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악

 


李光岳
1557년(명종 12) ~ 1608년(선조 41)
1. 개요
2. 생애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여진(汝鎭) 또는 진지(鎭之)이다.
임진왜란에 참전해 공적을 세운 장수다. 시호는 충장(忠壯).

2. 생애


이광악은 1557년 통훈대부(通訓大夫) 음성현감(陰城縣監) 이호약(李好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이사악(李士岳)이라는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충의위(忠義衛)로 복무하다가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을과 16위로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에 곤양군수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엄청난 수의 왜군이 영남 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며 대비하였다.
이후 왜군이 진주로 진군, 진주성을 포위하여 진주목사 김시민이 고립되고 전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진주성에 진입, 김시민과 함께 왜군에게 항전하였다. 이때 김시민이 적이 쏜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김시민을 대신해 총지휘관으로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진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조선인 포로 100여명을 구출하고 소·말 60여필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며, 1608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