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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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서편(圖書篇)》[3] '''}}}수나라와 당나라가 흥하고 망한 것은 모두 이 고구려와 관계가 된다. 수문제가 새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그 당시에 돌궐은 이미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였다. 양제가 순시하다가 친히 돌궐의 장막에 이르러서 우연히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배구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드디어 이 화를 일으켰다.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합해진 것을 보고는 역시 고구려에서도 조공을 바치게 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천하 대란의 단서가 여기에서 발단될 것은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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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 수(隋) 왕조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의 문제 및 양제와의 2대에 걸친 긴 싸움으로 각각 598년, 612년, 613년, 614년 등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특히 2차 원정은 양국 모두 국가의 모든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의 양상을 띤 전쟁이었으며, 한국에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일어났던 전쟁으로 매우 유명하다. 일각에선 삼국통일전쟁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사 전근대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쟁''''이다.
중국 왕조의 기록에는 대대손손 반면교사로 등장하는 큰 교훈을 준 전쟁이며, 외부의 시선에서 보더라도 중국 통일왕조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와 함께 그 엄청난 힘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등 많은 시사점이 존재한다.
2.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운
수나라의 수문제는 589년, 남조 시대 마지막 왕조인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하였다. 중국을 통일시키고 내치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문제는 장성 이북에 있던 돌궐과 고구려를 장차 중국을 위협할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여 이들을 주시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는 곧 양국 간에 신경전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서로에게 재차 사신을 보내어 지리 지형을 살피고 동태를 파악하는 등 첩보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2.1. 평원왕
수나라가 중국 대륙 통일로 모은 내부의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장 개피를 보는 것은 물론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평원왕(平原王) 시절부터 수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보 탐색과 돌아가는 모양새도 어느 정도 파악은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81년부터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는데, 584년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일곱 차례나 되는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하여, 기어코 수나라가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三國史記 卷第十九 髙句麗本紀 第七'''}}}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32년(590년)에 왕이 진(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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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중국 통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평원왕은 크게 두려워했고, 서둘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으면서, 대처 방법을 생각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 평원왕은 수나라에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 수나라의 무기 장인들을 빼내오기도 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수 문제 초기에는 고구려 사신들이 자주 왔는데,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한 후에는 고구려가 크게 두려워하며 곡식을 저축하고 방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점이 당시 수 문제에게 꽤나 거슬리게 보였는지, 수 문제는 옥새를 찍은 조서인 새서(璽書)를 보내 평원왕을 질책했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三國史記 卷第十九 髙句麗本紀 第七'''}}}隋 髙祖 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虚置終湏 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别遣才彦王謂 遼水 之廣何如 長江 髙句麗之人多少 陳 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
수 고조 (高祖)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질책하기를 “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지방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고 할지라도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5]
[6]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의 잘못을 질책하려고만 한다면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로 하겠는가?[7] 하여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wiki style="text-align: right"
또한 수서에 기록된 수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글을 보면 평원왕이 사람을 은밀히 보내 수나라 무기 장인들을 빼돌렸다는 사실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평원왕이 단순히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와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고국원왕 이후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베껴 온 모양새라, 평원왕의 약해보이는 모습도 의도적인 폄하를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수서》 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나에게) 주문(奏聞)하면 될 것인데, '''몇 해 전에는 몰래 와서 재화로써 이익으로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달아났소.'''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 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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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평원왕은 전쟁 준비와 함께 이 당시 쇠퇴일로를 걷던 고구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노력을 하는 모습이 기록을 통해 보인다. 당시 고구려는 안원왕(安原王) 이래로 점점 쇠퇴하던 중이었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내전과 반란도 여러 번 있었고, 특히 양원왕은 급부상한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 영토를 거의 다 빼앗겼고[8] 심지어 북제 쪽 기록으로 양원왕이 북제의 사신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런 말이 나돈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고구려의 위상이나 파워가 예전만 못하다는 식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던 시절이면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도 못했을 테니. 이러한 때 고구려 국왕으로 즉위하며,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무리한 궁궐 수리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립의 불씨가 보이는 와중에, 평원왕은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게 된다.
2.2. 영양왕
590년에 즉위한 영양왕은 평원왕의 장자로, 풍채와 정신이 뛰어나고 호쾌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수나라가 강대해지고 수나라의 포섭이 이어지자, 일부 속말갈(속말 말갈이라고도 한다.)의 무리가 고구려를 뒤로하고 수나라에 합류했다. 이때 추장인 돌지계(突地稽)의 아들이 고구려-당 전쟁과 나당전쟁 때 나타나는 당나라 지휘관 이근행(李謹行)이다. 또한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렸다. 또한 첩보를 통해 수나라가 고구려와 다른 나라들을 정벌할 군대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는 계속 수나라의 팽창과 영향력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앞의 위협적인 국서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 통일로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돌궐과 토욕혼은 물론 베트남, 백제, 신라 등 주변국들로부터 동등한 위치가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로써 조공을 받는 등 주변국들은 스스로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수 문제는 만족하지 못했다. 바로 동북아시아 북방의 맹주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변국들은 수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뜻으로 조공도 바쳐 일찌감치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오직 고구려만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조공도 거부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위에게는 그렇게 매년 수차례씩 조공을 하던 고구려가 왜 더 강대한 통일제국인 수나라에게는 조공을 거부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삼국사기나 위서의 내용과 달리 일반적인 조공관계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에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륙군 30만 명을 은밀히 준비하는 한편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수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라는 것과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함은 물론 만약 조공을 거역할 시에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할 시 친필 내용대로 수륙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선제 공격을 한 건 영양왕의 고구려군이었다.
