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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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수말당초의 주요 군웅 중 1명으로, 단명정권인 이오(李吳)의 유일한 군주이다.
2. 생애
이자통은 동해군(東海郡) 승현(丞縣) 출신으로 집안이 빈천하여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다. 이자통은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고, 집에 쌓아놓은 재산이 없었으며,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았다.
수나라 대업 연간은 양제가 3차례의 고구려 원정을 모두 실패하고 농민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 수나라에 혼란이 가중된 시기였다. 이자통은 농민봉기의 물결에 뛰어들어 대업 11년(615년)에 초왕(楚王)을 참칭하였다. 좌재상(左才相)이라는 인물이 스스로 박산공(博山公)을 칭하며 강남을 점거하였는데, 이자통은 좌재상에게 귀부하여 자신의 무력을 좌재상에게 중시받았다. 이자통은 도적에게 함락된 향인들이 있다면 반드시 보호하였고, 자애롭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이 이자통에게 귀부하여 반년도 안되어서 1만명이 모였다.
하지만 좌재상이 이자통을 시기하자, 이자통은 좌재상의 곁을 떠나 두복위에게 합류하였다. 두복위가 내정(來整)에게 패배하자, 이자통은 두복위의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해릉으로 달아났고 스스로 장군을 칭하였다. 이윽고 이자통은 우문화급의 부하 진릉을 강도(江都)에서 습격하였다. 궁지에 몰린 진릉은 심법흥과 두복위에게 각각 군대를 요청하였다. 이자통은 부하로부터 심법흥과 두복위를 이간시키려는 계책을 받아, 사람들을 모아 심법흥의 군대로 위장시켜 두복위를 습격하였고, 여기에 두복위는 심법흥이 자신을 습격했다고 오인하여 심법흥을 공격하였다. 이자통은 심법흥과 두복위가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에 강도를 공격하였고, 진릉은 결국 두복위에게로 달아난다. 이자통은 강도에 입성하여 진릉의 무리를 포로로 붙잡았고 국호를 오(吳)로 정하였으며, 명정(明政)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때가 619년이었다.
황제를 참칭한 이자통은 직후 심법흥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진릉을 손에 넣었지만, 두복위의 부하인 보공석에게 패배하였다. 게다가 이자통의 군량도 다하여 이자통은 강도에서 도망쳤다. 이자통은 군대를 다시 모아 심법흥을 완전히 물리쳤지만, 두복위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으니, 이때가 621년이었다. 당나라의 고조 이연은 이자통의 죄를 묻지 않고 그를 후대하였다.
622년 두복위가 입조하자, 이자통은 부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자통은 이 말을 하고 도피행을 벌이다가, 결국 남전관에서 관리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두복위가 이미 장안에 왔고 강동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우리 부하 대부분이 강외에 있으니 그곳을 접수한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