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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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노동자, 노동운동가. 1960년대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 권리를 위해 노력하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자 22세의 나이로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분신하였다.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는 행위가 전혀 없었더라도 정말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TV보면 맛집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걸 담당했던 PD가 평화시장 근처의 감자탕집을 한번 취재하러 갔대요.
문득 그곳이 평화시장이니까 그 할머니께 물어봤다는 거죠.
"혹시 전태일 아시나요?"
"잘 알지. 우리 진짜 단골이었는걸..."
그런데 여공들을 데리고 오면, 항상 자기는 안 먹고 여공들만 사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짜로 줘도 안 먹더라는 겁니다. 다음에 혼자 왔을 때 이 할머니가 물어봤다는 거죠.
"내가 너한테 돈 받을까봐 안 먹었냐? 바보처럼..."
전태일 열사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전태일: "아이들한테 먹었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안 먹었다는 게 탄로날까봐... 먹었다 그러고 안 먹고 있었다는 겁니다...
『역사저널 그날』 283화 中...#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노동 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시민 전체가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 계층, 대학생들, 당사자 집단인 노동자 계층 전체 등 사회 전체가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계기로 각성하게 된 중대한 계기를 마련했다.
2. 생애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척 다정다감한 성격에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산으로 이사갔다가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 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4.19 혁명 직후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 가족이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밥을 못 먹는 일은 약과에 불과했으며 이는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절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 보조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재단사로 일하던 중 재단 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박봉,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전태일은 모범 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 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던 업체들에게 직공들의 근로 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자본금이 부족하여 좌절되었다. 사업 기획서까지 만들어 두고 작업장 배치와 근로 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두었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내용을 독학하려 하였으나 근로기준법 전문이 국한문 혼용인지라 내용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텐데..."라며 한탄[3] 했다고 한다.[4][5] 『전태일 평전』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현실 참여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며 읽었는데 말이 해설서지 법률 용어 투성이였기에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전태일에게는 악전고투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던 '광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나이 든 대학생을 자주 찾아가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해설서 한 페이지 읽는데 하루를 꼬박 새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읽어낸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6] 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 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재단사로 취직이 되어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해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 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벽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로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당시 한국에는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형식적이었으며 감독 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7] 이에 깊은 좌절과 비애를 느낀 전태일은 결국 죽음으로 그 뜻을 알리는 길을 택하게 된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찢겨지고 짓밟히자 전태일은 정확히는 평화시장에서 남쪽에 자리한 동화시장 계단에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자신이 직접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이 사회에서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자신도 불에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전태일은 그의 손에 들린 법전과 자신을 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쳤다. 이후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 측에서도 환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응급 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후에 모 대학의 한 교수님이 술회하기를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 사회상이었다고 한다.[8] 결국 그는 명동성모병원[9] 으로 옮겨졌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1970년 11월 13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유언은 "배가 고프다."였는데 전태일은 1970년 11월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은 후 2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3. 영향
전태일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 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정치적 의미에서의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장시간 열악한 근무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이 때부터 노동자와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70~1980년대의 대학생은 지금보다 훨씬 수도 적고 엘리트로의 길이 보장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10]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이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 취업자[11] '로 호도하기도 하였다.[12]
또한 노동자들 스스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자주적으로 노동조합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에 따라 1970년대 중에 청계피복노조 이외에도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세워져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운동한다. 이렇게 1970년대에 세워진 민주 노조는 대부분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 집약적 사업장 위주로 세워졌으며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대거 세워지기 전까지 대한민국 노동 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후 그의 사망 후 그의 가족들은 모두 노동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은 아들 전태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들, 딸들의 말을 지켜주기 위한 어머니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한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로서 이소선은 '청계천 노동자들의 어머니'[13] 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전설이 되었다. 아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청계피복노조 등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 유가족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의식 불명에 빠졌다가 2011년 9월 3일 작고하였다. 그녀의 말년의 삶을 다룬 영화로 태준식 감독의 '어머니'가 있다(아래의 영화 '어머니'와는 다른 작품). 태준식은 노동 운동 영상 제작 그룹인 '노동자뉴스제작단'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쌍용자동차 공장 점거 파업과 그 이후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당신과 나의 전쟁' 등이 대표작이다. 그의 동생들 역시 노동운동가[14] 로 여러 고초를 겪었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 박사도 오빠의 뒤를 따라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어 19대 국회의원직을 활동했으며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의 29번, 15번째 주자로 연설했다. 남동생 전태삼도 노동 운동에 참여하며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전태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모란묘지공원에 있는데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묘지도 근처에 있다. 모란묘지공원에는 그 외에도 문익환, 조영래, 박종철(가묘) 등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운동가들의 묘지들이 모여 있다.
2020년은 '전태일 열사 50주기'로 각종 단체, 정부, 미디어 등에서 그의 삶과 노동 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그의 정신을 기리며 2020년 11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는 노동계 최초#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4. 어록 및 저술 기록
4.1. 어록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분신 당시 외친 말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 일기 中...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깎아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려야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적혀진 유서[15]
[16]
4.2.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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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17]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읍니다.[19]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20] 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 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 할 수 없읍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읍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읍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읍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읍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읍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4.3. 모범업체 계획서
4.4. 수기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1969년 겨울의 일기 中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1969년 12월 31일 수기에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의 수기에서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아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삼각산에서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69년 12월 31일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1970년 초의 소설작품 초고에서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지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1969년 9월의 수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