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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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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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시철도 동래역 앞 내성교차로 인근을 지나는 중앙대로와 내성지하차도 인근 모습.
지금의 부산광역시의 옛 이름.[1] 동래의 중심지역은 지금의 동래구 일대였다.
현재는 동래구라는 뜻 외에도 넓은 의미의 동래권 지역인 동래구, 연제구, 금정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인다. 이 중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동래는 지금의 동래구 영역(정확히는 읍성과 그 인근)이며 금정구와 수영구, 연제구는 동래의 변두리에 해당했으며, 요즘에도 연제구와 금정구는 동래권 지역으로 보지만, 수영구는 남구, 해운대구와 함께 동부산권 지역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며, 동래권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초반에 신라가 여기까지 진출하기 전에 해운대 지역에 장산국(萇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으로 소국을 이루었다.신라의 장군 거도가 기병의 움직임을 말타기 행사(馬叔)로 위장해서 거칠산국이 방심하게 한 틈에 공격해 멸망시킨 후 신라의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되었고 757년(경덕왕 16년)에 현재까지 쓰이는 지명인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되었다. 동래군은 1018년(현종 9년)에 현으로 격하되었다. 한때 독로국(瀆盧國)의 독로를 동래의 어원으로 여겼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본다.[2]
1547년에 승격되었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고, 임진왜란이 종결 된 후인 1599년 다시 동래도호부로 복위되었다.[3]
조선 시대에는 초량에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일본과의 무역 거점 도시로 기능하였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조선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조선 수도 한양까지는 가지 않고 부산 동래부까지만 왔다 갔다. 임진왜란의 기억으로 조선은 에도 막부 정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일본 사신단이 한양으로 가면서 지리를 익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일본 사신에게 얕잡히지 않기 위해 동래의 격을 도호부로 높여 중요시했다. 한편 훗날 도시의 이름이 되는 부산(부산포, 부산진)이라는 이름은 이 당시 동래도호부 예하의 포구 및 진(鎭)에 불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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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3부제를 시행했을 때는 포항시, 경주시, 울산광역시, 양산시 등 경상도 동쪽을 통째로 떼어서 동래부라고 명명했는데(위의 연두색 범위), 이건 저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동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아래에 설명할 도시로서의 동래는 동래부 안의 동래군이었다. 이듬해 13도제 시행으로 동래부는 반반 나눠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일부가 되었고, 동래군은 동래부가 되었다. 같은 용어가 전혀 다른 범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휙휙 바뀌므로 헷갈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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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의 모습. 양산의 모습이 심히 이상한 것은 무시하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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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910년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동래부가 잠시 통째로 부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으로 부산부의 영역이 개항장 일대로 축소되고, 부산부의 잔여지역을 동래군으로 분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던 기장군이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동래군청은 기존 동래부 관아(동헌)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기장군 지역만 남은 동래군이 1973년 양산군에 병합될 때까지 현역 군청사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현대에까지 현역 관공서 건물로 쓰인 특이한 케이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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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이후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동래군은 부산시에 편입, 흡수되었으며, 1963년에는 현 기장군과 동일한 영역만을 점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최종적으로 폐지되고 양산군에 병합됨으로써 동래군은 소멸되었다.[6]
한편, 1957년 부산시에 구(區)제가 실시되면서 아래 항목의 동래구가 설치되었으며[7] , 폐지된 동래군을 대신하여 동래구가 부산의 옛 이름인 '동래'의 맥을 잇고 있다.
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동래가 상위 지명, 부산이 그 하위 지명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부산과 동래의 지명의 지위가 뒤바뀐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동래광역시 부산구가 되었을 것이다. 덤으로 경부고속도로도 경동고속도로 혹은 경래고속도로였을 수도 있다.[8] 비슷한 사례로 회덕군 '''대전리'''가 광역시의 이름으로 격상되고, 상위 지명이었던 회덕은 회덕동으로만 남아버린 대전광역시의 사례가 있다. 동래는 그래도 구 이름으로 계승됐으니 그나마 선방[9] 구미시도 원래 선산군 구미읍이었지만, 구미읍이 시로 승격돼 선산군에서 분리됐다가 1995년 도농통합시가 출범하면서 역으로 구미시가 선산군을 병합하게 되면서 선산이란 지명은 기존 선산군청 소재지였던 선산읍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위상이 뒤바뀌었다.
부산과 통합된 이후에도 1970~80년대까지는 '부산'과는 다른 동래 지역만의 정체성이 남아있었지만[10] 동래와 부산 시가지 사이의 미개발 지역까지 부산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연담화되어 지금은 완전히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부로 동화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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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처럼 과거 동래부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동래읍성은 일본과의 외교 창구였기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1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제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해 훨씬 크게 다시 쌓았고 이 때의 증축이 지금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동래읍성의 성벽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는 마안산 자락에 성벽 및 일부 시설들 (북문,인생문, 북장대,서장대, 동장대)이 복원되어있다.
