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
- 한국계 미국인인 미국의 성우를 찾아왔다면 ProZD 문서로.
[clearfix]
1. 개요
前 전주 KCC 이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前 KBS N의 농구해설위원, 명지대학교 농구부 감독으로 현대/KCC에서 총 3번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0-01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유일의 토종 정규리그 MVP 출신이다.
지도자로 보면 천안 국민은행 세이버스(현 청주 KB 스타즈)의 코치-감독대행-감독이었고 모교인 명지대학교의 감독이었으며 현재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이다.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LG의 스타였던 KBL의 레전드 슈팅 가드였다.
180cm로 슈팅 가드로서 작은 체구치고 높은 타점과 빠른 속도를 통해 미친 공격본능으로 현대-KCC에서 챔피언이 되었고 LG에서 창단 이후 최초의 공격농구를 이끌었다.
NBA로 보면 KBL의 레지 밀러라는 별명이 있다. 공식 별명은 캥거루 슈터.
\
참고로, 2020-21 시즌부터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프로화 되기 이전의 안준호(前 코오롱, SK, 삼성 감독), 김태환(前 국민은행, LG, SK 감독), 프로화 이후 정덕화(前 SBS, 삼성생명, 국민은행 감독), 박종천(前 현대산업개발, LG, 전자랜드, 하나은행 감독), 이상윤(前 코리아텐더, SK, 금호생명 감독), 서동철(前 KB국민은행, 現 kt 감독)에 이어 여자 농구와 남자 농구를 모두 경험한 7번째 감독이 되었다. 대행까지 넣을 경우 이호근(前 전자랜드 감독대행, 삼성생명 감독)이 추가되므로 8번째 감독이다.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남들보다 늦게 중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데다가, 키도 작아서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선수였다. 친구 따라서 꼽사리로 껴서 간신히 고교 진학에 성공했던 정말 무명의 선수. 중학시절 1년은 물론, 고교 진학 후에도 1년간은 주전자와 수건 들고 다니던 말 그대로 후보선수였다. 첫 시합 출전도 2학년 때부터였다고... 더구나 같은 학교 1년 후배에는 이상민도 있었던 악조건. 그러나 고교 시절 부단한 노력으로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고교 졸업 무렵에는 상당한 유망주로 주목받았다.[7]
고교 3학년때 대학진학을 앞두고 크게 주목받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89년 여름에 열린 메이저급 대회인 제44회 종별농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당시 18연승을 달리며 그해 고교농구 3관왕을 자랑하던 무적의 용산고를 맞아 만년 약체로 꼽히던 홍대부고가 경기종료 3초전에 터진 결승골로 102대 100으로 이기는 대파란을 일으켰고, 그 게임에서 조성원 혼자 40점을 몰아 넣으며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의 용산고 농구부 멤버는 3학년의 김승기, 김재훈, 1학년의 슈퍼신인 김병철, 양경민 등의 호화멤버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는데, 이날 경기에서 홍대부고 5명, 용산고 4명 등 총 9명이 5반칙 퇴장당하는 치열한 접전을 치뤘다. 홍대부고도 노기석 등 주전 대부분이 퇴장당한 위기에서 조성원이 3점슛 8개 포함 40점이라는 경이적인 스코어를 올린 것.[8][9][10][11]
이 대활약으로 이후 고려대학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고교 진학 당시 자신을 도와준 친구 2명이 대학 진학이 어렵게 되자, 고교 때 은혜를 갚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명지대학교로 진학한다.[12][13]
명지대학교 시절에는 진성호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으며 동기생 고상준, 특히 양조, 쌍조 콤비로 불리던 2년 후배 조성훈 선수와 함께 슈터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아쉽게도 팀 전력이 강하지 않아서 결승에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졸업전 93~94 시즌에는 당시 명지대가 85년 이후로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중앙대[14] 를 꺾기도 하고, 고려대[15] 를 격파하기도 하는 등 나름 언더독으로 팀을 이끌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현대전자에 스카우트되어 실업 무대에 데뷔했다.
2.2. 현대 왕조의 주역
현대전자에 입단은 했지만, 이 당시 현대전자는 과거의 명성만 높았던 팀이었던 데다가, 본인도 신인으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후 이상민 등과 함께 1996-97 농구대잔치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농구팬들 사이에서 조성원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게 이때부터이다.