수나라의 반응을 한번 보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요서(遼西)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다. 이때 영양왕은 말갈/거란의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했는데, 정황상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형태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당시 임유관에는 위충이란 장수가 지키고 있었는데 위충은 이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냈고, 이후 문제에게 보고한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도발에 무척 진노한 문제는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기로 결심한다.
3. 1차 고구려 - 수 전쟁
문제는 다섯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원수로 삼고, 장군 왕세적(王世積)에게 30만 대군을 통솔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진격하여 요동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수 문제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고 장마와 태풍 등으로 30만 중 8~9할이 전멸하여 교전 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진다.
혹자는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을 암시하는듯한 기록들을 근거로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기도 한다.[10]
진주 강씨 족보에는 진주 강씨의 시조 강이식이라는 장수의 전승이 있는데 신채호는 그의 저거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 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 주장한다.[11]
수나라 기록을 신뢰한다면 영양왕이 스스로를 '''요동 분토(糞土)의 신하'''로 칭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한다.[12] 표문을 받은 수문제도 원정을 제대로 망쳤지만 체면만은 그럭저럭 차리고 퇴각하였다.[13]
4. 2차 고구려 - 수 전쟁
4.1. 수 양제의 야욕
패전에 큰 충격을 받은 문제는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을 일체 중단시켰다. 고구려에 대한 대우를 전쟁 이전에 하듯이 했고, 《수서》의 기록에 다르면 영양왕도 해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14] 수문제는 아들 수양제와 달리 대운하 공사도 백성들이 힘들다고 하자 필요한 건 알지만 중단하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세율을 낮추고 평시 근검절약한 보기 드문 성군이었다. 전쟁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 데 실패해서 피만 본지라 나중에 또 공격할 생각이었을지 몰라도 한동안은 지출로 소모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기르는 데 신경쓴 것 같다. 또한 얼마후인 602년도에 베트남 원정을 단행했는데 베트남 원정은 전 리 왕조 2대 국왕인 리펏뜨를 붙잡아 참수형에 처함으로써 베트남을 다시금 중국의 통치영역에 포함시키며 고구려 원정 패배로 인한 후폭풍을 그럭저럭 수습할수있었다.[15]
그러나 604년에 수나라에서 크나큰 변고가 일어나게 된다. 명군 수 문제가 사망하고, 모략으로 형을 몰아내고 태자가 된 양광이[16] 뒤를 이어 새로운 수나라의 군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수 양제다. 아버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허영심이 참으로 남달랐던 수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수했고, 대운하를 다시 건설한다.[17] 그리고 주변국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활동이 시작된다.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이렇게 정복 사업에 성공한 양제가 선황 시절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고구려를 그냥 놔둘 리 만무하였다.
- 수나라의 국력은 아버지 문제의 노력으로 아주 막강했는데, 애초에 수 양제가 그렇게 해처먹을 수 있었던 것도 나라의 저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당태종 시기나 심지어 당고종(唐高宗)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 수를 뛰어넘지 못했다. 역으로 말하면 수양제는 그렇게 수 문제가 고생하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든 수나라를 나락에 떨어뜨렸다는 것이다.[18] 결국 수 문제 시절을 따라잡은 건 몇 세대 뒤인 당현종 초기였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동돌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607년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 양제가 계민가한을 직접 만나러 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민가한은 고창국과 함께 수나라 조정에 입조를 했던 적이 있었고, 수나라의 국력을 몹시 두려워했기에 차마 숨길 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 양제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수 양제에게 이렇게 간언한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선황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고구려의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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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양제는 우홍(牛弘)을 통해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든 까닭에 친히 그 장막에 왔소.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시오. 보존과 양육하는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할 것이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들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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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4.2. 유례 없는 준비
대업(大業) 7년(611년) 2월. 양제는 양주 땅에서 백관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푼 다음, 원정을 위해 북상했다. 양제는 화려한 용주(龍舟)를 타고 장강에서 운하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로 나간 다음, 영제거(永濟渠)라는 새로운 운하로 들어가 하북의 탁군[22] 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발된 사람 3천여 명이 걸어서 배를 따랐는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로 열에 한둘은 죽었다고 한다. 수 양제는 입조를 하지 않으면 탁군에 가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이는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4.2.1. 백만 대군이라는 숫자는 사실인가?
- 적극론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총 병력은) 113만 3800명이고, 200만이라 (과장해) 불렀으며, 식량 운반자는 그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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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 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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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구려로 쳐들어온 수나라 군대의 규모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작전은 베르됭 전투가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인력을 동원한 작전이라고 하니[25] 얼마나 큰 원정군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수나라군 병력 113만은 그렇다 치고, '그 두 배의 보급 병력' 기록은 사실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도 정확한 답을 할 수 없다.[26] 후술하겠지만 편제 기록이 자세한듯 하면서도 불완전한 부분이 많아 113만 명의 면모를 정확히 파악하긴 힘들다. 다만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113만이라는 숫자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냥 조작이라고 편하게 넘어가기엔 113만 명이라는 숫자와 편제 기록이 너무도 자세하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고구려 원정의 타격으로 수나라가 멸망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113만이라는 숫자를 완전히 무시할 근거는 없다.