동래읍성 인생문 성벽 붕괴사고 문서 참조.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동래역 역사건물 4번 출구쪽부터 해서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과 동래시장, 메가마트동래점, 봉생병원, 동래구청 일대에 상권이 분포해 있다.
부산 도시철도 1,3,4호선, 동해선 광역전철이 동래지역을 통과하고, 충렬대로 일대에 동래역이 위치한 내성교차로에서부터 원동IC교차로까지 간선급행버스체계가 운영 중이다.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시내버스도 많이 통과하지만 길이 좁은 탓에 다른지역과 비해서 동래구 마을버스가 많이 운행되는 걸 볼 수 있으며 거의 대부분 동래역을 기종점으로 삼는다.
동래구 마을버스는 1, 1-1번을 제외한 모든 노선이 동래구 내에서만 운행한다.
東萊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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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시철도 동래역 앞 내성교차로 인근을 지나는 중앙대로와 내성지하차도 인근 모습.
지금의 부산광역시의 옛 이름.[1] 동래의 중심지역은 지금의 동래구 일대였다.
현재는 동래구라는 뜻 외에도 넓은 의미의 동래권 지역인 동래구, 연제구, 금정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인다. 이 중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동래는 지금의 동래구 영역(정확히는 읍성과 그 인근)이며 금정구와 수영구, 연제구는 동래의 변두리에 해당했으며, 요즘에도 연제구와 금정구는 동래권 지역으로 보지만, 수영구는 남구, 해운대구와 함께 동부산권 지역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며, 동래권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2. 역사
삼국시대 초반에 신라가 여기까지 진출하기 전에 해운대 지역에 장산국(萇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으로 소국을 이루었다.신라의 장군 거도가 기병의 움직임을 말타기 행사(馬叔)로 위장해서 거칠산국이 방심하게 한 틈에 공격해 멸망시킨 후 신라의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되었고 757년(경덕왕 16년)에 현재까지 쓰이는 지명인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되었다. 동래군은 1018년(현종 9년)에 현으로 격하되었다. 한때 독로국(瀆盧國)의 독로를 동래의 어원으로 여겼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본다.[2]
1547년에 승격되었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고, 임진왜란이 종결 된 후인 1599년 다시 동래도호부로 복위되었다.[3]
조선 시대에는 초량에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일본과의 무역 거점 도시로 기능하였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조선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조선 수도 한양까지는 가지 않고 부산 동래부까지만 왔다 갔다. 임진왜란의 기억으로 조선은 에도 막부 정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일본 사신단이 한양으로 가면서 지리를 익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일본 사신에게 얕잡히지 않기 위해 동래의 격을 도호부로 높여 중요시했다. 한편 훗날 도시의 이름이 되는 부산(부산포, 부산진)이라는 이름은 이 당시 동래도호부 예하의 포구 및 진(鎭)에 불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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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3부제를 시행했을 때는 포항시, 경주시, 울산광역시, 양산시 등 경상도 동쪽을 통째로 떼어서 동래부라고 명명했는데(위의 연두색 범위), 이건 저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동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아래에 설명할 도시로서의 동래는 동래부 안의 동래군이었다. 이듬해 13도제 시행으로 동래부는 반반 나눠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일부가 되었고, 동래군은 동래부가 되었다. 같은 용어가 전혀 다른 범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휙휙 바뀌므로 헷갈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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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의 모습. 양산의 모습이 심히 이상한 것은 무시하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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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910년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동래부가 잠시 통째로 부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으로 부산부의 영역이 개항장 일대로 축소되고, 부산부의 잔여지역을 동래군으로 분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던 기장군이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동래군청은 기존 동래부 관아(동헌)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기장군 지역만 남은 동래군이 1973년 양산군에 병합될 때까지 현역 군청사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현대에까지 현역 관공서 건물로 쓰인 특이한 케이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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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이후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동래군은 부산시에 편입, 흡수되었으며, 1963년에는 현 기장군과 동일한 영역만을 점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최종적으로 폐지되고 양산군에 병합됨으로써 동래군은 소멸되었다.[6]
한편, 1957년 부산시에 구(區)제가 실시되면서 아래 항목의 동래구가 설치되었으며[7] , 폐지된 동래군을 대신하여 동래구가 부산의 옛 이름인 '동래'의 맥을 잇고 있다.