[image]
[image]
제대 후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한 1997-98 시즌부터 뛰기 시작하는데, 이상민, 추승균, 조니 맥도웰과 함께 막강 현대를 이루면서 맹활약했다. 특히 4쿼터에 강해 별명이 "4쿼터의 사나이"로 불렸을 정도.[16] 빠른 움직임과 외곽슛을 겸비한 선수로서 많은 운동량을 통해 활로를 찾고, 과감한 돌파를 통해 상대를 헤집거나, 슬램덩크의 정대만이나 신준섭처럼 정확한 3점슛으로 고비마다 상대를 침몰시켰다.
이 때의 주 공격패턴이
1. 상대팀의 공격이 막히고 속공 상황이 되었다.
2. 이상민이 공을 드리블하며 달려간다.
3. 이상민에게 수비가 붙는다.
4. 어느새 따라온 조성원에게 볼을 주면 그가 3점슛을 던진다.
5. 3점슛 성공에 환호하는 관객들의 함성과 작전타임을 알리는 부저소리가 겹쳐진다.
[image]
이것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가 조성원 전담 수비수를 둬서 성공적으로 막아낸 몇 차례 빼고는 거의 알고도 못 막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이상민을 강동희가 막아내고 김영만이 추승균을 제압할 수 있어서 가능했지 다른 팀은 짤없이 털렸다. 일명 "이조추 라인"의 등장이었고, 이상민의 볼 배급, 추승균의 안정적인 활약, 조성원의 폭발력이 결합한 당대 최고의 조합이었다.
특히 큰 경기에 강한 강심장이었는데, 1998-99 시즌에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평균 16.4점을 쏟아부으며 팀 우승의 주역이자, 자신은 챔피언 결정전 MVP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SK나이츠에게 졌지만, 1999-2000 시즌에도 역시 17.5점을 쏟아부었다. 다만, 이 챔프전을 계기로 신선우 감독은 팀 재편을 결심하는데, 이유는 조성원의 작은 키였다. 키가 작기 때문에 SK의 장신 라인업에 밀렸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이 결심은 결과적으로 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2.3. MVP
[image]
2000-01 시즌 개막을 앞두고 조성원은 전격적으로 양희승과 맞트레이드되면서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김태환 감독과 조우하면서 조성원 생애 최고의 영광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태환 감독은 LG를 완벽한 런앤건팀으로 재편해서 평균득점 100점에 이르는 공격농구의 끝을 보여줬고, 그 중심에 바로 조성원이 있었다.
조성원은 2000-01 시즌 정규시즌에서 평균 100점이 넘은 팀 공격의 최전선에 섰고, 자기 자신은 평균 득점 25.7점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다. 팀은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고,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조성원은 평균 20점이 넘는 분전을 했지만, 결국 삼성에게 무릎을 꿇으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국내 선수 중에서 으뜸가는 공격력을 선보인 조성원은 2000-01 시즌 MVP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17] 이 때만 해도 조성원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2.4. 몰락
그러나 조성원의 작은 키는 분명 수비에 있어서 부담이었고, 창원 LG의 달리는 농구는 팬들에게 재미는 있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지는 못했다. 그리고 창원 LG의 불운은 그들이 우승할 타이밍에 우승을 못했다는 것에 있었고, 조성원의 작은 키는 분명 수비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한계는 잘 나갈 때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는 표면화되었다.
여기에 조성원은 그간 달리고, 또 달린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무릎 부상에 시달리면서 출전 시간이 점차 줄어든 것. 평균 득점도 비록 다른 국내 선수와 비교하면 준수한 편이지만, 팀의 핵심 공격 자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1-02 시즌에는 다소 부족한 평균 16점으로 감소했고, 무릎 부상이 더 심해진 2002-03 시즌에는 평균 12점으로 줄어들었다. 이러면서 자연히 신장과 속도로 인한 약점인 수비력 문제도 또 다시 대두되었다.
결국 더 많은 출전을 원하던 조성원은 2003년이 되기 전 까지인 12월 말일에 트레이드를 요구해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는 형식으로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했지만 여기서도 그다지 좋은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조성원이 뭘 하기에는 이미 조성원은 점점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활약도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LG 팬들도 충격을 받았던 건 주장으로서 트레이드를 직접 요구한 부분인데 본인과 LG 모두를 위한 용기였다.
사실 LG 세이커스는 김태환 감독의 화끈한 한방 농구가 대세였지만 당시 꼬꼬마 라인업으로 인해 높이에서 약점이 셌다.
