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희
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문경은, 김현준과도 함께 뛰어봤지만, 이충희를 능가할 슈터는 아직 없다.[4]
슛만큼은 이충희가 독보적이다.
별명은 슛도사, 神射手(신사수)[5] . 전성기에는 이충희라는 이름이 곧 슛과 동의어였을 정도로 최고의 슈터였다. 일명 '''한국 농구 역사상 손꼽히는 득점 기계이자 가장 위대한 슈터'''.
2. 선수 생활
2.1. 선수로서의 경력
중학교 1학년때부터 그냥 농구가 좋아서 선수 생활을 시작, 겨우 150cm대의 키 때문에 농구 그만두란 소리도 듣고 스스로도 농구를 포기하려고도 했다가, 다른 건 몰라도 슛 하나만 잘 하면 농구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하루에 천 개의 슛을 던지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연습을 거듭했고, 송도고 진학 후 전규삼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고3의 나이에 슛에 대한 도를 깨달았다. 거기다 작던 키까지 크기 시작했고, 그 덕에 졸업할 무렵에는 시절에는 모든 대학이 탐내는 슈터가 되어 있었다.
1977년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로 진학하여 농구부에 들어가 대학 팀이고 실업 팀이고 가리지 않고 이겨나가며 '안암골 호랑이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뒤 말 그대로 전쟁같은 스카우트 파동 속에 현대전자 농구단에 입단[6][7] , 농구대잔치에서 한 경기에 50점대 득점을 해내고 그 기록을 자기가 갈아치우고 허재, 김유택, 한기범 등이 버틴 중앙대학교를 상대로 60득점을 하며 격파해 허재가 분을 못 삭여 스스로 삭발하게 만들기까지 한 후,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에서 다시 중앙대학교를 격파하는 등 맹활약했다. 그렇게 이충희는 대한민국 농구를 상징하는 스타로 활약했고, 김현준과의 라이벌 구도는 농구대잔치의 인기를 크게 상승시켰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대만과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고 퇴행성 관절염까지 앓으면서 제대로 선수 생활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새로운 시대의 강자 기아자동차에게 왕좌를 내준 상태로 대한민국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충희가 대만 시절에 얻은 별명은 '''神射手'''.
농구대잔치 기록은
농구대잔치에 3점 슛 제도가 도입된 건 1986년부터로, 그 이전의 정규시즌 기록이나 결승전 60점은 '''3점 슛 없이 만든 기록이다'''.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두었음에도 대만 홍궈팀에선 벤치에만 앉아 있어도 된다며 파격적인 대우로 이충희에게 영입의사를 표했고, 이충희는 하도 대우가 좋아서 일단 응했는데, 대만에 간 이후 이충희의 무릎은 거짓말처럼 상태가 좋아졌다. 결국 하위권이던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고 선수 겸 감독까지 하며 팀을 우승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대만에서 활동하다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감독 영입 의사를 받아들여 한국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2.2. 국제 대회에서의 이충희
1982년 아시안게임에서 신선우, 신동찬, 박수교 등의 도움을 받아가며 30점을 올리면서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따는 일등공신 중 한 명이 되었다.
아시안 게임 이후 1980년대 내내 장신 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국제대회에서 맹활약, 허재, 김현준, 김유택 등과 함께하며 1980년대의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선전하게 해주었다.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올린 45점은 세계 대회 역대 7위 기록이고,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전패했지만 이충희는 평균 27점으로 팀 내 최고 득점을 올리며 자신의 역할을 했다.
1988 서울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2미터 대 장신들을 앞에 두고도 슛을 넣으며 한 경기 30점을 넣기도 할 정도로 대활약을 했고, 대회 평균 22득점으로 팀 내 최고 득점을 하며 주포 역할을 해냈다. 특히 올림픽 경기는 이충희의 여타 경기들에 비해 보기가 쉽다 보니 2000년대 와서야 이충희의 올림픽 경기를 보고 경악한 농구팬들도 여럿 있다.
2.3. 3점 슈터 이충희?
외곽 슈터 이미지가 강하고 특히나 전성기를 보지 못한 현 농구팬들은 이충희나 동시대 라이벌 김현준을 3점 슈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충희나 김현준은 3점슛 제도가 없었을때 뿐만 아니라 3점슛 제도가 생긴 이후에도 3점슛을 많이 던지지 않았으며 성공률도 동세대 다른 선수들 보다 딱히 높지도 않았다.