- 소극론: 데이비드 A. 그라프의 견해
요컨대 《수서》에 언급된 1,133,800이란 전투병 수치는, 실은 611년 당시 수나라 정부가 징모한 사람들의 총수치에 가까울 것이며, 실제 탁군이나 룽커우에 모여들어 다음해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실병력의 숫자는 이보다 적을 것이다. 113만이란 수치의 뒤에 추가된 절반 가량의 수치가 외려 진짜 원정군의 숫자에 더 아귀가 맞으며[27] , 이는 588년 진을 멸망시킬 당시 동원된 수나라 군대의 숫자와도 잘 들어맞는다.[28] 또한 수 왕조의 공식 역사서는 수를 이어 들어선 당 왕조 학자들의 손을 거쳐 편찬되었다. 당 왕조의 학자들은 수 양제를 '악독한 마지막 폭군'으로 그리고자 했고 또한 군대의 숫자를 부풀림으로써, 당 제국은 수양제의 궁극적 몰락에 더 명백한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29]
결론적으로, 사서의 기록과 이견을 절충하면 병농일치에 따라 최대 113만 가량의 백성을 차출해 놓고, 실제 원정에는 그 절반인 60여만 정도만 고구려에 파견된 것이 아닌가? 정도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단언'한 것은 아니고, 매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113만이 실제 중국 전역에서 모집되었을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으며, 다만 113만 전체가 고구려에 파견되었는지 여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주제라도 항상 신중함을 유지하는 사학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웹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는 건 그라프 한 명뿐이라는 반론도 있는 모양이지만, 전래문헌에 대한 이러한 회의는 현재 상당히 많은 중국사학자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 데이비드 A. 그라프의 견해에 대한 반론
결국 우문술이 인솔했다는 '9군, 30만 5000명'에서 9군은 9개 군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9개 군이 30만 5000명이었다면 1개 군의 평균 병력은 3만 3800명이 된다. 출전한 수나라의 병력은 30개 군(24군+천자6군)이므로 환산된 총 병력은 3만 3800x30=101만 4000명이 된다. 이 숫자는 113만 3800명에 근접하는 수치이므로 당시 수나라 총 병력이 100만이 넘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더구나 군사학적으로도 중국 국경 내에서 식량을 운반하는 자와 달리 각 군에 치중단 형식으로 편제된 병력이라면 전투병 유무에 관계없이 실제 병력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치중뿐만 아니라 융거, 산병까지 존재했으므로 기마대와 보졸대 외의 병력이 모조리 비전투 병력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현재로서는 113만 8000명이라고 명시적으로 기록된 병력 숫자를 무시할 이유는 높지 않은 셈이다. 다만 이러한 해석 역시 반드시 옳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먼저 별동대의 '군'이 24개 군과 병력이 다르게 편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애초에 별동대의 병력이 실제로 30만 5천 명씩이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품어볼 수 있다.
- 소극론: 임용한의 견해
- 소극론: 빅터 슝의 견해
- 결론
인구 조사상 609년경 수나라의 인구는 무려 46,019,956명에 달했으며, 이는 동시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당시 수나라는 전근대 치고는 상당히 높은 행정력을 자랑했으며, 고도로 발달된 관료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인구, 경제력과 행정력을 국가가 한계에 달할 때까지 쥐어짠 결과물이 고구려 원정이었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 패전으로 끝날때까지 전선에서도 그 덩치를 내부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많이 나온다. 113만이라는 숫자에서 실제 전투병의 비율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통일 중국 왕조의 힘과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발달되었던 정교한 관료 시스템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이렇게 대규모 보급 부대만 가지고 그때그때 일일이 다 보급하기엔 스케일이 커서 시간적인 부분도 오래 걸리는 데다 보급 부대만 가지고는 안심이 안 되었는지 수나라는 식량 보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각의 병사들에게 군수 물품과 군량미를 제공하여 군장으로 차고 다니게 했는데, (1인 1군장) 혁신적인 보급 방법이라기보다는 너무 숫자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게 맞는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실전에서는 독이 되었다. 병사 한 명에게 너무나 무거운 군장을 지운 탓에 병사들이 진군하다가 탈진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며, 심지어는 군수 물품을 버리면서 진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리한 전쟁은 당시 로마 멸망 이후 등장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수나라를 파탄케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614년 마지막 침공 이후 수나라의 국력은 처참하게 고갈되어, 전국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이어지고 세수가 걷히지 않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4.2.2. 시체로 이뤄낸 전쟁 준비
그런 수나라 군대가 탁군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또한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여 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이 내려갔다. 그래서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일하느라 전체의 3·4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하도 오랫동안 물속에 있어서 하반신이 썩고 구더기가 슬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32] 천하에 명령이 떨어져 탁군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드디어 군량을 수송했다. 여양(黎陽)과 낙구(洛口)에 큰 식량 창고군이 있어 그곳에서 배를 이용해 탁군으로 실어 날랐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천 리였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소동이었다. 육로로 가는 병대들은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다. 밤에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의 상황을 사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군대만이 아니었다.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와 차부가 60만 명이나 징용되었는데 길은 멀고 험했으며, 두 사람이 쌀 석 섬을 날랐는데 그것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장거리 원정의 최대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수송 부대도 이동하면서 보급품(식량, 사료, 석유 등)을 소모하기 때문에 실제 최전선의 전투 부대가 요구하는 분량의 몇배를 실어날라야 한다. 전근대 시대 원정에서 강이나 바다 등 수운의 중요도가 큰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선박은 상대적으로 적은 보급품을 소모하면서 많은 양의 분량을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실제 2차 대전 때도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초반에는 쾌속 진격을 했지만, 나중에는 석유 보급 트럭이 최전선까지 가는 동안 적재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석유를 사용하는 코메디가 벌어졌다. 노르망디 항구에는 본국에서 가져온 석유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최전선에선 석유가 없어서 진격이 정지되어버렸다.'''죽은 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고, 썩은 내가 거리에 진동하여 천하가 소동했다.'''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 받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도망치면 불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났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떼를 지어 비적이 되었다. 심지어 민가에서는 '''"요동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611년경 나온 것으로 자치통감에 기록된 당대의 반전가요, 제목은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 ''''요동에 가서 떠돌다 죽지 말자는 노래''''이다. 산동 지역 장백산에 은거하는 지세랑(知世郎)[33] 을 자처하는 왕부(王薄)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612년 음력 1월, 수 양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총 공격을 명령했다. 아래는 수 양제가 직접 작성한 '''선전포고문'''이다.長白山頭知世郎 純著紅羅錦背襠 장백산 아래에서 나(왕부)는 비단옷 대신에 농부의 옷을 입었다.