그 시기 대구 동양 오리온스는 우승후보도 아니었는데 2001-2002 KBL 통합우승로 최고 인기 구단까지 성장했다. 그 시절 주역이 바로 김진 감독과 전희철, 김병철, 박재일과 그리고 김승현이었다. LG 세이커스는 이 시기 포인트 가드와 파워 포워드가 너무 약했다. 송영진의 더딘 성장으로 인해 김영만를 트레이드로 영입한 이유다. 추가로 김주성을 뽑은 원주 TG삼보 엑서스에도 밀렸다.
트레이드로 판짜기를 하는 김태환 감독의 스타일에 강동희를 영입하면서 입지가 작아진 게 컸다. 이건 SK 나이츠 감독 시절에도 문방포라 불렸뎐 문경은과 을 모두 영입까지 했으나 최인선 감독 이후 봄농구에 실패한 SK의 흑역사로 이어진다. 이 흑역사를 잠시 끊은게 바로 김진이다.
김태환 감독의 LG는 결국 송영진의 적응문제로 인해 높이와 경험이 절실했는데 김영만으로 보완을 했지만 끝내 우승에는 실패했다.
조성원 선수도 이미 최인선 감독의 몰락과 이상윤 감독의 시련사 사이의 SK 나이츠에서도 높이와 속도 문제로 인해 조화를 맞추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비주류 출신의 슈퍼스타가 동료들을 잘못 만나면서 고생한 경우였다. 반대로, LG 창단 멤버 중 스타인 양희승도 그랬다. 자신과 맞트레이드 이후 현대-KCC에서 실패했고 결국 SBS-KT&G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2.5. KCC로 이적 그리고 유종의 미
조성원의 이적 이후, 장신 포워드 라인업과 토털 바스켓볼을 추구했던 KBL 명장인 신선우 감독의 전략은 잠시 반짝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계에 점차 봉착하기 시작했다. 결국 신선우 감독은 다시 예전에 잘 나갈 때의 라인업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팀 적응에 애를 먹던 전희철을 조성원과 맞트레이드시키면서 조성원을 팀에 영입한다.[18]
[image]
KCC로 온 조성원은 전성기의 폭발력은 아니었지만, 평균 15점을 넣으면서 팀에 큰 기여를 했고, 2003-04 시즌 플레이오프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04-05 시즌에는 전성기처럼 챔피언결정전에서 평균 17.2점을 넣으면서 분전했지만, 팀은 결국 졌다. 그리고 이 시즌을 기점으로 조성원의 정규시즌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롤도 자연히 식스맨으로 바뀌었다.[19]
[image]
[image]
[image]
2006년 8월 29일에 열린 KCC 이지스와 베이징 덕스와의 시범 경기가 끝난 뒤, 은퇴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있는 이조추 트리오와 허재 감독.
결국 2005-06 시즌을 끝으로 조성원은 은퇴했다.[20] 전신인 대전 현대를 포함해 우승 세 차례를 팀에 안겼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KCC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은퇴를 할 수가 있었다. [21] 현역 시절 자신을 알고 자신도 주역의 욕심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현대와 LG 그리고 SK와 KCC 모두를 위한 용기였고, 현역 말년에 허재 감독을 통해 희생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은 격이었다.[22]
3. 지도자/해설위원 생활
3.1. 여자부와 대학부
[image]
[image]
과거 팀 동료였던 최병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은퇴와 함께 여자농구 국민은행의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약 2년간 코치로 활동하다가, 최병식 감독이 물러난 후, 2008년 감독으로 승격해서 한국여자프로농구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최악의 성적을 찍으며 한 시즌도 다 채우지 못하고 자진 사임하는 흑역사를 만들며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속설의 또 다른 표본이 되고 말았다.
결국 SBS Sports에서 방송해설로 다시 현장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연세대 출신 선배들을 마이크를 잡게 했는데 당시 현대전자의 대선배였던 박수교는 해설을 하고 있었다.
[image]
그 뒤, 해설위원 일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2011-12 시즌 개막을 앞두고 김상준(농구) 감독이 부임한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로 부임했다. 박수호 수석코치와 함께 현대-KCC의 라이벌인 삼성에서 KBL 지도자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한 시즌만에 김상준 감독과 같이 삼성 역대 최저 성적이었던 13승과 함께 최하위 성적으로 인해 1년만에 떠나게 되었다. 당시 이병석 선수와도 인연이 있었다.
다시 야인 신세... 는 오래 가지 않았고 친정이었던 SBS Sports의 해설위원으로 복귀를 하게 된다.
