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 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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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브리어: בנימין "בני" גנץ‎
  • 영어: Binyamin "Benny" Gantz
1. 개요
2. 생애
2.1. 정치인


1. 개요


이스라엘군인으로 20대 이스라엘군 총참모장[1]이었다. 계급은 중장이다. 이스라엘군은 병력 규모가 20만 미만이어서 최고 계급이 중장이다.
이후 정치에 뛰어들여 부총리가 되었지만, 총리 후보 중 한 명이다.

2. 생애


크파르 아힘(Kfar Ahim)에서 1959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 간츠는 1977년에 이스라엘군 사병으로 징병되었고 공수여단(Paratroopers Brigade)에서 공수부대원으로 근무했다.[2] 1979년에는 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3] 육군 출신이지만, 공군의 특수부대인 샬다그 부대(Shaldag Unit)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공수여단장, 북부사령부 예비군사단장, 레바논연락단장, 유다-사마리아사단장을 거쳐 2001년에 이스라엘 북부사령관이 되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는 총참모차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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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5일에 국방장관 에후드 바락(Ehud Barak)이 그가 20대 총참모장이 될 것이라 밝혔고 2월 14일에 취임했다.
2011년 7월에 추도기도에서 신을 언급한 것 때문에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기억할 것이다(Yizkor 'Am Yisrael)"라고 읽어야 할 부분을 "신이 기억할 것이다(Yizkor Elohim)"라고 읽은 것 때문.[4]
참모차장 시절에 집을 개조하다가 공유지를 침범했다는 부동산 관련 의혹이 있다. 그리고 유다사마리아사단장 시절에 자신의 관할에서 발생한 국경수비대 마닷 유수프(Madhat Yusuf) 상병 저격사건[5] 당시에 책임을 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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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8일에 공수여단 장병들과 훈련을 하는 간츠 중장.
총참모장 재임 시절 2012년 11월,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으로 두 차례나 하마스와 전쟁을 벌였다. 전자는 1주일만에 공습만으로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후자는 지상전까지 벌이며 1개월 이상 장기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가자 지구 주민들의 피해도 커져서 국내외의 비판을 받았다.
2015년에 전역해 민간인이 되었다.

2.1. 정치인


2018년 12월이스라엘 회복당을 창당하고 당대표로 취임한데 이어, 2019년 2월 21일 중도계열 정당들을 모아 정당 연합체인 청백동맹을 구성해 역시 대표 자리에 올랐다.
2019년 2월에는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는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2019년 4월 총선에서 베냐민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당과 같은 35석을 얻었으나 군소정당들이 네타냐후에 붙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집권은 힘들게 됐다. 그러나 신인 정치인으로써는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6] 이후에도 이스라엘 차기 총리로 물망 오르고 있으며, 2019년 9월 총선에서 90% 이상 개표된 상황에서 청백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돼 '''총리 후보가 될 확률이 높아졌다!''' 한편, 1992년 이츠하크 라빈 이후 아랍계 정당 연합이 이스라엘 총리 후보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런 의석을 합쳐도 극우 정당인 베이테누당의 도움 없이는 55석밖에 안되기 때문에[7], 23일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이 리쿠드당과 청백당의 대연정을 구성해 간츠 대표가 네타냐후 총리와 교대하는 방식으로 총리에 오르는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간츠와 청백당은 이런 구상을 거부했고 리블린 대통령은 우파 연합이 현재 확보한 의석 수가 더 많다고 판단, 현임 총리인 네타냐후를 우선 차기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다시 연정 실패하여 다시 징속받았다.# 하지만 실패하여 다시 대통령으로 넘겨졌다.# 결국은 3번째 총선으로 넘기게 된다.
3번째 총선 앞두고 보수층 얻기 위해 요르단강 병합 발언을 하였다.#
3월 3차 총선에서는 3석 차이로 패배했지만, 크네세트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4월이 되어서 협상 끝에 리쿠드당과 거국 내각을 만들기로 하고 2021년 10월 이후 네타냐후의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오른다. 내각 장관 직은 절반을 약속받았는데 위기의 네타냐후를 상대로 국방, 법무, 경제 등 핵심 부처에 대하여 자리를 확보했다.
이에 대한 중도 성향 지지층의 반발이 상당한데, 당장 청백당에서 간츠의 결정을 거부하고 예시 아티드(13석)와 텔렘(3석)이 연합에서 이탈해 청백당의 의석수가 32석에서 15석으로 감소했다. 4차 총선 방지 및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이 명목이긴 했지만 간츠의 권력욕이 네타냐후의 범죄 행위를 처벌할 기회를 잃게 만들고, 반 네타냐후 진영의 연대를 붕괴시켰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5월 17일. 내각 구성에서 부총리로 선출하였다.

[1] 역대 이스라엘군 총참모장은 절대 다수가 육군 출신이며, 간츠도 마찬가지다. 공군은 18대 댄 할루츠(2006~2007년) 포함해서 2명 뿐이고, 해군 출신 총참모장은 아직 없다.[2] 역대 총참모장 20명 가운데 공수여단을 거친 사람이 7명에 이른다.[3] 이스라엘군은 한국으로 치면 간부사관이 활성화된 탓에 사병 출신 장성이 많은데 이를 두고 아예 사관학교학사장교가 없는 걸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는 이스라엘 육군이 사관학교 대신 지원자를 대상으로 병과별 간부 육성 학교를 운영하고, 그 이상의 장교들은 국방대에서 교육시키는 독특한 양성 제도를 운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대신 직업군인 비중이 육군보다 높은 해/공군은 3년제 사관학교를 운영한다.[4] 이스라엘은 유태교를 믿는 유태인이 인구의 대다수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교를 지정하지 않는 세속국가다.[5] 당시 19세로 팔레스타인 스나이퍼에 의해 목 저격을 당해 쓰러졌다. 이름을 보면 이스라엘 아랍인으로 보이는데 아랍계들은 정규군 대신 준군사조직인 국경수비대 등으로 징병 의무를 대체하는 편이다. 당시 국방장관과 총참모장은 직접 구조대를 보내는 대신에 팔레스타인 당국에게 해당 인원을 대피시키라고 지시했다. 구조대는 늦게 도착했고 4시간 동안 과다출혈로 방치된 유수프 상병은 사망했다.[6] 간츠 본인은 정치 신인이지만 야이르 라피드 전 재무장관 등 정치 배테랑도 당 내 일부 있다[7] 내각 구성을 위해서는 연립정당의 의석 합계가 과반인 61석 이상이 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