (2019년 해체)
포병연대의 예명은 사단예명을 빌려 노도포병, 예하대대는 무공훈장의 이름을 따서 18대대 '충무', 62대대 '화랑', 63대대 '인헌', 633대대 '무공'.
4개의 대대와 1개의 연대본부로 구성되어있으며 3개 대대와 연대 본부는 원통~인제에 주둔해있고 다른 1개 대대는 양구에 주둔해있다. 3개의 자주포부대와 1개의 견인포 부대로 구성되어있으며 모두 155mm이다. 선진병영(?)정책으로 유명한 동기생활관을 맨 처음 시행한 부대가 여기 대대 중 하나이다(63대대). 막사는 위에 써있듯이 연대본부와 굴지의 1개 대대 를 제외한 전 부대가 신막사를 사용 중이다. 그러나 여기 부대에 배치되어 연대 내 다른 부대를 돌아다니다보면 1개 대대가 나머지 신막사부대를 월등히 초월할 정도로 전방부대 치고 괜찮은 시설로 중무장되어있어 부러울지도 모른다. 18포병대대는 전군 최초 포병이라는 위업을 가지고있는데 이 최초 포병이라는 게 같은날 창설된 포병대대가 5개나 더 있어서 최초는 아닌 것 같지만 참 웃기게도 부대 창설식이 '''제일 일찍 시작하고 제일 빨리 끝나서''' 사실상 최초 포병이라는데, 사실 최초 창설 포병대대는 같은 날 같은장소에서 동시에 했었다(...). 6.25 전쟁 당시 부대재편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되었을 뿐이다. 18포병대대가 창설되었을때 제1야전포병대대였기 때문에...
훈련 강도는 2사단에 걸맞게 한숨이 나올 정도로 강하다. 게다가 4개 대대중 3개 대대가 인제군에 주둔하고 있으며, 인제군이 주둔지인 12사단의 간섭을 심하게 받는다. 즉, 인제의 3개 대대는 12사, 2사 포병연대, 양구에에 주둔하는 나머지 1개대대는 21사, 2사 포병연대가 있어 잦은 훈련과 검열로 인해 간부든 병사든 깊은 빡침이 올라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포병이라 총 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포병 1개 대대가 '''사단 전투력순위 1위'''에 오른 적도 있을 정도로 보병 못지않게 삽보다 총을 잘쏜다. 그래도 보병에는 못 미치겠지만 보병 지원해 준다고 이리저리 차출되는 병사들이 있으니 따져보면 거기서 거기다. 게다가 위수지역 자체가 전략적 요충지이다 보니 각종 상황이 전술훈련날 포탄 쏘듯이 뻥뻥 터져서 근무자와 당직계통을 상당히 힘들게 하는 것도 한몫한다. 그 당시 근무한 타 부대 병사들마저 상황전파로 그 상황을 들으면서 불쌍해 했으니 말 다했다(…)
부대 생활은 생각보다 단순한데 상급부대 지침을 매우 잘 따라서 일과 시간이 딱딱 맞아 떨어져서 군인들의 빛과소금인 개인정비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한때 후반기 교육을 받는 자주포 조종수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부대였다. 오죽했으면 육군포병학교의 비공식 군가의 구절 중 "노도로 가면 눈물나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00년대 초반에 양구군 동면에 위치한 자주포 대대에서 한 병사의 결혼식을 올려준 일이 방송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해당 병사는 가정 사정으로 인해 식은 못 올리고 혼인 신고만 한 후 입대했는데 방송 촬영 중에 마침 좋은 소재이기도 해서 부대에서 가족을 초청해 결혼식을 올려준 것.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자주포에 타고 입장하는 신부의 모습이 압권이다. 당시 해당 부대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식 비용은 '''110억 200만 원'''이라고. 11억짜리 자주포 10대 동원. 이후 해당병사는 부대에 계속 남아 부사관으로 임관하였고 부사관 장기복무심사 역시 통과하여 계속 복무 중에 있다.
18포병대대와 62포병대대는 21보병사단, 63포병대대는 12보병사단#으로 각각 예속전환되었다. 633포병대대는 2019년 12월 31일부로 해체됐고, 포병대로 개편되어 12보병사단으로 예속전환되었다.#
국방개혁 2020이 발표된 후, 2사단 해체설[4]과 함께 군단 포병여단이나 타 사단 포병연대로 옮겨간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기 때문에 당연히 막사 신축계획도 전무했으나, 2012년 9월 기준으로 1개 대대와 연대 본부를 제외한 3개 대대가 신막사 사용 중에 있다. 연대 본부는 땅이 좁아서 신막사를 못 짓는다는 말이 있고 남은 1개 대대 는 가 보면 도저히 신막사를 지을 엄두가 안나는 흠좀무한 고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라고 카더라. 사단 내에서의 소문에 따르면, 4월에 보일러가 동파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봄이 오고도 동파가 되는 한파와 고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형자체가 산 중턱을 깎아만든 곳이라 신막사가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경사 또한 없는 곳이 없다.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차리포대의 장병들은 행군 훈련시 45도 각도의 언덕을 0.7km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일명 눈물고개. 사실, 인근 부대로 넘어가는 3.5km 정도의 행군로가 있는데 부대 전체에서는 그 행군로는 눈물 고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차리 포대원들 마음속의 눈물고개는 포대로 복귀하는 그 길이 맞다. 복귀 중 다른 중대들이 중간에 줄줄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정말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한다. 2005~07년에는 둘팔고개로 불렸고 대공초소로 가는 길이었다. 참고로 둘팔의 뜻은 그 28...