橫槊侵天半, 輪刀耀日光。 긴 창이 하늘의 반을 가리우고, 전쟁무기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네.
上山吃獐鹿, 下山食牛羊。 산 위에서 노루와 사슴을 잡고, 들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평화롭게 지냈는데.
忽聞官軍至, 提劍向前蕩。 문득 들으니 관군이 도착하여 칼을 들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 하네.
譬如遼東豕, 斬頭何所傷。 사람들이여, 요동에서 죽는 것을 깨달아라. 참혹하게 머리가 잘리며 부상당한 모습을.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딱따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의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고,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이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𦖮[34]
)·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wiki style="text-align: right"
4.3. 전쟁의 시작 - 요하 도하 전투
수 양제는 총 24군으로 나뉘어 진격하게 했으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평양이었다.
- 좌 12군: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 우 12군: 점선(黏蟬)수군, 함자(含資)수군, 혼미(渾彌)수군, 임둔(臨屯)수군,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하여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잠입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612년 음력 2월, 수 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러 군대가 다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 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수나라의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이 공병 작업은 차질을 빚는데, 첫 번째 시도 때는 부교를 세 개 만들었으나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 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고[35] 이로인해 1차 도강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강 중인 수나라군을 고구려 군대가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공격하자 큰 피해를 받았다. 수나라군은 맥철장(麥鐵杖) 등의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수 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게 했고, 하조가 이틀 만에 이를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10,000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확실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
4.4. 요동성 전투
수나라 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기록을 보면 요동성 내의 군사들은 가끔씩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불리해지면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버티기로 나갔고, 수나라 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부터 세웠던 전역의 그림이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도하에 성공한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하며,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상당히 강한 저항을 했고 '''전쟁 내내 3개월간 수 양제의 공격을 버텨냈다.'''
흔히들 요동성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하지만 요동성은 '''평야성'''이다. 성벽의 흔적이 남지 않아 정확한 성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요동성 무덤의 벽화를 보면 이중성이었음은 확인이 된다. 만약 요동성이 평야에 지어진 게 사실이고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면[36] 요동 성주와 요동성 장병들은 더더욱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인데, 평지성은 아무래도 방어가 힘들뿐더러 성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성벽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방어 측에게 불리해지기 때문이다.[37]
당장 고구려만 해도 이런 이유로 평지의 평시 수도와 산지의 전시 수도로 이루어진 이중 수도를 두었던 역사가 있으며, 여요전쟁 및 여몽전쟁 당시의 고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등이 적군의 침략 앞에서 수도를 버리고 나주나 강화도, 의주나 남한산성 등으로 가서 맞설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 또한 바로 이것이다.
근데 이 요동성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아무리 양제가 덜떨어지게 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고려시대, 조선시대와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끝내 양제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수양제 항목에 나오듯이 고구려에서도 중요 지역이라서 화강암을 통으로 깎아 성벽을 떡하니 올리는 식으로 방어력을 높이기는 했지만,[38] 당태종이 요동성을 뚫은 데서 볼 수 있듯 절대적인 이점도 아니었다.[39] 결국 이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하나의 기적이었던 셈.
이들의 눈물나는 분전 덕분에 이후 여수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후에 벌어지는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는 당태종이 침착하게 두들겨대는 통에 무너지는데 여기서 수당 지휘부의 삽질 여부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뭐 당태종은 하늘이 내린 장수(천책상장)라 불릴 정도로 능력차이가 크기도 했지만. 아무튼 요동성은 구조적으로 여러 불리한 조건이 있어서, 사실 평양성 조정에서도 요동성이 저리 오래 버티리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다만 요동성은 지금의 심양 언저리에 있는데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으며, 삼국시대 때 요동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고 있다가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위진남북조 시대 때 혼란기를 노린 광개토대왕이 요동으로 진격하면서 빼앗은 성이다. 공손씨가 멸망할때 사마의가 요동을 정벌했는데 이때 사마의가 요수와 양평(요동성)을 정벌하는데만 100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백일 정도인 3개월을 버틴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마의의 요동정벌군은 불과 4만 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수나라의 군세는 100만이라 자칭할 정도로 막강한 군세라는 점에서 비교를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수나라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추산하기 어렵지만 전투병이 113만이고 보급대는 그 배라고 했다. 그러나 보급대는 상시 전투병과 함께하진 않으므로 저 두 배라는 보급대를 연인원으로 보면 지속적인 원정 인원은 200만 정도로 잡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수나라 군대 200만 정도면 당시 중국 인구의 5% ~ 7.7%에 해당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청년층의 남자라는 것이다. 그들만으로 전 인구의 5% ~ 7.7%를 동원했으니 전쟁을 오래 지속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위에서 나온 사마의의 요동 정벌군도 4만 명을 동원했을 뿐인데도 원정 거리가 길어서 조정에서 실행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정도였는데 하물며 100만 대군이라면...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후에 그 유명한 '''우중문 별동대'''가 구성되는 것이다. 요동성이 끈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다급해진 수 양제는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위시한 35만의 별동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고구려가 방비도 철저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고구려의 계략이 제대로 먹혀 들었던 전투가 바로 요동성 공방전이다.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수나라 군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했는데, 최고 통수권자인 양제가 친정을 와있는 상황이란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연히 일선 부대 지휘관에서 황제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 또 황제가 신료들과 의논하는데 시간 소요,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하든지, 아님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든지 등의 결정이 내려져서 다시 일선 부대 지휘관까지 명령이 전달되는데 여기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등 매번 시간이 깨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은 휴전이 불가피했고, 고구려 군은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요동성의 피해를 복구하고 수비군의 손실을 메우는데 총력을 쏟았다.
