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래(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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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정래(李貞來)
'''생년월일'''
1977년 11월 28일 (47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용산중 - 명지고 - 고려대
'''포지션'''
포워드
'''키'''
189cm
'''프로 입단'''
2000년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 (창원 LG 세이커스)
'''소속팀'''
창원 LG 세이커스 (2000~2001)
서울 삼성 썬더스 (2001~2002)
'''대구 동양 오리온스/오리온스 (2002~2005)'''
서울 SK 나이츠 (2005~2006)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6)
'''등번호'''
1[1], 14[2], 9[3], 10[4], 7[5]
1. 개요
2. KBL 입성 전
3. KBL 입성 후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의 前 농구선수. 제2의 이충희로 주목받았지만 프로에서의 활약은 순탄치 못하고 은퇴한 비운의 선수였다.

2. KBL 입성 전


중동초에서 연가초로 전학한 뒤에는 원래 핸드볼을 하였지만 체계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하자 서성민 감독의 스카우트 제의로 농구부에 들어오면서 자신감이 남달랐던 그가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했고 최고의 슈팅 자세를 보였다.[6]
용산중[7]으로 진학한 이후에는 2학년 때까지 훈련과 연습경기에서는 눈부셨지만 정식 무대에선 모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3학년 때부터 모든 시간대에 연습을 한 뒤 자신만의 개인 훈련까지 이어가며 기량을 쌓았던 그는 출전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명지고에서는 1학년 때부터 부동의 에이스였으며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명지중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료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상대 선수들의 거친 파울로 인해 엄청난 부상을 겪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문제가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박성근 감독이 부임했던 3학년 때 당시 정훈, 이근석 등과 함께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고교무대를 평정하며 연세대, 중앙대 등 수많은 대학의 관심이 이어졌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시간을 뛸 수 있는 고려대로 진학해 당시 김병철의 2번 라인에 공백이 생기며 신입생 때부터 주전 선수로 뛰었다. 1996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서 게임당 3.4개의 3점슛을 성공시켜 선배 현주엽(1개)과 양희승(3.2개)을 앞지르며 신인상을 수상했고, 1996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서 연세대를 상대로 2차전에서 3점슛 6개를 실수 하나도 없이 성공시켰고 서장훈을 압도하면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용산중 시절부터 조금씩 문제가 되었던 허리 통증이 명지고 때까지 심해졌는데도 경기에 뛰는 건 큰 문제가 없었고, 고려대 시절에는 통증으로 여러 병원을 다니며 수술과 재활 비슷한 치료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었는데 4학년으로 진급했을 때 허리 치료를 마치고 복귀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코트로 돌아왔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돌봐주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일주일동안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결혼 전까지 미룰 정도로 좌절했다.

3. KBL 입성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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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드래프트에서 7순위로 창원 LG에 지명된 이정래는 대전 현대에서 이적한 조성원, 외국인 선수 에릭 이버츠와 함께 공격 농구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입지가 좁아진데다 시범 경기에서 육각슈터 조우현이 주전 멤버로 들어오면서 위기를 맞았고, 42경기를 출전해 평균 15분 13초 동안 7.3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로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팀은 KBL 역사상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며 평균 103.3득점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으로 정규리그 2위를 달성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경기당 11.4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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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2 시즌을 앞두고 그 해 드래프트 5순위로 지명된 황진원과 맞트레이드로 서울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다. 삼성에서의 기록은 45경기를 출전해 평균 12분 55초 5.4득점, 0.6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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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2-2003 시즌을 이틀 앞두고 소유권 논란으로 선수 양도 결정보다 선수가 피해를 당하면 안된다는 판단 아래 대구 동양으로 옮겼다.[8] 그러나 오리온스 이적 후 식스맨으로 활약하여 제법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며 오리온스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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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준용을 상대로 서울 SK로 트레이드 되었고[11] 그 뒤 2006년 1월에 인천 전자랜드 김원을 상대로 다시 트레이드되어 전자랜드에서 활약한 그는 현역 은퇴 후 고려대 코치를 역임한 뒤 현재는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4. 여담


  • 이정래의 아들인 이경민은 중고교 때 농구선수로 활동하다가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고등학교 때 배구로 전향해서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세인트 프랜시스(St. Francis) 컬리지에서 배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신장은 196cm에 포지션은 아포짓 스파이커다. https://n.news.naver.com/sports/general/article/530/0000005794

5. 관련 문서


[1] 창원 LG 세이커스 시절[2]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3] 대구 오리온스 시절[4] 서울 SK 나이츠 시절[5]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시절[6] 연가초 시절에는 농구를 즐거움 이상의 무언가를 항상 간직했었고, 힘든 일이면서도 그만큼 재밌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서성민 감독 덕분에 가능했다.[7] 원래는 명지중학교로 진학하는 게 당연했지만, 서성민 감독은 더 체계적인 시스템이 잡혀 있는 용산중으로 가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한 명지중의 사태로 서성민 감독이 그만두었다.[8] 이정래를 보류선수 명단에 올린 삼성이 철회하려 했으나 KBL은 보류 선수로 공시하면 2주동안 철회가 불가능하다며 제지했고, 동양이 이정래와의 계약을 요청하자 이정래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동양에 양도하라고 삼성에 요구했다.[9] 이 당시에 대구실내체육관에 '''축복받은 행운아 이정래'''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10] 특히 2003년 12월 27일 KCC와 홈경기에서 3쿼터에 3점슛 연속 3개를 넣으며 106 대 103으로 승리하는데 공헌하였고, 2004년 12월 4일 KTF와 홈경기에서도 3쿼터에 3점슛 연속 3개 성공으로 분위기를 끌어내는데 성공하여 92 대 87로 역전승하는데 공헌하였다.[11] 트레이드 당시 오리온스 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백업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던 이정래를 왜 보내냐는 말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