이충희와 허재를 비교할 때 이충희는 3점 슛터, 허재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허재가 이충희보다 시즌 평균 2배 정도 많은 3점슛을 던졌으며 성공률도 비슷했다. 오히려 이충희가 여러 플레이에 능하고 다재다능했으며 점프슛에만 의존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며 3점슛은 거의 던지지 않았다.
설명을 보강하면 이건 3점슛 극초창기에 뛰었던 선수들의 특징이다. 농구대잔치에서 3점슛 제도가 도입된 것은 84년도부터로, 59년생인 이충희는 실업농구에 81년에 입단했다. 즉, 3점슛이 없는 상태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것. 실제로 국제리그에서 3점슛이 도입된 것도 이해인만큼 이충희는 25세까지 3점슛이란 개념을 경험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3점슛에 대한 당시의 인식은 현재 3점라인 두세발짝 쯤 뒤에서 쏘는 초장거리 슛에 대한 인식과 비슷했다. 80년대 NBA 중계를 보면 롱2를 쏠 때 "way outside(한참 외곽에서 쏩니다)"라고 해설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수비와 공격이 3점라인 안에서 이뤄졌으며 실제로 3점을 쏠 수 있는 선수들도 3점라인 안쪽으로 들어와야 공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몸에 익은 패턴플레이 때문으로, 저렇게까지 멀리서 슛을 쏘는 패턴은 배운 적도 없고 해본적도 없으니 당연히 자주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3점슛 극초창기의 슈터들은 (현재 초장거리슛과 마찬가지로) 패턴플레이에 따른 3점이 아니라 그냥 상황에 따라 기습적으로 던지는 슛이 대부분이었고, 성공갯수/시도갯수 모두 들쭉날쭉했다.
80년대 NBA에서 최강슈터 중 하나였던 래리 버드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버드는 1년차 때 경기당 1.7개를 던져 0.7개 성공, 40.6%를 기록했으나 두번째 시즌에는 0.9개를 던져 0.2개, 세번째에는 0.7개를 던져 0.1개를 성공했다. 이는 당연히 3점이란 걸 프로 와서 처음 던져본 버드, 그의 루키시즌에 처음 3점을 도입한 NBA가 3점슛을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된 패턴 플레이가 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버드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도 스크린이나 전술로 수비를 떼고 던지는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상황에서나 던지는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NBA에서 3점을 활용하는 초기 전술이 개발되고 난 뒤인 80년대 중반부터 그는 이를 공격의 일부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경기당 평균 2개 이상 던지기 시작한 85-86시즌부터 은퇴시즌까지 그는 경기당 평균 2.8개 시도/1.1개 성공으로 39.4%를 기록했다. 실제로 3점 전술의 발달이 이뤄진 87,88년 이후 버드 경기를 보면 스크린 활용을 꽤 한다. 빈도수가 현대농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충희도 마찬가지로 3점이 몸에 익지 않았으나, 버드와 다르게 그는 실업 농구(사실상 프로) 생활을 시작한지 몇년이 지나서야 3점이 도입되었으니 익숙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3점슛 비중이 늘쭉날쭉한 것이다.
위에서 허재가 "평균 2배 많은 3점을 던졌다"는 것은 이 자료를(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kbltalk&wr_id=32983) 언급한 듯한데, 85~87 세 시즌 평균을 보면 41.3% 대 23.8%로 두배 가까이 되지만, 시즌별로 보면 이충희는 3.6개, 2.2개, 2개, 그리고 허재는 1.7개, 3.9개 (87시즌은 불참)이다. 이충희는 이후 88시즌에 2개, 허재 3.2개, 90시즌에 이충희 3.2개, 허재 4.6개, 90시즌엔 이충희 2.8개, 허재 3.5개, 91시즌에는 이충희는 기록이 없고 허재는 2.5개, 92시즌에는 허재 3개이다.