이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수 양제. 그는 장수들에게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라고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급기야 요동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가 올 때, 성 내에서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장수들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다는 요동성의 의견을 성 내에 알렸고, 황제의 말을 듣고 다시 나서려 할 때면 이미 요동성은 다시 수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번 연속으로''' 했다.
수나라 군대가 병신 집단이 아닌 이상 고구려군이 장난질 하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인데도 저항을 중지하고 항복하는 적군은 대국의 아량으로 받아 줘야 한다라는 대국다운 논리로 이 장난질을 받아줬던 것이다. '''물론 그 허세질의 대가는 고스란히 자기들이 뒤집어 썼다.'''
이쯤 되면 양제 입장에서도 분노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정복 사업이 쉬웠던 탓도 있었다. 이동식 궁궐을 짓는다든지 하는 위엄찬 방식으로 여러 국가들의 항복을 받아왔던 것. 그에 비하면 고구려 정벌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고구려의 완전한 멸망인지, 국왕의 입조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종인지도''' 불분명했다. '''6월 무렵이 되어도 여전히 수나라 백만 대군은 요동성 앞에 모여있기만 할 뿐이었고, 단 한 명의 군사도 넘어가지 못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 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였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하기를 “공(公)들은 자신이 관직의 높음을 가지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서울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의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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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얼굴 빛이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 양제의 무능과 고구려군의 분전이 이어지며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근처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답답했던 양제는 요동성과 방어선을 구축한 인근의 다른 성들을 건드려보지만 요동성과 같은 전술을 썼는지 어쨌는지 효과가 신통치 않아서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했다.
4.5. 실패한 병참지원
수 양제는 요동 일대 고구려 요새들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본래의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음을 알고 육군 대장 좌우익대장군인 우문술(宇文述),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9개 군 35만 병력을 차출해 평양 직공을 명령한다. 각지의 방어선을 우회하고 평양 일대에서 수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공략하여 일격에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는 고구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으나, 이미 요동에서의 장기간의 공방전으로 인해 요동성 앞에 단순히 모여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나라 육군 역시 어느 정도 피로한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진군이 문제였다.'''
수 양제는 방패, 갑옷, 옷감, 무기, 화막(火幕, 땔감) 등을 지급하여 별동대를 꾸렸다. 문제는 앞서 말한 보급 체계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한 '''100일분의 추가 식량'''을 병사 개개인이 짊어지게 함으로써 병사들의 피로가 더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추가 식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을 가다가 이를 버리는 병사들이 다수 존재했다. 문제를 알아차린 지휘부가 버리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자 이번에는 '''땅을 파고 그곳에 보급품들을 묻어버렸다.'''
하지만 버리면 또 굶게 되니, 별동대는 길의 절반 정도 온 상태에서 식량이 떨어질 판이 되어 대강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방패, 갑옷, 옷감, 무기, 화막을 모조리 챙길 정도면 완전 군장 수준이다. 그 정도 먼 거리의 원정을 떠난다면 오래 주둔해야 하니 당연하긴 하지만... 그런 물자들을 보급부대에게 운송하게 하는 게 아니라 병사들이 짊어지라는 건 가히 미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무게다. 현대 국군에서 군장을 쌀 때, FM대로 꾸릴 경우 20kg에 육박하는 무게 때문에 엄청나게 힘들어진다. 여기에 쌀 10kg 정도에 인간 1명이 한 달 좀 넘게 버티니 30kg 짊어진다고 가정하고, '''50kg이나 되는 짐을 짊어지고 요동성부터 평양성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행군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와중에 고구려군이 게릴라를 펼치게 되면 행군의 난이도는 인간이 수행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올라간다. 더군다나 길도 평지가 아니라 곳곳에 산길이 있는 데다[40] 요즘처럼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자. 굶어죽을 걸 알면서도 군량을 파묻어 버린 수나라 병사들의 고충도 이해가 갈 것이다.