2013-14 시즌이 끝난 뒤 KBS 해설위원에서는 남자부를 담당했으며, KBS N 스포츠에서는 여자부 해설을 담당했다.
[image]
2015년 10월 27일, 수원대학교 여자 농구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감독으로서의 공식 임무는 11월 2일부터 시작했으며, 농구 해설도 병행했다. 2017 대학리그에서는 수원대를 준우승[23] 을 시킨 후 퇴임했다.
그 뒤에는 모교인 명지대학교에서 남자 농구부를 지도를 하게 되었고 여자프로농구 경기해설을 병행했다. #.
2018년 대학농구 감독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2018 대학농구 U 리그에서 4쿼터 초반 11점 차이의 열세를 뒤집고 상명대를 68-66으로 물리쳤다.
감독 부임 후 빠르고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는 농구를 펼쳤으며, 남자대학교 농구부 감독으로서는 성공적이라는 평이었다. 아마도 대학 지도자로서나 잘 맞는 지도자였다고 한다.
농구감독님보다 농구선생님이었는지 대학교 시절 제자들에게 농구의 즐거움을 찾는게 소중함을 가르쳤으며 한 때 모교인 명지대 감독 시절 교수까지 맡으면서 농구를 학기수업으로 하는 등 농구에 대한 즐거움과 소중함을 제자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실제로 대학 최약체로서 대학농구리그 8강 조차 어려운 현실인 명지대 농구부의 감독으로서 가장 성공한 건 마치 자신의 현역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명지대의 돌격대장이었던 우동현 선수를 육성하면서 성장을 한 점이다.
3.2. 해설위원
평가가 좋지않다. 제2의 우지원이라는 평가를 내릴정도 지나치게 친정팀 위주로 편파해설을 하여 귀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지원과의 차이점이라면 우지원은 썰렁한 개그를 하면서 억지라도 분위기를 만드는데 조성원은 썰렁한 개그라도 안하니 재미없는 해설가라고 정의를 내렸다.
대신 경기의 흐름과 맥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평소 내성적이면서 말이 없었는데 방송해설을 통해 그 부분이 늘어나기도 했으나, 무리한 모습에는 우려를 표시하지만 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이었다.
자신이 현역 시절에 멘트는 이렇게 되었다.
KBS 지상파 해설위원 출신이었는데 현대전자 대선배이자 LG 초대 감독이었던 이충희 감독과도 중계를 했던 김현태 캐스터의 멘트는 이렇게 되었다.
대신 해설위원이 된 조성원은 김현태 캐스터를 포함해서 평소 캐스터의 질문에 항상 멘트는 "네. 그렇습니다."를 자주 답했다.김현태 캐스터 : 조성원의~ '''3점!!'''
김현태 캐스터 : 조성원의~ '''3득점!!'''
김현태 캐스터 : 조성원의~ '''3점!''' '''적중!!'''
김현태 캐스터 : 조성원의~ '''3점!''' '''골인~~'''
김현태 캐스터 : 조성원의~ '''3점!''' '''들어갑니다~~'''
KBL 경기는 가장 최근의 2016-2017 시즌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렸던 KBL 올스타 게임과 안양 KGC 인삼공사와 한 때 코치로 맡았던 서울 삼성 썬더스의 2016-2017 KBL 파이널 GAME 2에서 해설을 하기도 했다.
2년뒤 2018-2019 시즌 자신의 흑역사였던 청주 KB 스타즈는 마침내 WKBL 파이널의 한을 풀었다. 스승이었던 최병식 감독도 결승에 올랐으나 우승을 하지 못했는데 세월이 흐른 뒤 정상에 올랐다.
그 시절 칼럼도 경기내용 분석이 좋았으며 여자농구 팬들도 인정을 했다.
참고로, 창원 LG 세이커스 출신 중 청주 KB 스타즈에서 활약했던 지도자들이 꽤 있는 편이다.