추이를 보면 허재가 전반적으로 더 많이 쏘는 것은 맞지만 커리어 후반부로 갈수록 이충희와 비슷해지는 걸 볼 수 있다. 즉, 팀의 주포였고 커리어 중반에 접어들때 처음 3점라인을 경험하게 된 이충희보다 19세부터 3점라인을 경험한 허재가 3점을 활용하는데 더 익숙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와 다르게 허재의 3점 비중이 높을 뿐 이충희도 초창기 이후 꾸준히 3점슛을 2.5개~3개 정도 던지며 활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80년대 당시 농구는 현대처럼 세분화가 되지 않았으며, 스코어러들 사이에서 큰 스타일 차이가 없다. 이충희, 김현준, 허재는 셋 다 점프슛과 돌파, 골밑슛 모두 능한 올라운드 스코어러였으며, 당시 스타일상 스크린을 활용한 팀전술이 다양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수비를 제끼고 쏘는 비중이 많았다.
이는 NBA도 마찬가지로 3점슛 능력 때문에 버드는 같은 208cm 장신 스몰포워드이던 페자 스토야코비치처럼 스크린을 타고 수비를 떼어놓고 3점을 던지는 선수, 도미니크 윌킨스은 비슷하게 운동능력 만빵인 르브론 제임스처럼 돌파 위주 득점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버드건 윌킨스건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둘 다 골밑~중거리까지 위치에서 주로 득점하던 선수이다. 버드는 슛이 훨씬 뛰어났고 3점슈터로도 활용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는 돌파와 골밑슛의 비중이 컸다. 이는 윌킨스 역시 마찬가지로 그의 고공플레이만 논하는 것과 반대로 매우 뛰어난 중장거리 슈팅력이 있었다.
허재가 "올라운더"라고 지칭되는 것은 그의 플레이스타일이 득점원 뿐 아니라 포인트가드를 맡을 정도로 뛰어나고, 그 외 수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올라운더이기 때문이지, 그가 동시대 다른 득점원들과 차별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슛도사" 이충희, "전자슈터" 김현준도 이들이 워낙 뛰어난 슈팅력을 지녀서 생긴 별명이지, 이들이 현대농구에서 있는 "전문슈터"여서가 아니다. 당시는 전문슈터의 시대가 아니었으며, 3점슛을 5개 가까이 쏜 적도 있는 허재 역시 스크린을 타고 슛을 쏘는 "전문슈터"가 아니었다.
즉, 현대처럼 농구스타일이 세부화되지 않은 80년대 당시 리그 톱급이던 이충희, 김현준, 허재 등의 외곽 득점원들은 기본적으로 슈팅이 뛰어난 전천후 스코어러였으며, 이 중에서 가장 젊고 3점슛라인에 익숙한 허재가 가장 3점슛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3. 감독 생활
하지만 화려했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은퇴 후 감독을 맡았을 때는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전형적 예시로 '멍충희', '돌충희'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오죽하면 남녀부 다 통틀어서 많은 수의 농구 감독들을 다 들춰봐도 이충희만큼 감독 커리어가 완벽하게 실패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나마 '''박수교, 박종천, 조동현, 이상민, 정인교, 신기성, 현주엽''' 정도가 비견되는 수준으로, 프로에서 실패한 몇몇 감독들도 적어도 아마추어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먼저 보인 이후에 프로 감독이 된 이후에 성공한 사람도 꽤 있는 편인데, 이충희만큼 대학 무대와 프로 무대에서 모두 커리어를 쌓는 데에 실패한 경우는 정말 손에 꼽는다. 심지어 그 삼성에서 금지어 취급받는 김상준마저도 대학농구에서는 중앙대에서 52연승의 실적을 낸 적이 있었고, 성균관대로 와서는 난파 직전의 팀을 되살렸다.
3.1. 창원 LG 세이커스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과 함께 LG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LG 창단 멤버 중 토종 주전들은 스타였던 포워드 양희승, 센터 박재헌, 가드 박규현 그리고 벤치멤버로는 포워드 박훈근과 가드 김태진이었다.
첫 시즌인 1997-98 시즌, 당시 팀의 에이스감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양희승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태에서 무명 급의 선수들을 조련해 극강의 수비전술로 상대를 잠그고 공격은 버나드 블런트에게 작정하고 밀어주는 전술로 시즌 2위까지 해내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창단팀이자 신생팀의 구성원 상 불가피했지만, 당시 이충희에 의해 도입된 대만 리그 시절부터이어진 더블팀 수비는 상대를 당황하게 하면서 LG는 속공으로 손쉬운 득점을 했다.
그러나 경험이 있는 팀들의 철저한 준비를 탓에 그리 쉽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대전 현대 다이넷이었다.