5. 출신인물


시우민(EXO)2019년5월 2사단 신교대로 입대하고 수료하여 31연대 수색병으로 근무중 해체되어 21사단으로 전입 간 케이스

5.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2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이형근'''
'''예) 대장'''
군사영어 1기
합참의장

00대
이원장
예) 소장


'''00대'''
'''문형태'''
'''예) 대장'''
조선경비 2기
합참의장

'''00대'''
'''김병관'''
'''예) 대장'''
육사 28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

00대
한기호
예) 중장
육사 31기
제5군단장

'''44대'''
'''이순진'''
'''예) 대장'''
3사 14기
합동참모의장, 제2작전사령관

45대
고현수
예) 중장
학군 20기
제2군단장

46대
이종섭
예) 중장
육사 40기
제7기동군단장

48대
한영훈
소장
육사 44기
사단장

49대
장광선
소장
3사 25기
사단장
[5]

5.2. 장교/부사관



5.3. 병


노도부대 출신으로 알려졌다. 인터넷상에 '노도특수부대' 출신이라고 나와있는 곳도 있는데, 노도부대의 수색중대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냥 빡센 곳에서 복무했다는걸 강조한 유머로 '특수'자를 붙여서 말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색대대 출신은 아니다.
박격포 포수로 복무했다. 링크 링크
정비대대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2019년 5월 7일, 2사단으로 입대했다.
군악대대에서 복무했다.
만화가 겸 플래시 애니메이터. 공병으로 복무했다. 자신의 군생활에 대한 내용을 "면제받지 못한 자"란 책으로 냈다.
군악대대에서 복무했다.

6. 기타


2사단의 경례구호는 본래 '당백'이었다. '일 당 백'의 준말이다. 당백 경례구호는 1981년 '단결'로 바뀌었다. 1997년까지 '단결' 이었는데 이후 '충성'으로 바뀌었다. 신병교육대에서 배우지만 자대로 가면 부대에 따라선 해당 부대의 자체 구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2000년 이전에 경례구호는 '단결' 이었고 지휘자급 상관이 지나가면 한 명이 "단결, 연대장님 화이팅" 을 외치고 나머지 장병들이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엄지손가락을 높이들어 3번 제창했다. 또 '노도의 얼'이라는 구호가 있다. 지휘자가 '노도의 얼'을 선창하면 나머지는 아래의 문구를 후창한다.

'''노도의 얼'''

우리는 조국과 민족에 충성한다.

우리는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자랑스런 노도부대 용사다~!


6.1. 근무환경



6.2. 유격 훈련


[image]