초규모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처럼 전차나 철도,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준비한 물자가 군수공장을 기반으로 한 물량전과 달리 기본 물자가 넉넉한 것도 아니며 지리적으로도 물자수송망이 불리하고[41] 보급부대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파견하려 하지 않은 채 저따위 발상을 했으니 이기지 못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사실 별동대 전술의 성격상 보급선의 유지는 불가능하다. 별동대는 곳곳에 설치된 고구려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않고 모조리 우회했는데, 이는 별동대의 후방에 고구려군을 고스란히 놔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든 싫든 별동대는 자기 보급품은 모조리 자신이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평양성 공격의 전체적 그림을 볼 때, 애초에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5천 대군은 평양성 인근에 정박해있는 내호아의 수군의 병참 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내호아가 해로를 통해 실어온 군수물자와 공성용 무기들을 지원받아 왕도인 평양성과 요동 방어선을 분단시키는게 주전략이었으며, 요동성을 함락시켜 국경 밖과 국경 안으로부터 고구려의 왕도권을 완전 포위하는 전략적 그림을 그렸으나, 공명심에 눈이 멀은 내호아가 독단으로 작전을 수행하다 수군이 궤멸되면서 보급이 완전히 끊긴 채 적진 한가운데서 고립되어버린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별동대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4.6. 을지문덕의 방문과 그의 전술에 넘어가다
이때 고구려의 재상인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일부러 성중의 곡식을 감추고 우물을 메워서 수나라 군대의 기갈과 굶주림을 부추겨 사기를 떨어뜨리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영양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을 하게 하고, 을지문덕은 적중에 들어가 '''직접 염탐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의 재상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정탐이나 하러 적진으로 들어갔던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서로 의사가 타진되었던 상태로 보인다. 수 양제가 을지문덕이나 영양왕 둘 중 하나라도 오면 무조건 잡아두라고 한 것을 보면 둘 중의 한 명이 수의 진영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요동성에서 하도 속다 보니 진짜 항복할 생각이 있으면 왕이나 재상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 오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을지문덕이 찾아간 것은 정탐이라기보다는 협상을 핑계로 한 시간 끌기 용도로 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고, 정탐이라는 것은 중국 측의 면피에 가까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을지문덕의 행동은 청나라와의 병자호란 당시 지천 최명길이 청태종과 만나 남한산성 대피까지 시간벌이를 한 것과 같은 행동이지만, 그렇다 할지언정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다.
항복 의사를 밝힐 듯 말 듯 하면서 협상을 시도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기라면 을지문덕과 같은 고위층 인사가 방문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협상 과정은 마음만 먹으면 끝도 없이 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작용한다. 우중문은 명령대로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상서우승 유사룡이 사신을 잡아두는 법은 없다며 반대했다.유사룡은 이 일로 전쟁 후에 처형된다.
아무튼 을지문덕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돌아간 후에 전혀 소식을 전해오지 않자 우중문은 그제서야 속은 것을 눈치채고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반면 우문술은 이미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갔으니 싸워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 반대하며 급기야 철군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중문은 정예 병력으로 공격하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문술이 그래도 신중론을 펴며 반대하자, 우중문은 벌컥 화를 내며 우문술을 꾸짖었다. 이때 우문술은 우중문의 지휘를 받는 처지라 별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결국 추격전이 벌어졌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드려고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다. 여기서 지휘한 것은 우문술로 보이는데, 퇴각을 주장하던 그도 계속되는 승리에 생각이 적잖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우문술도 지금은 보급 문제니 뭐니 문제가 많지만 어떻게든 평양성에 도착하면 보급 물자를 충분하게 가진 수군과 합류할 수 있을거고, 그럼 이 문제들도 다 해결될 거라고 믿게 된 모양이다. 결국 페이크에 넘어간 셈. 문제는 이 지연 전술의 효과다. 이 지연 전술 끝에 먼저 평양 인근에 도착한 수의 수군이 조급해진 것이다. 30만의 육군이 도착하지 않자 5만의 전투 병력을 가진 수군이 독자적으로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4.7. 하나 둘씩 격파되기 시작하다
수의 수군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 물론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그곳에는 고구려의 친위대와 수도의 대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사》 내호아 열전'''}}}고려의 군주 고원이 경내의 군사들로 맞서 진을 펼쳤는데 그 길이가 수십리에 달하였다. 장수들이 두려워하였다.
내호아가 웃으면서 부장 주법상과 군리들에게 말하였다. ‘본래 고려에서는 청야전술로 우리를 맞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죽기를 자처하다니, 마땅히 저들을 물리치고 아침밥을 먹으리라’
고원의 아우 고건무는 용맹과 무공이 절륜하였는데 결사대 수백을 이끌고 맞섰다..(중략).. 내호아가 크게 승리하여 평양성 외곽에 이르렀는데 참획한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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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은 여기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인 가지 않는 승리를 거머쥐고 기세가 오른 채로 평양성 앞에 접근한다. 다른 군대의 합류를 기다려야 한다는 부장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만의 병력을 가려뽑아 평양성 직공에 나선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에 병력을 숨겨두고, 다른 병력을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 병력을 풀어놓아 약탈을 하게 하면서 다시 대오를 갖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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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구려군의 낚시가 시작됐다. 평양성은 외성 - 중성 - 내성 - 북성의 4중 구조인데 군대를 숨긴채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적을 외성 안으로 유인했다. 수나라 병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 때부터 고구려군이 미끼를 문 수나라군을 낚아올리기 시작했다. 이 타이밍을 노려 왕제 건무는 500기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고 매복했던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도륙하였다.[42]
'''《수서》 내호아 열전'''}}}고원의 아우 건무가 결사대 500명을 뽑아 공격하였다. 내호아는 이로 인해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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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숨은 병력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에 불과하였다. 아군이 추격하여 배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주법상(周法尙)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아군이 후퇴하였다. 내호아가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 바닷가 포구에 주둔하였으며, 다시는 감히 머무르면서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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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측에서도 절륜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건무의 무공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장료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그의 돌격에 평양을 직공하려는 수나라의 회심의 일격은 무력화되었다. 또한 육로로 평양을 향하던 30만 육군과의 연계 역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수군이 30만 육군 별동대와 평양성 근교에서 합류, 보급 문제를 덜어주게 된다면 좀 더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우중문의 별동대는 평양성까지는 어떻게든 도착했지만 적의 도읍을 코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던 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군사를 보내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를 보낸다. 언뜻 글만 보면 적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글로 보이지만 전황을 파악 못하는 바보가 아닌 이상 글에 담긴 뜻은 명백했다. "너희는 이미 졌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 도발에 우문술도 우중문도 분노했지만,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바보들이 아니었던 그들은 더이상 작전속행이 불가하다고 판단, 퇴각을 명령했다.