이 두 팀은 실업 시절과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최강팀들이었고, 수원 삼성 썬더스의 2년 연속 최하위권 부진과 함께 대조적이었다.
결국 경험 부족으로 인해 아쉬운 송골매의 돌풍 비상이 되고 말았다.
선수 시절 발목을 잡았던 허재가 이끄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와의 1997-98 4강 플레이오프 직행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고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로 패배하게 되면서 발목을 잡혔다.
결과적으로 보면 경험 부족을 극복하지 못했다.
두 번째 시즌에는 앞선 시즌보다는 못해도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나, 플레이오프에선 1라운드 탈락하며 세이커스의 플레이오프 잔혹사의 서막을 열고 말았다.
세 번째 시즌에는 이충희의 수비 올인 전략에서 팀의 공격을 책임져 주던 버나드 블런트가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여젔고, 블런트의 공백은 마일로 브룩스가 선전했으나 대처 외국인이었던 센드릭 다운스의 기량미달로 인해 메울 길이 없어 결국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이충희는 결국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서 사퇴하게 된다.
비록 사퇴했지만 LG 세이커스에선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올리면서 팬들은 선전으로 평가했고, 30대 감독 돌풍의 주역이었다.
1997-1998 시즌 창원에서 열렸던 홈 최종전에서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어떻게 보면 코트의 신사였다.
3.2. 고려대학교/동국대학교
2001/02 시즌 애니콜 프로농구 때 SBS에서 해설위원을 맡다가 2003년 1월에 전임이자 은사인 정광석 감독이 총감독으로 물러나자, 한승주 총장서리의 부름을 받아 모교인 고려대학교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당초 그는 프로팀 감독에 더 욕심을 냈으나 동문들과 모교 측이 수차례 설득해서 온 것이다.
그러나 선임 과정에서 정광석 총감독을 지지하는 체육위원회와 그를 지지하는 체육과 교수들이 싸우는 등 어지러운 상황 탓에 제대로 능력 발휘를 하지 못했고, 스카우트 시장에선 그토록 점찍어 놓은 삼일상고 선수 하승진을 연세대에게 뺏기기도 했다. 임기 동안 7승 8패에 연고전에서도 참패한 데다, 동문들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탓에 체육위와 동문들의 분노를 사 가차없이 해임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이민현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이에 대해 라이벌 연세대 감독 김남기조차 분노를 표했다.
2004년에 또 SBS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가 2006년 동국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잠시 거쳤다.
2009년에 동창이자 현역시절 라이벌인 임정명 감독이 가혹한 스파르타식 훈련에 대한 학부모의 탄원으로 물러나게 되자, 그는 이기수 총장의 청을 받아들여 감독 대행 자리를 수락했다. 그러나 기존 감독인 임정명과 지휘권을 놓고 다툰 데다 전임 진효준 감독과 기존 임정명 감독이 각각 스카우트한 선수들의 부모들이 알력 다툼을 했고, 그 속에서 선수 폭행 혐의까지 뒤집어쓰는 등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고대 측의 무원칙한 인사와 혼탁한 대학스포츠 문화 등으로 인한 희생양이 된 채 아리송한 상황에 처했다가 물러났다.
3.3. 대구 오리온스
지도자 이충희의 본격적인 대시련사의 서막(?)이었다.
KBL 대표명장이면서도 모교 후배의 슈터 출신이었던 김진 감독의 후임으로 대구 오리온스의 4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자신을 보좌할 코치로 김동광의 제자로 SBS-KT&G 출신으로 SBS 선수-코치 겸 KT&G 코치-감독대행이었던 모교 후배이자 같은 슈터 출신인 김상식 수석코치를 함께 데리고 간다.
6년전으로 회고해보면 동양-오리온스는 2001-2002 시즌 이전 창단 코치였던 김진 감독의 승진보다 이충희 감독을 원했는데 정태호 단장은 김진 감독의 승진을 밀고 나갔다. 이건 신의 한수. 2001-2002 KBL 통합우승과 2002-2003 KBL 정규리그 우승 포함 2006-2007 시즌까지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포함 4강 플레이오프 총 4회로 대구의 황금기였다.
창원 LG 세이커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돌풍 이후 2000년에 물러난 뒤 무려 7년뒤인 2007년에 KBL 감독으로 복귀했다.
김진 감독의 주장이었던 김병철 선수와 슛내기까지 하면서 신뢰를 형성했다.