본래 2사단 유격장은 설악산 장수대에 있었던 3군단 유격장을 사용했었다. 양구에 위치한 사단 직할대와 31연대와 32연대 등은 광치령을 넘어 원통을 거쳐 설악산까지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행군해 가서 유격을 받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1978년에 양구 사명산 아래 웅진리 골짜기에 유격장을 개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사단 유격장은 소양강 상류에 조성되었는데, 상수도 보호구역이므로 샴푸의 사용을 금지했었다. 지금은 샤워장이 마련되어있어 상관은 없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유격장에 들어서면 야영지가 점점 산 위로 올라가고 도대체 어디서 훈련을 받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산 곳곳에 유격 훈련장들이 숨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런 산중에 어떻게 훈련장을 만들었는지 처음 가면 궁금하면서도 섬뜩한 기분이 든다. 참고로 예전에 삼청 교육대 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격장은 산의 계곡사이에 있으며 연병장에서 대략 30~50분간 PT체조로 몸을 굴리고 오전조, 오후조로 나눠서 계곡 곳곳에 있는 유격 코스를 차근차근 밟으면 된다. 각 유격 훈련장들이 산속에 곳곳이 숨겨져 있으므로 이동간에 간단한 오리 걸음만 시켜도 아주 강도높은 얼차려가 된다.
게다가 이곳만의 백미는 부실한 안정망을 믿고 상당히 높은 절벽 사이에 설치된 도하선을 건너는 도하 훈련과 마지막 날 화생방훈련이다. 예전에는 11미터 수직 하강과 수평 하강 훈련을 했었다. 하강 훈련전에 입수해서 사고나지 않도록 물에 적응을 시키는데 한여름인데도 피티체조로 이미 헐떡거리는 몸에다가 강원도 산골짜기의 차가운 계곡물이라서 조교들이 잠수를 시키면 10초도 못버티고 꼬로록 소리내며 물 밖으로 머리 내밀려고 바둥거리곤 했었다. 수직 하강의 경우 조교의 외침에 따라서 잡고 있는 줄을 놓고 물속으로 입수하는 방식인데 스스로 잡고 있는 줄을 놓는 그 기분이 심히 골룸했다. 줄놓는게 무서워서 조교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도 끝내 입수하지 못해서 되돌아나와 다시 물먹고 피티 체조 복습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도하 훈련의 경우 절벽에서 저 아래의 저수지로 연결된 와이어에 의지하여 활강을 하는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 무섭다. 빨리 도하하라며 고함치는 조교들과 주저하는 교육생들의 향연..(이쯤되면 이게 일반 보병훈련인지 의심스러워진다)끝나면 차타고 가는게 아니라 대략 50km정도 복귀 행군을 한다. 올때도 마찬가지. 그래서 보통 일요일에 행군해서 도착해서 텐트치고 숙영한다. 특히 31연대의 경우 유격장까지 가는 행군과 주둔지 복귀 행군이 매우 힘들다. 유격장으로 가는 행군의 하이라이트는 대공진지를 넘어가는 코스.
여기서 웬만한 이등병들과 81미리 박격포 탄약수들은 거진 다 낙오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끌고 들어서라고 끌고 간다. 그래서 나중에 애로사항 꽃피지 않으려면 평소에 체력을 길러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복귀 행군은 한참을 아스팔트를 걷는 강행군이며 이때 병사들은 좀비같은 상태로 그저 걸어야 하니까 정줄놓고 걷는 기계가 된것처럼 걷는다. 그리고 복귀후엔 평균적으로 3~6kg이 빠진다.
유격의 꽃인 PT체조를 굴리는 연병장에는 '하면 된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상당히 기괴하다. 2018년에 사단장의 지시로 '또, 없는가'로 글귀가 바뀌었다.
숙영지의 위치가 무척이나 괴랄하다. 지옥의 경사도를 자랑하는 타이어계단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타이어 계단은 애교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무릎 높이만한 100정도의 돌계단을 올라가야되는 곳도 있다. 연도에 따라 중대규모로 숙영지 로테이션을 돌리는데, 운 없으면 최상층에서 D형 텐트를 쳐야한다. 식당으로 밥먹으러 내려가기 싫을 정도로 높다. 말 그대로 훈련이나 숙영 자체가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고 보면 된다. 맨 윗쪽에 텐트를 치게 된 중대는 대대 피엑스와 취사장이 아래에 설치되므로 물건을 사거나 밥을 타러갈때 등산을 한번 한다고 보면 된다.
인제군 원통 이북의 포병연대 병력은 유격훈련을 2사단 유격장이 아닌 12사단 유격장에서 받았었다. 인제에 주둔한 17연대의 경우에는 인제에서 양구 2사단 유격장까지 광치령을 넘어 걸어 간다. 31연대도 혹한기 훈련을 서화축선에서 하는 경우 광치령을 넘어간 사례가 있는 등, 2사단에서 광치령을 걸어 넘는 것은 그다지 엄청난 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군축령넘어 소양강따라 구비구비 돌아가는길도 있다. 어디로 가든 복귀할 때는 싸가지골을 넘어서 인제군내를 통과해서 오는 길이 있눈데 말그대로 싸가지가없을정도로 힘든 코스.
양구 최전방에 위치한 1개 포병대대는 유격훈련을 부대위치와 가까운 21사단 유격장에서 받았었다.
또한 2016년 당시 포병 출신 김종문 사단장의 지시로 포병은 주특기 임무나 충실하라며 유격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사실 포병 외에도 그 전인 2015년도부터 수색대(1개 소대병력 조교임무수행)를 제외한 각 직할대들은 자신들의 주특기나 잘하라고 유격에서 제외시켰는데... 사단장이 교체되면서 포병의 유격 훈련도 부활했다.