3.3.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2020년 4월 23일에 현주엽의 후임의 신임 사령탑으로 창원 LG 세이커스의 8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3년 계약의 조건이다. 2008년에 청주 KB 스타즈에서 화려했던 선수 시절과는 극명히 대조적으로 처참한 성적만 낸 채 한 시즌도 못 채우고 사퇴해버린 흑역사가 있다는 흠이 있어도 아마 남자 대학농구에서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해설가로써의 경기 파악능력까지 있어 LG 팬들은 농구가 벌써 기대된다고 한다. 조성원 감독은 빠르고 공격적인 농구로 현역 시절 때 보였던 뛰면서 공격했던 신바람 농구를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기사. 여담으로, 조성원의 부임으로 인해 이-조-추 트리오 모두가 마침내 KBL 감독을 역임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KCC 시절 한솥밥을 먹으면서 영광을 함께했던 후배인 추승균 전 KCC 감독은 이미 격하게 축하까지 해주었다. [24]
[image]
LG 팬들은 자신들의 정규리그 MVP와 첫 파이널의 절정을 선물해준 LG 출신 스타의 귀환에 환영하고 있다.
2020년 4월 27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KBL 센터에서 열린 취임 기자회견에서 박정현, 김시래, 강병현, 조성민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조성원 감독은 이 자리에서 2020-2021시즌에는 대형급 FA 선수 영입은 없으며 기존의 선수들로 상대팀이 100점을 넣으면 자신의 팀이 100점 그 이상을 넣는 공격 농구로 화끈한 재미있는 농구를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LG 선수로 활약할 시절 우승을 못해봤기에 감독으로서 우승이 목표라고 밝혔다.기사
조성원 감독은 2002년 크리스마스 빅딜의 주인공이었던 김영만 전 수석코치와의 맞트레이드 이후 무려 18년만의 감독으로 귀환을 하게되었는데 본인은 그 부분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독의 개념을 버리면서 선수들과의 대화·신뢰로 LG의 창단 첫 플레이오프 우승을 위해 올인을 선언했다. 기사
코칭스테프로는 LG에서 현역 시절 호흡을 맞추었던 박재헌 코치를 수석코치로 승진하면서 유임을 유지했고 명지대 감독 시절에 함께했던 이병석 명지대 코치와 KCC 시절 호흡을 했던 최승태 코치를 선임했다. 기사
FA로는 마산 아이버슨이라 불렸던 듀얼가드 박경상 선수와 디펜스 스페셜 포워드인 최승욱 선수로 팀컬러 개편에 집중을 했다. 첫 시즌은 우선 선수단과 함께 봄농구 막차인 6강을 겸손한 목표로 준비하게 된다.
LG 감독 첫시즌 부터 새로운 외국인 선수들을 데려와주지 않고 직전 시즌 득점왕 캐디 라렌과 재계약한 뒤에 KBL 잔뼈가 굵은 리온 윌리엄스를 영입해 모험보다 안정을 선택해 화려함보다는 견실함이 있는 런앤건 즉 달려서 득점할 수 있는 빅맨을 영입했다.
한편, 모교인 명지대학교 농구부 감독은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코치였던 모교 출신인 김태진 감독이 맡게 되었다. 후배로서 선배에 존경을 표시하며 발전을 다짐했다.
조성원 감독의 꿈은 자신도 안정적인 명지대학교 농구부 감독과 교수는 후배들에게 누가 됨을 강조해서 재복귀 의사는 단호하게 하지 않으면서 LG 세이커스를 다시 김진 감독 시절처럼 오고 싶은 팀을 만드는게 목표임을 밝혔다. [25]
하지만, 팀 전력이 최하위 후보라는 비판이 있으면서 외국인 수준이 높은 바람에 순탄치 않은 KBL 감독 시즌을 예고하고 있다.
KBL 감독 이전 강을준 감독의 장남인 강지훈 선수에게 포기하는 모습에 유망주들이 보는 앞에서 큰호통을 친 일화가 있었는데 확실한 건 전임 감독 그리고 현대-KCC 출신 원클럽맨 후배 감독보다 무언가 번쩍이는게 있다.
3.3.1. 20 KBL 컵
2020년 9월 20일 군산에서 열린 컵대회에서 명문구단인 현대모비스를 99:93으로 물리치는 이변을 만들어냈다. 감독으로 임명된지 146일만의 정식경기 첫승이다. 전반전에는 밀렸으나 경기 막판 집중력있는 모습으로 모비스라는 대어를 잡았다.
아마추어 감독 출신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단 1경기만에 평가를 바꾸었다.
LG 팬들은 3년간의 하마강점기 시절의 무색무취에서 탈출한 기쁨을 넘어 조성원호의 색깔을 확인하면서 20-21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여기에 획기적인 전술이 있다. 가드들(조성민 & 박병우)이 업스크린(볼없는 지역에서의 몸싸움 이후 걸고 빠지는 행위)을 걸고 캐디 라렌을 절묘하게 활용하면서 김시래와 강병현의 연이은 외곽포가 터지면서 조성원호의 출항을 알렸다.
