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

 

'''이소선
李小仙 | Lee Sosun
'''
<colbgcolor=#878787><colcolor=#fff> '''출생'''
1929년 12월 30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1]
'''사망'''
2011년 9월 3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종교'''
개신교
'''가족'''
아버지 이성조, 어머니 김분이
1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전상수
아들 전태일, 전태삼, 딸 전순옥, 전태리
'''소속 정당'''

'''경력'''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장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결혼
3. 노동운동
4. 사망
5.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노동운동가. 박정희 정부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모친이다. 아버지 이성조 열사는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바가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29년 12월 30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출생이다.[2]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작은 선녀라는 뜻의 '소선' 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이소선의 유년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셔 어머니 혼자 집안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고, 어머니는 자신의 첫째딸을 어쩔 수 없이 친정집에 보내어 그야말로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3]
이후 이소선의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이소선은 이곳저곳 다니며 힘들게 살았고, 어떤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 동네에서 찬밥 신세를 받고 만다. 어머니가 동네에서 소작농으로 활동하며 겨우 먹고 살았지만 이소선은 이러한 어머니의 심정도 모르고 투정만 부렸다.
이후 어머니는 자신보다 무려 20살 연상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소선은 어머니의 재가에 만족하지 못해 새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한편 그녀의 오빠는 서당을 다니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강했지만, 가정형편 탓에 한국에서 공부하지는 못하고 일본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그녀는 오빠와도 어린 나이에 이별하게 되어 어머니와 둘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가 공부 때문이 아닌 일제의 징용으로 인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이소선과 그녀의 모친은 말없이 눈물만을 흘렸다.[4]
이후 이소선은 자신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안 몰래 일본이 세운 학교를 다녔지만, 금방 들통나게 되어 집안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2.2. 결혼


1947년 전상수와 결혼하게 되었다. 전상수는 의류 공장에서 대구 10.1 사건 등에 가담했고, 경찰의 아주 강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1년 뒤에는 전태일을 출산하게 되었다.
6.25 전쟁 직전에는 이소선은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남편, 아들과 함께 부산광역시에 내려가 자갈치시장에서 지냈고, 1950년 6월 15일에 둘째 전태삼을 출산했다. 아무래도 부산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피난민이 많아 인구가 급증했고, 이에 따라 전상수의 장사가 잘 돼서 잠시 평탄하게 살았으나, 이때다 싶어서 시작한 공장을 크게 늘린 것이 실패해 급격히 생계가 어려워졌다.
이런 사업 실패로 인해 그녀의 남편은 점점 술에 중독되고 포악해졌으며, 많은 빚을 가재를 팔아 갚았고, 가족들을 길바닥에 두고 방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1953년에는 셋째 전순옥을 출산했다.
이후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잠시 살다가 1960년 막내 전순덕을 출산했다. 그 후 다시 대구로 내려갔고, 가족들은 그곳에서 재봉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또 전상수가 시작한 사업이 망했고 그는 자식들을 때리며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이소선은 이를 보고 절망을 느꼈고, 전상수는 집을 나가버렸다. 이후 그녀는 집안의 생계를 위해 홀로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있던 서울로 올라왔고, 막내인 순덕이는 전태일이 서울로 상경하던 중에 미아보호소에 맡겨 생이별하게 되었다. 이후 이소선은 고된 노동으로 인해 하혈을 했고, 서울에서 번 돈의 상당 금액을 병원비로 충당했다.
이후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각종 힘든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고,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정착하며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모였고, 전상수는 이소선에게 술을 절대 다시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한편 가족들이 정착했던 판자촌에 화재가 나며 졸지에 이재민이 되었고, 이소선은 이때의 충격으로 눈이 일부가 멀었으며, 가족 모두가 함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후 가족들은 쌍문동으로 이주했고, 전태일도 이소선과 함께 평화시장의 미싱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남편 전상수는 1969년에 지병으로 작고하고 말았다.
전태일과 이소선이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근무하던 도중, 전태일박정희 정부의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분신했다. 급히 옮겨진 병원에서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고, 이소선은 죽어가는 아들에게 몸이 가루가 되어도 끝까지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했다.
[image]
이후 이소선은 아들의 목숨과 맞바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3. 노동운동


노동운동 시작 후, 이소선은 노동교실을 개소하며 노동자를 상대로 노동교육을 진행했고, 민주화운동도 전개했다. 이후 전두환 정부 등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동운동을 이어나갔으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등의 민주화운동도 계속했다.
이후 노동사고로 인해 사망한 노동자들의 장례위원도 지냈으며, 각종 노동운동 현장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노동자의 어머니' 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말년에도 노동운동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참여해 함께 했으며, 비정규직 문제 해결, 노동시간 단축 등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4. 사망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이후 2달여 뒤인 9월 3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에 각종 정·재계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많은 노동자 및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2020년 11월 12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앞두고 그녀의 묘역에 방문해 참배했다.#

5. 기타


  • 그녀를 모티브로 '어머니' 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 그녀의 딸인 전순옥도 노동운동을 했고, 제19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다.

[1] 구 경상북도 달성군[2] 부친이 호적에 늦게 등록해 호적상 1930년으로 되어있다.[3] 이소선의 언니는 이후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고, 1964년에 사망했다.[4] 헤어진 오빠와는 36년만에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