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동래가 상위 지명, 부산이 그 하위 지명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부산과 동래의 지명의 지위가 뒤바뀐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동래광역시 부산구가 되었을 것이다. 덤으로 경부고속도로도 경동고속도로 혹은 경래고속도로였을 수도 있다.[8] 비슷한 사례로 회덕군 '''대전리'''가 광역시의 이름으로 격상되고, 상위 지명이었던 회덕은 회덕동으로만 남아버린 대전광역시의 사례가 있다. 동래는 그래도 구 이름으로 계승됐으니 그나마 선방[9] 구미시도 원래 선산군 구미읍이었지만, 구미읍이 시로 승격돼 선산군에서 분리됐다가 1995년 도농통합시가 출범하면서 역으로 구미시가 선산군을 병합하게 되면서 선산이란 지명은 기존 선산군청 소재지였던 선산읍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위상이 뒤바뀌었다.
부산과 통합된 이후에도 1970~80년대까지는 '부산'과는 다른 동래 지역만의 정체성이 남아있었지만[10] 동래와 부산 시가지 사이의 미개발 지역까지 부산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연담화되어 지금은 완전히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부로 동화된 상태이다.
3. 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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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처럼 과거 동래부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동래읍성은 일본과의 외교 창구였기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1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제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해 훨씬 크게 다시 쌓았고 이 때의 증축이 지금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동래읍성의 성벽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는 마안산 자락에 성벽 및 일부 시설들 (북문,인생문, 북장대,서장대, 동장대)이 복원되어있다.
3.1. 인생문 복원과 성벽 붕괴 사고
동래읍성 인생문 성벽 붕괴사고 문서 참조.
4. 상권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동래역 역사건물 4번 출구쪽부터 해서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과 동래시장, 메가마트동래점, 봉생병원, 동래구청 일대에 상권이 분포해 있다.
5. 교통
부산 도시철도 1,3,4호선, 동해선 광역전철이 동래지역을 통과하고, 충렬대로 일대에 동래역이 위치한 내성교차로에서부터 원동IC교차로까지 간선급행버스체계가 운영 중이다.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시내버스도 많이 통과하지만 길이 좁은 탓에 다른지역과 비해서 동래구 마을버스가 많이 운행되는 걸 볼 수 있으며 거의 대부분 동래역을 기종점으로 삼는다.
5.1. 시내버스
5.1.1. 일반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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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마을버스
동래구 마을버스는 1, 1-1번을 제외한 모든 노선이 동래구 내에서만 운행한다.
5.3. 기타
6. 관련 항목
[1] 그러나 지금 부산광역시의 영역과 옛 동래의 영역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동래부에서 부산이 떨어져나간 20세기 초반부터 동래군이 부산직할시에 완전히 흡수된 20세기 후반까지는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는 동래와 부산이 공존했었다. 이 당시 부산은 지금의 중,동,서,영도구(+부산진구 일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2] 향가 25수를 처음으로 해석한 양주동 박사 또한 동래를 독로와 연결시키기 어렵다고 보았고 대다수 언어학자들의 견해 또한 마찬가지로 현재는 독로를 동래의 어원으로 연관시키는 음운설은 부정된다. # #[3] 출처[4] 이러한 형태의 행정구역을 땅거스러미라 하며 조선시대에는 '견아상입지'라고 불렀다. 항목 참고. 이러한 곳들은 1906년에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5] 심지어 1973년 이후에도 동래부동헌 건물은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쓰였다고 한다. 인천 문학초등학교에 있는 오리지널 인천도호부청사 건물도 부천군청, 인천시 문학출장소 건물로 쓰인 적이 있었다.[6] 이후 동래군 영역은 울주군에서 잠시 편입하였다가 도로 환원된 서생면 지역을 제외하고 1995년에 다시 부산광역시로 돌아가면서 기장군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7] 즉, 1957년부터 1973년까지는 '부산시 동래구'와 '경상남도 동래군'이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8] 조선시대 거상(巨商) 중 하나인 내상(萊商)이 동'''래'''에서 유래했다.[9] 다만 '회덕'은 온전히 현재의 구 이름으로 계승되진 못했지만, 옛 대전시의 외곽 읍면지역을 관할하던 대덕군을 거쳐 현 대전광역시 북부를 관할하는 대덕구의 '덕'으로써 계승됐다. 참고로 '대덕'의 '대'는 대전.[10] 광주광역시 광산구, 인천광역시 부평구, 창원시 마산 지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등 다른 도시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다만 부평의 경우는 원인천과는 역사적으로 별개의 고을이기 때문에 1:1 비교는 곤란하다. 영등포의 경우도 마찬가지.[11] 시기별로 다르지만 주로 조선 통신사는 에도(도쿄)까지 산 넘고 물 건너서 간 경우가 많았지만 일본 측의 사자는 임란이후 사신의 통행로가 침략로로 사용될까하여 조선측에서 동래성까지만 입국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