수군은 방진을 치면서 후퇴했는데, 이는 물론 고구려의 공격을 염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43]
4.8. 살수대첩
7월, 수나라 군대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는데,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해오자 후위를 맡은 신세웅의 부대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하며 전 부대가 모랄빵이 나기 시작했다. 전투고 뭐고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여 리를 달아났으며, 수나라 지휘관 신세웅은 전사하고 왕인공 (王仁恭), 설세웅만이 최후의 부대로 남아 고구려군을 물리쳐 다른 부대가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30만 5천 명에 육박하던[44] 별동대 9군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겨우 2천 7백 명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 '''한마디로 30만 중에서 29만 5천명이 넘게 죽는 몰살이나 다름없는 참패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살수대첩이 얼마나 큰 승리냐면, 한국사에서 야전으로 거둔 가장 큰 승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45]
4.9. 수나라 군대의 철군
살수대첩의 참패를 접하여 크게 진노한 수양제는 우선 패전하여 돌아온 우문술, 우중문, 내호아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조리 삭탈 관직한 후에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죄수 취급을 하며''' 수나라로 압송한 뒤 먼저 유사룡을 을지문덕의 염탐을 위한 거짓 항복에 속아 그냥 살려 보내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했고, 내호아와 우문술은 지위가 박탈되어 서민으로 떨어진다. [46] 우중문 역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하옥되었으며, 이 때문에 홧병이 발생해 석방되었다가 결국 병사했다. 다만 우문술의 부장이었던 설세웅만큼은 살수대첩 후에 뒤를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싸워 이긴''' 공으로 패전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하였다.
이렇게 수 양제는 고구려에 원정을 온 지 8개월 만에 참혹한 패배를 당한 후에 고국 수나라로 귀환하니 2차 전쟁 역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수나라 군대는 요수 서쪽에서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 그 외에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야말로 대패였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였던 것이다.'''
113만 대군을 물리친 이 놀라운 기록은 한국 전쟁사 최고의 전설로 남는다.
5. 3차 전쟁
613년 3월, 수 양제는 2차 전쟁 당시에 겪었던 패전의 울분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4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4개월 만이었다. 2차 침략을 교훈삼은 수 양제는 3차 침공 때부터는 장수들에게 자유 재량권을 부여하여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몰아붙였고, 2차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원정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이해 함락 직전까지 갔다.[47]
살수에서의 패배 당시 나름 활약하여 주목받은 신예 장수였던 왕인공이 이끌었던 선봉대는 우선 신성을 가격하였으며 이후 요격에 나선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신성에서 타 지역 지원에 나서는 것을 봉쇄하였다. 그 다음에 본대가 요하를 도하하여 요동성을 재차 공략하면서 20여 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초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대 1백여만 장을 쌓아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세를 펼첬고, 이동식 망루를 통해서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2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별동대를 차출, 압록강 인근까지 접근시킨다. 113만이란 물량으로 밀어붙인 2차 때보단 덜하지만 이때 역시 고구려의 위기였다.
그러나 이때, 수 양제의 휘하에서 보급 임무를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과거의 원한과 수 양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어 친구인 포산공 이밀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 양제는 철군을 결정한다. 이 때 양제의 측근 참모이자 양현감의 오랜 친구였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는 바람에 이것이 발각되고 만다. 이 때 곡사정이 양현감과 내통을 하던 중에 수양제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다.
곡사정의 투항으로 수나라 군대에 대한 기밀, 특히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고구려는 이 기밀과 정보를 활용하여 늦게나마 철수하던 수나라 군대의 후미를 공격했다. 예상하지 못한 고구려의 기습에 수나라 군은 당황했고 고구려는 크게 승리하였으며 이때 수천여 명의 적군을 패사시키는 전공을 올렸다. 2차 전쟁 때보다도 더한 위기였을 수도 있으나 결국 수나라는 요동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6. 4차 전쟁
수 양제는 수나라로 귀국한 이후에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여 일단 발등의 불은 껐으나 그의 친구였던 이밀은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군웅의 행세를 하며 위세를 떨쳤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하여 수나라 내부에서 수 양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각지의 세력가들과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러한 와중에도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깊은 원한과 집착으로 인하여 수군 대장 내호아로 하여금 비사성을 공격하게 하였고 이때 비사성이 함락되면서 여수 전쟁에서 최초의 성 함락이란 소득을 얻었다.[48] 그러나 수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갈수록 거세져 육군은 이를 진압한다고 움직이지도 못했으며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무척 지쳐 있었는지 영양왕은 고구려로 망명했던 곡사정을 귀국시켰다. 귀국한 곡사정은 끔찍하게 처형당했다.[49] 수서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귀부하는 형태로 수나라에 화친을 제의하니[50] 수 양제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철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고구려 - 수나라의 마지막 전쟁이었다.'''
망명한 인사를 송환하여 정전을 꾀하는 것이 어느 정도 굴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20년 동안 대륙 통일 국가의 총 동원령을 무려 3차례나 막아낸 고구려로서도 적지 않은 피로와 손실이 있었을 터이고 대규모 전쟁에서 으레 수반되는 청야 전술 역시 고구려에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51] 이에 따라 20년간 굴욕과 원한으로 점철된 차있던 수나라에게 어느 정도는 접고 들어가줘야 밸런스가 맞았을 것이다. 게다가 삼국유사의 기록이 맞다면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또 굴욕을 당한게 된다...