그러나, 미디어들은 강한 카리스마의 이충희 감독이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김진 감독의 런앤건에 녹아든 오리온스 선수들을 잘 맞출지는 의문을 가졌다.
개막전에서 모비스와의 울산 어웨이 게임에서 승리하며 좋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는 소리없이 찾아왔다.
이미 김진 감독 시절부터 무리한 평이 있는 김승현은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허리디스크가 오면서 위기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김진 시절보다 무리하게 베스트 5만 고집했다.
예전으로 보면 거의 세이콘 수준이었다. 사실 김진 감독도 그랬지만 창단멤버로서 코치를 거쳐 내부승격을 한 이후 식스맨들도 가끔씩 출전하면서 배려를 했던 편인데 대조적이었다.
타임아웃에도 수비와 공격 문제로 지적만 하다 경기흐름을 놓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당시 오리온스 선수단도 주장 김병철 선수를 보함해서 다운되었다.
막장 소리가 딱 어울리는 기존 팀 상황에 돌파구를 만들지는 못하고 4승 22패라는 충격적인 성적과 함께 7개월만에 한 시즌도 다 못 채운 채 자진사퇴 형식으로 경질되었다. 후임으로 김상식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2007-2008 시즌을 치른 뒤 2008-2009 시즌을 앞두고 내부승진으로 대구 오리온스의 5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선배인 이충희와 함께 한시즌을 버티지 못하면서 같이 자진사퇴를 했다.
이후 2년뒤 대구 오리온스는 추일승 감독의 부임과 함께 대구체육관의 훈련시설 및 훈련환경 문제를 이유로 들어 대구에서 고양으로 충격적인 연고이전을 하게 된다. 결국 대구 팬들에게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생활의 말년을 시발점으로 해서 어째 이충희 개인의 감독으로서의 능력 이전에 불거지는 팀 외부적인 상황에 휘둘리며 불운한 꼴만 이어가고 있다.
3.4. 원주 동부 프로미
2011년 8월에 박사 학위를 취득해 현장 복귀보다는 교수직 부임의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KBS에서 다시 방송해설을 하면서 공부하는 농구인으로 현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행운이 찾아왔다.
2013년, 감독이 승부조작 혐의로 구속되면서 하차하며 공석이 된 원주 동부 프로미의 새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6년 만에 프로 감독으로 복귀했다.
예상치도 못한 KBL 감독 복귀.
KBL 센터에서 기자회견 때 LG와 오리온스를 이끌때는 나의 고집으로 경기를 했지만 방송해설을 통해 시야가 넓어짐을 고백했다.
이미 가족들도 기뻐했고 눈물까지 흘렸다.
취임식에서도 자신의 잘못된 과거의 회고와 배움을 고백하면서 잃어버렸던 지도자 이충희의 자존심 회복을 다짐했다.
일단 복귀 후 개막전부터 3연승을 쌓으면서 무난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시즌이 진행되며 경기 운용을 유연하게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동부 팬들의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주전 선수에게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주전 선수들을 혹사에 가까운 식으로 돌리는데다,[8] 동부 특유의 수비를 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인만의 컬러를 주입시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스타일이라는 게 문제. 김주성의 부상과 1순위 용병 허버트 힐의 태업 논란까지 겹치면서 팀은 어느새 팀 역사상 최다인 12연패까지 빠지게 되었다.
2014년 1월이 온 후로도 반전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이승준이 아킬레스건 파열로 시즌 아웃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급한 대로 김주성을 복귀시키고, 삼성에서 마이클 더니건을 트레이드해 왔지만, 되레 동부는 작년의 12연패에 이어 또다시 연패 기록만 써 나가며 꼴찌로 추락.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10개 구단 중에서 가장 무능한 감독으로 찍혀 오리온스 감독 시절부터 불렸던 '''멍충희'''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미친듯이 까였다.[9]
그리고 '''또다시 12연패'''를 찍은 1월 28일에는 10득점하며 잘 뛰던 두경민을 갑자기 중간에 빼버리기도 했다.[10] 그렇게 빼고서 다시 넣었을 때는 두경민 본인이 또 맛이 간 상태였다.(…) 사실 이충희는 시즌 초부터 잘 하던 선수를 갑자기 빼는 것 때문에 말이 많았었는데, 이번 건은 그간의 행동의 정점을 찍은 모습이였다.