6.3. 혹한기 훈련




6.4. 사단가


금수강산 수도에서 한뜻에 뭉쳐
조국의 통일위해 노도와 같이
원수의 괴뢰군을 쳐무찌르니
장하다 그의 이름 2사단 용사 앗!
사명산 정기받아 굳게 뭉쳤다
초전박살 굳센신념 노도와 같이
필승의 전기연마 전진 또 전진
산악의 천하무적 2사단 용사
선진조국 힘찬대열 선봉에 서서
조국통일 겨레소망 노도와 같이
백두산 상봉까지 쳐서 무찔러
내 조국 지키리라 2사단 용사

들어보기.
훈련소를 마치며 합창한다. 이때 힘차게 팔을 흔들며 부르는데, 훈련병 시점에서 봐도 한 기수 전원이 동작을 맞추며 우렁차게 부르는건 굉장히 멋있다. 자대에 배치받고도 보통은 잘 부르지 않아 거의 까먹는 경우가 많지만 종종 부른다.
그 외 중대단위 소대단위로 부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10대 군가가 아닌 사가들이 존재했다. 일명 중대가 및 소대가. 최근에는 거의 부르지 않아 사실상 소멸 상태이다.
산악가
멸공의 산악에서 기치도 높이
새벽의 힘찬걸음 고지를 탄다
승리의 깃발은 별빛을 향해
오늘도 노도와 같이 적군을 삼켜.
아아악! 산악의 노도부대
우리는 산악 사단 무적의 왕자!
사가를 부를때는 멜로디는 없고 리듬을 타면서 악을 쓰며 부른다. 10대 군가도 멜로디는 뺀채 악을 쓰면서 리듬만으로 부르는 전통이 있으며, 실로 그 패기가 대단하다. 2002년 경에는 군가를 제대로 불러라고 시정명령이 내려왔으나 쌩까고 계속 그렇게 불렀다.

7. 사건사고


  • 1996년 강릉시 일대 해상에서 일어난 북한군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8. 여담


  • 부대마크가 제2차 세계대전영국 공군 라운델과 똑같다. 2004년 경 부대마크가 저시인성으로 바뀌었는데, 테팔 프라이팬처럼 참 멋없게 변했다는 평이 많다. 마크와 관련된 농담 중 제일 흔한건 '과녁'. 또는 훈련이 많아서 피(가운데 붉은 원)가 맺히고 멍(파란 원)과 고름(흰색 원)이 생긴다고. 고름 대신 붕대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농담으로는 한창 아이팟이 유행할 시절 선임들이 신병 전입오면 사단 마크를 눌러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2사단이 아니라는 가혹행위가 있었다.
  • 2사단 군사경찰대가 초대형 병크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때 간첩에게 전사한 표종욱 일병을 탈영처리해버리고 유가족 분들에게 탈영한 아들 내놓으라고 지랄발광을 저질렀다. 심지어 간첩이 노획해서 쓰던 표종욱 일병의 군복과 유품을 확인했는데도 아들 내놓으라고 지랄을 벌였다. 자세한 내용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서 참조.
  • 후방부대보다는 신형 보급물자가 빠르게 적용되는 편이다. 하지만 전방 GP, GOP사단보다는 약간 느린 편이다. 전군이 엑스반도 차던 시절 전투조끼는 01년에 보급되었으며, 신형헬멧은 약간 늦게 11년 이후 보급되었다. 그러나 일반 보병중대의 대전차 공용화기인 판저파우스트 3의 보급은 동시기에 이루어진 듯 하다.
  • 2010년 여름에 모 연대장이 연대 주둔지 담 근방 2m 내에 있는 모든 나무를 '사계확보'라는 명목으로 전부 잘라낼 것을 지시했었다. 하지만 그 나무들은 사유지에 속한 사유재산이었는데, 이로 인해 물어준 돈이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 2사단은 후반기교육을 타부대보다 일찍 부활시켰다. 링크 이에 따라 2010년 32연대 1대대가 후반기 교육 대대로 새로 편성되었고, 해당 대대의 병사들은 사단 내의 타 연대로 재편성됐다. 이 때에 병력관리가 매우 미흡하여 일부 병사는 머리카락을 민간인 수준까지 길렀다. 32연대 1대대는 2013년 말까지 교육대대로 운영되었고, 2014년부터는 다시 일반 보병대대로 전환되었다.

9. 관련문서




[1] 90년대 이전에는 내부의 적인 공산당을 상징하며 이들의 존재를 항상 잊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지만 2000년대 이후로 이렇게 바뀌었다.[2] 즉, 현재 수행하고 있는 KCTC 전갈부대의 원조격인 셈.[3] 전임 연대장이 김운용 대장(前 지상작전사령관)[4] 2000년대 후반 당시엔 소문만 돌았을 뿐 아직 2사단 해체계획이 없었다.[5] 중령시절 31사단 예하 대대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