7. 결과
7.1. 수나라: 막대한 국력 손실로, 결국 나라가 망해버리다.
수나라는 수문제, 수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다. 특히 수 양제가 고구려와 벌였던 2차 전쟁의 경우에는 살수 대첩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30만의 대군이 궤멸당하는 엄청난 대패를 겪고 말았다. 그에 따라 피해도 막심하여 엄청난 군량미와 군수 물자가 소진되었으며 수나라 조정의 재정도 상당히 소모되었다.
또한 이미 수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 이전에 대운하 건설과 대규모 황궁 건설 등의 잦은 토목 공사로 인하여 민심을 잃었고 부황과 형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으며 간언을 하는 신하를 처형할 만큼 성격도 잔혹하여 점차 신하와 장군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수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멸망하였고, 당국공 이연이 당을 세움으로써 수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수나라 멸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대운하 공사 등 수양제가 여러 대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긴 했지만, 수나라 멸망에 결정타를 준 것은 바로 고구려 원정이다. 고구려 원정의 부담으로 인해 수나라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도처에 기근이 발생했다. 이는 각지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정부의 통제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나마 굶주린 농민들에게 식량을 분배하거나 군사력으로 진압했다면 모를까, 연이은 고구려 원정은 이들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반란을 진압할 군사력은 고구려 원정에 묶여있었고, 식량은 이들을 먹이는데 쓰였다. 수양제의 613년 원정때는 급기야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고, 수양제는 반란 진압을 위해 급히 회군해야 했다. 양현감의 반란 이후 수나라 각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반란이 발생했다. 양쯔강 델타 지역에서는 유원진이 거대한 규모의 반란군을 조직했고, 산둥에서는 오해류가, 동해에서는 팽효재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613년 이후 수서 기록을 보면 각지의 반란 기록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당장 전쟁을 중단하고 민심을 수습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양제는 또 다른 고구려 원정을 계획했으나, 재정파탄과 행정력 붕괴로 인해 병력을 제대로 모을 수 없었고 결국 수양제는 618년 고구려 원정 당시 육군 대장 중 하나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야말로 '''고구려 - 수 전쟁은 수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인 것이다.''' 이 결과로 인해 수문제가 즉위하면서 인구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졌던 중국은 훗날 '비단과 금을 분토처럼 여긴' 당 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7.2. 고구려: 대승, 그러나 이후 소극적인 대외 정책으로 선회하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4차 침입 당시)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수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병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의 병사가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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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시 중국 대륙의 대대적인 침공에 막대한 인적 피해와 더불어 전쟁에 따른 피로도가 누적되고 있었다. 4차 침공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처음으로 성이 함락되었으며, 영양왕은 더이상의 장기전을 피하기 위해 고구려에 투항한 곡사정을 수나라로 돌려보낸다.[52]
또한 영양왕이 사망한 후에 그의 뒤를 이은 영류왕은 수나라 멸망 이후 중국 통일이 되기 전부터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 등 중국과의 외교에 대해 상당히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고구려-수 전쟁의 피해를 복구할 시간을 벌기 위함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나아가 서방의 세력들을 자극할만한 북방 세력권이나 한반도 방면의 관리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선회한다.
한편 당나라에서도 같은 기조로 평화를 지향하던 당고조와 달리 당태종은 야욕을 버리지 않고 고구려 정벌을 위한 작업들을 추진한다.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반응하던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시해되고 그의 조카 보장왕이 옹립되었다. 이에 따라 동방에 대한 당나라의 행보에 제동이 걸리게 되고 고구려와 당나라 양국간의 갈등이 불거져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한다.
8. 명칭에 대한 문제
한·중·일 역사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고구려를 '여', 백제를 '제', 신라를 '나'로 약칭하여 왔다. 이에 따르면 7세기경 형성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은 여제 동맹, 신라와 고려의 왕조 교체기는 나말여초, 같은 시기에 형성된 신라와 당의 연합은 나당 연합이 된다. 한편 '고백 동맹'이나 '신말고초', '신당 연합' 등의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53] .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도 통상 '여말선초'라고 일컫는다. 특히 고구려에서 국가 정체성이 담겨 있는 글자는 '려'이고 '고'는 '려'를 수식하는 글자라는 견해도 있다. 왕망의 신나라에 고구려현[54] 이 복속하지 않자 고구려현을 하구려현으로 부르게 했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역사학계에서 통용된 명명법에 따르면 고구려-수 전쟁을 여수 전쟁으로 불러야 하지만 정작 실제 용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식적으로는 합의된 명칭이 없다. 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대수(對隋)/대당(對唐) 전쟁, 혹은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고구려-수 전쟁에 대한 항목이 없는 반면 여당 전쟁이라는 항목은 있으며, 위키백과는 고수 전쟁, 고당 전쟁으로 잠시 바뀌었다가 현재는 고구려-수/고구려-당 전쟁으로 등록되어 있고 고수 전쟁, 고당 전쟁이라는 리다이렉트를 허용하되 항목 내에서는 여수 전쟁, 여당 전쟁이라는 약칭만 쓰여 있다.
2013년 6월 21일 구글의 검색 용어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고수 전쟁: 56,400건
- 여수 전쟁: 10,100건
- 고구려 - 수 전쟁: 64,500건
9. 참전 장수
- 제 1차
- 제 2차
- 제 3차
- 제 4차
10. 여담
- 인터넷 등지에서는 위의 백만 대군 관련 논란을 농담조로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
>보급했나 → 못했음
>나라가 망했나 → 망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