핵심 전력인 윤호영이 제대해서 돌아와도 변하는 건 1도 없었다. 1월 31일에는 역시 3쿼터때 점수 따돌리기도 벅찰 때 중간에 김주성, 윤호영 등을 또 갑자기 뺐다. 그런가 하면 작전타임 때는 화를 내거나 다독이는 등 선수들에게 감독이 해야 하는 멘트를 선수인 '''김주성'''이 하기도 했다.[11] 이 날도 당연한 소리 같지만, '''패하였다'''. 거기에 '''1월달 전 경기 패배'''라는 한심한 기록은 덤. 팬들의 평가는 '''전술도 구려!''', '''작전타임 때는 아무것도 안 해!''' 등등 박수교, 박종천[12] , 김상준 등과 함께 감독 취급도 안 해주는 금지어로 단단히 낙인이 찍혀 사실상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상당한 악평 일색이다.
2014년 1월 27일에는 모교 대선배인 김동광 삼성 감독은 8연패와 함께 자진사퇴를 했다. 불화라기 보다는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최고참 감독으로서 안고간 격이다. 삼성 구단은 13-14 시즌 잔여기간동안 총감독(사실상 기술고문)으로 명장에 대한 예우를 다해주었고 김동광 감독의 수석코치이자 자신의 오리온스 시절 수석코치였던 김상식 수석코치가 대행으로 남은 13-14 시즌을 꾸리게 된다.
결국 4일 뒤 설 연휴 기간이었던 2014년 2월 1일에는 이 여파였는지 자진사퇴를 하면서 KBL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오리온스에 이은 계속된 실패로 인해 KBL이든 WKBL이든 프로 무대에서의 지도자 생활은 어려워 보인다. 어째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모두 용두사미가 된 행보도 비록 종목들은 다르지만 고대 후배들인 선동열, 홍명보 등과 비슷하다. 다만, 그래도 홍명보는 올림픽 동메달이라도 땄고, 선동열도 비록 미친듯이 까였지만, 그래도 삼성 감독 시절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우승도 해봤고 대표팀 감독을 맡고 나서도 논란은 많았지만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따봤다. 그러나 이충희는 프로에서도 대학에서도 감독으로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는 게 매우 큰 차이점.
여담이지만 자신과 동세대 경쟁했던 후배이자 오리온스 전임 감독 사이였던 김진 감독은 2013-2014 시즌 LG 세이커스의 창단 17년만의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4. 해설위원
창원 LG 세이커스 퇴진 이후 2001년에 SBS 해설위원으로 데뷔하여 1시즌간 맡다가 고려대학교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2004년 10월부터 2006년까지 SBS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대구 오리온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8년부터 KBS에서 해설을 맡았고, 2011년에는 자회사인 KBS N SPORTS 해설위원을 맡았다. KBL 경기를 포함해서 대학 U 리그 해설을 했다. 2013년 4월 말 원주 동부 감독직을 맡으며 하차했다.
2014년 12월 19일에 새롭게 프로농구 중계에 참여하는 skySports의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후 skySports에서 14-15 시즌 말까지 프로농구 해설을 했다.
해설위원 시절 평판도 영 좋지가 않다. 일명 '''농구판 허정무'''.
“축구에는 허정무가 있다면 농구에는 이충희가 있다.”라는 악평을 들었다.
좋지 못한 발음, 더듬거림이라는 두 가지 단점을 팬들이 회고를 하였다.
