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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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 당 대종 이예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예진황후 심씨이다. 휘는 괄(适).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신무효문황제(神武孝文皇帝)로 줄여서 효문제(孝文帝). 능호는 숭릉(崇陵)이다.
당헌종과 함께 대표적인 중흥 황제였다. 그의 치세를 흔히 '''중흥의 치'''라 부르는데, 연호인 건'''중'''(建中, 780년 ~ 783년)과 '''흥'''원(興元, 784년)에서 글자를 딴 것이지만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으면 마침 '중흥'과 음이 겹치는 우연의 일치가 있다. 양세법 등의 세제 개편으로 연호를 따 '중흥의 치'라는 번영을 회복했으나 환관을 중용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리고 "중흥의 치"에서 드러나듯 정원 년간, 즉 재위 기간의 후반 9년은 전반 5년에 미치지 못했다. 대내적인 평가는 번진에 집착해서 큰 공을 놓쳤고 대외적인 평가는 위구르에 집착해 토번에게 이용당했다고 한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증조부인 현종 치세에 태어났다. 젊었을 때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회흘과 연합 작전을 할 때 당한 치욕으로 회흘에 대한 복수심이 매우 컸다. 회흘에게 당한 치욕이란 당나라가 사사명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회흘의 가한 이지건이 당시 옹왕이던 덕종에게 "나와 네 아버지는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나는 너의 숙부다. '''숙부인 가한을 위해 직접 춤을 추라'''."라는 모욕을 가했고, 이에 반대하던 당의 신하들이 회흘 가한에게 채찍 100대를 맞다가 죽어나가는 수모를 경험했으며, 낙양이 재수복되자, 회흘군이 대약탈극을 벌여 수만명의 백성들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눈 앞에서 목도한 것이었다.
2.2. 치세 - 양세법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즉위 직후(780년) 재상 양염(楊炎)의 건의에 따라 세금제도를 개편하여 단일 세율(단세)인 양세법(兩稅法)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1] 균전제를 폐지하고 현재의[2] '''토지와 재산에 따라''' 세금을 해마다 두 번(여름(하세) - 6월, 가을(추세) - 11월) 금전으로 걷고[3] , 이를 바탕으로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정된 양세법은 이후 '''명나라 만력제까지 800년간 운용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양세법의 기본 원칙은 하급 행정 단위에서 쓰고 남은 돈을 상부로 올리는 방식이었던 만큼, 하북 3진은 물론 평로 절도사 조차 '''상공'''(上供 - 중앙으로 세금을 바치는 것)을 아예 하지 않았고, 나머지 절도사들도 이따금 매우 적은 상공만을 했다. 조금 사정이 나은 것이 강남의 순지順地 절도사들이었는데, 이것도 대운하를 통해서 상공이 가능한 것이기에 하북의 절도사들이 막을 경우 정기적이지 못했다. 이는 뒤에 보듯 이정기의 치청번진(제나라)과 같은 절도사들의 난에서 잘 드러난다.
2.3. 절도사들의 봉기와 반란 진압
장군인 주체가 황제를 참칭하자, 장안을 버리고 파천해야했으나, 결국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토번의 원군을 끌고 왔으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반발이 생겨 결국 토번과 결별하고 이필의 건의로[4] 위구르 제국과 연합해서 토번을 공격했으나 '''되레 깨져서 그나마 소유하고있던 북정 지역마저 상실당했다.''' 이후 중국의 한족 왕조는 두번 다시 서역을 차지하지 못했다.[5]
3. 사망
덕종은 805년에 64세의 나이로 붕어하였으며 능호는 숭릉(崇陵)이다.
4. 기타
전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에게 사과했다.[6] 사실 그가 전란의 원인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정작 6.25 전쟁 때 수도 서울을 버리고 떠난 이승만은 사과하라는 제2대 총선으로 수립된 국회의 비판에 "내가 무슨 당 덕종이냐!"라고 우겼다.
당 덕종 재위 기간에 낙산대불이 완공되었다. 낙산대불은 당현종 개원 원년인 713년 해통화상(海通和尚)이 처음 공사를 시작하여 당 덕종 정원 19년인 803년에서야 겨우 완공되었는데 무려 90년에 걸쳐 사천성 민강 강가 절벽에 조각되었으며 높이 71m, 폭 28m, 머리 너비만 해도 10m에 이를정도로 현존 세계 최대 좌불상이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792년에 신라 최고의 미녀 김정란을 공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7]
5. 둘러보기
[1] 여기서 '나가는 것을 헤아려 들어오는 것을 정한다'라는 뜻인 '''양출제입'''(量出制入)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무릇 백역에 드는 비용과 한 푼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것들은 먼저 그 수를 헤아려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지출할 것을 잘 따져서 수입 계획을 세운다'''(凡百役之費, 一錢之斂, 先度其數而賦於人, '''量出制入''')" ─ 신당서 양염전 中.[2] 이는 본관지 이탈을 용인한 것이며, 소작민을 과세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3] 정확히는 여름에 걷는 것은 맥麥전, 즉 보리농사, 가을에 걷는 것은 속粟전 및 도稻전, 즉 좁쌀농사와 벼농사를 걷는 것이니 이모작을 때에 따라 각각 걷는 것이지 이중과세는 아니었다.[4] 당숙종의 그 이필 맞다.[5] 정확히 말하면 당나라가 위구르와 연합해서 토번을 쳤으나 토번이 장군 줘치수를 통해 오히려 반격을 가해 안서도호부의 치소인 북정성이 함락됐다. 이후 위구르가 서역의 주요 거점인 북정성을 힐우가사를 통해 다시 공격하여 탈환, 최종적으로 북정은 위구르의 영토가 되었다.[6] 덕종은 자신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전란에 휩싸여 고생한다며 모든 것이 자신의 죄라며 ‘죄기조(罪己詔)’를 발표했다.[7] 신라 소성왕이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당에 바쳤는데 덕종은 "이거 인삼이 아닌데?" 하고 받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