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데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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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41대

42대
후안 페론

'''이사벨 데 페론'''

호르헤 비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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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 카르타스 데페론[1]
María Estela Martínez Cartas de Perón
1931년 2월 4일 생.
1. 소개
2. 생애


1. 소개


본명은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 카르타스 데페론(María Estela Martínez Cartas de Perón)으로, 이사벨은 그녀가 가톨릭에 귀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얻은 세례명이었다. 그녀는 공식석상에서 자기 세례명을 본명처럼 사용할 정도로 세례명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후안 페론의 3번째 아내로, 35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최규하 전 대통령처럼 많이 안습한 대통령인데, 뭘 시도해 보기도 전에 군사반란이 일어나 퇴출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2. 생애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며 에바 페론이 사망하자 그 이후 후안 페론의 후처로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이 때 후안 페론이 고령이라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지경까지 갔고 반쯤 대통령의 임무를 수행했다.
남편인 후안 페론이 1974년 6월에 2번째로 당선된 뒤로는 영부인이 되었고 후안 페론이 고령으로 1년을 못채우고 세상을 떠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 때 군부가 에바 페론의 너무 높은 인기를 견제하기 위해 몰래 훔쳐서 이탈리아로 빼돌렸던 에바 페론의 영구를 되찾아 와 후안 페론과 같이 합장했다. 그 이후 뭔가 정책을 내놓으려 했지만 고도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데다가 1975년 평가절하로 인해 긴축정책에 들어가면서 그나마 있었던 지지기반마저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정치면에서도 군부에게 휘둘리는 등 실정을 거듭한지라 결국에는 1976년 3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호르헤 비델라에 의해 대통령에서 쫓겨났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사벨 데 페론이 집권해 있었던 시절에 연간 수십%가량의 고 인플레이션을 기록했지만, 아르헨티나 역사상 실업률은 가장 낮았던 시기 중 하나였다는것이다 (단기 필립스 곡선을 생각하면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역의 관계에 있으니).
이는 오일쇼크로 인해서 소련 정부의 재정이 풍족해지며 아르헨티나 농산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임기 초반의 국유화 조치로 일자리가 일단은 많이 늘었던 것에 기인한다.
대통령에서 쫓겨난 이후 스페인으로 망명했고 스페인에 망명한 이후로 정치활동을 포기하여 스페인에서 계속 눌러 살고 있다. 다만 아르헨티나에 아주 안 온 건 아니고 아르헨티나가 민주화 된 이후로 몇번 온 적이 있기는 하다.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집권한 이래 1970-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이루어졌던 사건사고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2007년 아르헨티나에서 반체제 인사의 의문사 사건과 관련해서[2]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이사벨 데 페론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스페인 정부에서 거절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재임기간 동안 군부에 이래저래 휘둘리면서 반체제 인사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