허정무와의 공통점 이라면 동네 아저씨 느낌이 난다는 점이다.[13]
5. 선수로서의 특징
오늘 슛 감이 안 좋으니 리바운드 좀 해달라고 동료에게 부탁하고 연습을 했는데 수백 번 쏠 동안 같이 있는 동료가 리바운드 잡아준 게 몇 개 밖에 안 된다거나, 티비에서 눈 가리고 자유투를 넣을 수 있는 실험한다고 취재를 왔는데 눈 가리고 8개를 연속으로 넣으니까 취재온 쪽이 '다 넣으면 시청자들이 짜고 한줄 아니 좀 놓쳐달라'하는 바람에 두 개만 일부러 노골시켰다던가, 감독 시절에 슛을 쐈는데 팀의 현역 선수들 중에서 이충희 비슷하게 넣은 선수조차 없다거나, 등등 무슨 만화 속 내용으로 넣어도 과장 심하다는 소리 나올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슛 정확도를 가지고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스테판 커리가 한국에서 뛰었다고 보면 된다.정말 하루도 안 빠지고 한 1년 동안 던졌어요. 정말 무식할 정도로. 그래서 던지다가 보니깐요… 이건 정말이에요,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정말 몇 개월 던지다 보니까, 눈을 감잖아요? 그럼 링이 보여요. 옛날에 무협지에 보면은 날라 다닌다고 그러죠, 사람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고[14]
뭐 축지법을 쓰고, 도사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넘나들고… 그게 하나의 창작이나 꾸미는 얘기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정말로 그걸 하면서 하도 던지다 보니까 눈을 감아도 정말 보여. 그리고 던지니깐 들어가. 그리고 그게 더 넘어서니까 내가 마음대로 링을 크게 작게 보일 수가 있어. 그럼 얼마나 넣기가 편해.ㅡ 인터뷰에서 발췌
이러한 슛 정확도를 만들어 낸 건 미친 듯한 반복 연습. 중학교 때 키가 150밖에 안 되는 상태에서 슛 하나에만 죽어라 매달렸는데, 한참 연습에 몰두할 때는 하루에 천 번 슛을 쐈다고 했다고 스스로 말했고, 평소에도 매일 수백 번 슛을 쐈고, 스타가 된 이후에도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이충희가 정말 무서웠던 건 저런 정확한 슛을 자신보다 큰 수비수를 앞에 두고도 성공시켰다는 점. 이충희는 동료들의 스크린을 받아 수비를 제치고 슛을 쏘는 데 당연히 능했을 뿐 아니라 앞에 수비수가 있어도 좌우 스텝으로 수비수를 흔들어놓고 슛을 넣었고, 슛으로 페이크 해놓고 돌파로 득점도 했다.
거기다 이충희는 독학으로 페이드어웨이 슛을 연마해 거의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던 선수였다. 외곽에서 페이드어웨이를 쏘는 건 기본이고 골밑까지 돌파해 놓고는 자신보다 큰 센터를 앞에 두고 유유히 페이드어웨이로 슛을 넣기까지 했으니... 상대 수비수는 스크린 없이 일대일로 매치된 상태라도 좌로 우로 뒤로 움직이며 쏘는 이충희의 슛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다만, 안 들어가기만을 바랄 뿐.
또한 이충희는 공격력만이 아니라 수비조차 좋았고, 빠르고 화려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적절한 패스로 동료를 살리는 능력 또한 높았다.
이충희의 키는 180에서 180대 초반 정도의 키였지만 그럼에도 순발력은 출중했고, 이러한 순발력은 이충희가 장신 수비수들을 앞에 두고도 슛을 잘 넣게 해주는 무기 중 하나였다. 단 그 외 운동능력을 본다면 동포지션에서도 그렇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이충희가 NBA 이야기가 거론이 되면서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주장의 근거중 하나가 바로 부족한 운동능력과 작은 사이즈.
이충희, 그리고 김현준 이후에도 슈터로서 유명세를 떨친 한국 선수는 여럿 있지만, 노마크 상황이나 동료의 스크린을 이용한 상태에서 슛만이 아니라 자신보다 큰 수비수를 앞에 둔 상황에서도 수비를 제치고 일대일 공격으로 슛을 성공시키는 진정한 만능 슈터는 조성원의 짧은 전성기 때 모습 이외엔 제대로 보여준 선수가 없다. 다만 2010년 중후반대에 들어 그런 선수가 있으니 바로 그의 고교 32년 후배 안양 KGC 인삼공사의 전성현이다. 그는 수비수를 앞에 두고 슛을 잘 구사할 수 있는 선수로 3점슛 성공률이 40%가 넘는다.
6. 기타
아내는 탤런트인 최란으로, 부부가 함께 CF를 찍은 일도 몇 번 있고, 이충희의 유명세 때문에 당시 결혼은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또한 최란은 남편의 악플이나 악성댓글 관련해서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지라 오리온스 시절이나 동부 시절 이충희 감독을 까던 팬들이 전부 얄짤없이 고소로 처벌받아서 농구 갤러리에서는 그를 까는 일이 절대 없다.
