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노동당

 


[image]
'''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
'''약칭'''
הָעֲבוֹדָה‎
'''한글명칭'''
이스라엘 노동당[1]
'''당수'''
Merav Michaeli
'''창당일'''
1968년 1월 23일
'''이념'''
사회민주주의
좌파 시온주의
양국 방안
'''스펙트럼'''
중도좌파
'''국제 조직'''

'''청년 조직'''
이스라엘 청년 노동당
'''유럽 정당'''
유럽 사회당(옵저버)
'''의석 수'''
2석 / 120석
'''홈페이지'''

1. 개요
2. 상세


1. 개요


이스라엘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중도좌파 정당. 창당 이후 이스라엘 정치사를 주도했던 정당으로 20세기까진 우익 성향의 국민자유운동(리쿠드)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었다. 다만 21세기 들어선 세가 약화되어 블루와 화이트(청백동맹), 예쉬 아티드-텔렘 등에 지지층을 내준 경향이 있다.
국민자유운동을 흔히 "리쿠드"라고 부르듯이 노동당 또한 "하아보다(הָעֲבוֹדָה)"하고 부르기도 한다. '시온주의 연합'이라는 정당연합을 대표하는 정당이기도 하다. 국내나 이슬람권에서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이스라엘 우파들에겐 친이슬람적 집단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2. 상세


1968년에 창당되었으며, 2018년부로 창당 5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2] 창당 이후 1977년까지 이스라엘 정계를 주도했으나, 이후 리쿠드에 정권을 내주면서 다소 힘이 약해졌다. 그래도 1980년대 다시 재집권하는 등 1990년대까진 집권여당과 야당을 왔다갔다하며 정국을 주도했다. 덕분에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인 골다 메이어, 그리고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던 거물인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등 이스라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전직 총리들을 배출한 경력이 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피해자들이나 이슬람권의 입장에서는 통합당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시오니즘 정당이지만, 리쿠드식 극단적 반이슬람주의엔 반대한다. 일단 1국 2체제를 지지하고 90년대 이후부터는 리쿠드식 무자비한 팔레스타인 탄압에 반대하고 있다.[3] 경제관 등 내치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 유럽보다 더 사회주의적인 시각을 취하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로는 힘을 못 쓰고 있다. 그나마 2015년 총선에서는 19석을 얻었으며 시온주의연합으로 확장하면 24석이나 되며 국민자유운동의 30석과 접전을 벌이는 정도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야당으로 남게 되어 집권에는 실패한 셈이다.
2019년 4월 총선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참모총장 출신의 베니 간츠가 이끄는 이스라엘 회복당에게 지지층이 쏠리면서 두 자리 의석도 안 나오는 여론조사가 나오면서 당의 존립까지 걱정해야할 상황이다. 결국 2019년 4월 총선에서 6석까지 몰락하게 된다. 9월 총선은 1석 더 줄어들었다. 2020년 3월 총선에서는 게셰르 외 메레츠까지 합류해서 선거를 치른다.[4] 그리고 3석까지 가라앉았다. 이후 베니 간츠의 회복당 도움으로 2명이 리쿠드(...) 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코로나 사태 등으로 인한 범국가적 대응 등의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야당 지지층에선 욕도 먹고 있다.
2020년 들어서는 지지율이 3% 미만을 기록해 봉쇄조항에도 못 미치는 등 위기를 겪었고, 2021년 3월 총선을 앞두고 텔아비브 시장 론 훌다이(Ron Huldai)가 탈당하여 '이스라엘인'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그러다 선거를 앞두고 당대표가 교체되면서 다시 봉쇄조항을 근소하게 넘기는 수준으로 지지율이 회복되었다.

[1] 정식으로 등록된 당 명은 '노동당'이 아니라 '이스라엘 노동당'이다.[2] 사실 전신까지 따지면 더 올라가긴 한다.[3] 반대로 말하면 초창기만 해도 노동당의 선배격이자 이스라엘의 국부격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같은 총리들이 중동이나 남유럽권 유대인들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해 물의를 빚어 1980년대 우익 정권이 뒤늦게 사과하는 웃픈 사례도 있었다. 또 1970년대 이스라엘은 동시기 한국과 비슷하게 "계층 간 위화감 조성과 풍기문란 조장을 막는다"는 취지 하에 흑백TV만 강제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1981년 국민자유운동 출신의 메나헴 베긴이 집권하면서 컬러TV와 민영방송이 허용되었다.[4] 1년 사이 이렇게 총선이 자주 실시된건 한 당이 확실하게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정권 수립에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총선에서도 과반 정당은 나오지 않았지만, 코로나 사태까지 터지며 울며겨자먹기식의 연립정권이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