한데 당시 그는 실업리그 국제대회 농구대잔치 일정을 매년 돌면서 합숙을 했고 아내인 최란 역시 탤런트 활동을 하다 보니 부부가 결혼하고도 애 만들 시간조차 없었다. 거기다 겨우 임신한 다섯 쌍둥이가 유산되는 가슴아픈 일까지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를 놓고 불화설을 비롯한 별 군말이 다 나올 지경이 되자 이충희는 당시 대표팀 감독인 방열에게 사정을 한 끝에 부상이니 감독과의 불화니 하는 뒷말을 들으면서도 대표팀에서 잠시 빠진 후 아이 만들기에 열중했고, 그 덕에 쌍둥이를 얻었다.
현역시절 머리에 빗질도 안한 듯한 후줄근한 머리에 긴팔 소매를 아무렇게나 접고 유니폼 상의를 대충 밖으로 빼놓고 경기를 뛰었는데, 경기 중에도 머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한 김현준과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실제로 셔츠를 바지 안으로 단정하게 넣고 경기를 뛰어봤더니 슈팅 정확도가 떨어졌다고....
1992년에는 나이키 농구화 에어 발리스틱 포스 CF에 출연했다.
2011년에는 남자의 자격 청춘 합창단에 뽑혀서 합창단원에 뽑혔다.
이후 2019년 가을, 뭉쳐야 찬다 - 전설들의 조기축구에 출연하면서 다시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게스트로 단발성 출연이었지만, 괜찮은 입담과 좋은 커맨딩으로 경기와 예능 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영입 요구를 나름 받았었다.
결론적으로 감독보다 교수나 예능에 맞는 농구인이라는 평.
신사적인 건 후배인 김진과 비슷.
7. 관련 문서
[1] 1982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인해 특례받았고 당시 허재는 고등학생이라 함께하지 못했지만 2년 후 아시아 청소년 농구대회 우승으로 특례를 받았다.[2] 원래는 '''O형'''인 줄 알고 있다가 혈액검사를 한 아들이 '''B형'''으로 나와 다시 혈액검사를 해 보니 아들과 같은 혈액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부모 중 한 명이 O형이더라도 자식은 B형일 수 있다는 것. 이는 호박씨에서 최란이 얘기했다.[3] 고려대 3학년때 첫 선발[4] 이 말을 2019년 8월 16일에 했다.[5] 풀이를 하면 "신이 내린 슈터". 대만 리그에서 뛰면서 얻은 별명이다.[6] 이 때 현대전자 농구부 스카우트 담당이었던 김용휘가 온갖 고생을 했다고 한다. 원래 삼성에 가기로 했지만 김용휘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이충희의 동기 임정명을 이용해(현대에 입단하기로 약속했지만 이충희를 뺏긴 삼성이 임정명을 데려갔다.) 꼬드기는데 성공했다고...[7] 당시 대학농구를 보러왔던 왕회장이 이충희의 현란한 플레이에 반해서 '''"무조건 잡으라"'''고 지시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왕회장의 말이 곧 법이던 당시 현대그룹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참고로 정주영 회장은 실제 농구 매니아로 잠실체육관에서 대학농구나 농구대잔치를 직접 관람하는 모습이 자주 방송에 잡혔다.[8] 이러한 경기 운용은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시절부터 고집해 왔었다. 사실 LG 감독 데뷔 시즌에 거뒀던 2위도 버나드 블런트에게 대놓고 밀어주기 식으로 운용한 몰빵농구 덕이었다.[9] 앞서 상술한 대로 2007-2008 시즌, 오리온스 감독 시절에도 4승 22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시즌 중에 사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10] 두경민은 이것에 반발한 것인지는 몰라도 벤치에 앉지도 않고 아예 들어가 버렸다.[11] 김주성은 연고 밀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KBL에서도 몇 안 되는 순혈 프랜차이즈 선수다. 덕분에 은퇴 후 차기 동부 감독 1순위로 꼽히기도 하고 있다.[12] 이 쪽은 그동안 남자농구 한정이었으나, 여자농구에서도 첼시 리 사건으로 인하여 여자농구에서도 금지어 신세가 되었다.[13] 어떤 사람들은 차범근과 비교를 하는데 차범근은 발음도 정확했고 보는 눈도 있었고 국민들을 감동 시킨 반면에 이충희는 그냥 아무 느낌 없는 동네 아저씨 냄새가 난다. 결론은 차범근이 아깝다.[14] "날고"가 옳은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