비록 또 다른 강팀이었던 KGC전은 전력의 열세에 패했지만 경기력은 달랐다. 무엇보다 선수단의 공격본능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다.
김승기 감독은 이미 조성원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LG의 달라진 경기력을 현 KBL의 트렌드라 립서비스(?) 인터뷰를 했다.
사실 LG의 전력은 김종규의 FA로 인한 DB 이적만 아니면 6강은 노려볼 만한 전력인데, 분위기 쇄신에 나름대로 성공한 것을 보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대회였다.
하지만, 전력 자체가 너무 최약체이다 보니 제 2의 캥거루를 찾아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약점인 포워드 라인과 빅맨 라인에서 그나마 희망인 서민수의 활용방안, 그리고 2년차에 들어가는 막내 빅맨인 박정현이 얼마나 적응하느냐가 시즌 성적을 가를 중요한 요소가 될 전망이다.
3.3.2. 20 - 21 시즌
LG 역대 감독 중 창원에 숙소를 둔 첫번째 감독으로 시즌을 앞두게 되었지만, 시즌 전에는 재계 라이벌인 서울 삼성 썬더스와 함께 2약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다만 한 미디어에서는 조성원호의 LG는 오히려 전력이 처지는 만큼 과정을 보면 다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확실한 건 선수단 분위기가 달라진 점인데, 무엇보다 공격에서 적극성이 보이기 시작했던 만큼 20 KBL CUP에서의 좋은 흐름을 유지하면서 시즌초를 잘 넘기면 가능성이 보였다. 팬들은 크블의 휴스턴 로케츠 또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라는 이상향을 가지고 있다. LG의 오래된 팬들은 김태환 시절보다 오히려 동양의 명장이었던 김진 시절의 런앤건처럼 신바람 농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막전에서 KCC를 잡았지만, 홈 개막전을 포함해서 홈에서 2연패를 당했다. 비판은 일부 극성 팬들을 제외하면 그래도 유연하게 독려를 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프로인 만큼 잦은 연패가 이어질 때의 위기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우려가 현실인지 개막 첫승이후 내리 4연패까지 당하며 우려를 낳고 있다. 다만 선수단 전력 자체가 너무 약하다는 문제가 크다는 것을 알 사람들은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럼에도 확실한 팀 컬러를 보여주면서 경기에 임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전임 감독보다는 훨씬 낫다는 평이 다수이긴 하다.
원주 DB와 서울 SK를 내리 잡아내며 4승 5패로 1라운드를 마감했다. 외곽포가 터지면 이기고 안터지면 무난하게 패배하는 전형적인 양궁농구를 보여주었다. 다만 패배 때 각종 기사가 나왔는데 관찰자라는 말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게 나왔다. 슈팅에 자신없는 선수에게는 불호령까지 내리는 강단도 있었다.[26] 간판인 김시래 선수에게도 드리블링 오펜스가 무리했던 건 자제를 했을 정도로 농구개념이 있었던 편이었다.
명지대 시리즈인 강을준 감독과 비교되는 모습이 나왔는데, 적어도 창원 홈 게임에서는 그럭저럭 승리를 많이 챙겼던 모습을 보이면서 더 이상 먹방을 그립지 않도록 팀을 잘 이끌었다.
하지만, 20 KBL 드래프트에서 6순위 지명권을 가졌지만 당초 유력했던 한양대 출신 슈터인 이근휘를 대신해서 자신의 아들인 조종민 선수가 편입한 단국대 출신 가드인 윤원상 선수를 지명하면서 팬들의 불안감을 키웠다.[27] 팀에 조성민과 강병현의 노쇠화를 생각하면 스윙맨으로는 최적의 핏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비력에서 평이 좋지 못했는지 냉정함을 보이면서 윤원상을 선택한 것이다.
2라운드도 4승 5패로 삼성과 공동 8위. LG 창단 이후 골짜기 라인업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었다. 이게 만약 전임자였더라면 -2승~-4승이었는데 확실한 건 분위기 반전과 색깔있는 런앤건 만큼은 팬들이 독려했다.
특이한 건 패와 승이 반복되는 퐁당퐁당 모드였지만 창원 홈 게임 혹은 꼭 잡아야 할 게임은 잡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위는 8위 아니면 9위라는게 함정.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두가지 소식에 창단 첫 최하위 위기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장 강병현 선수는 손등부상으로 2달 결장했고 외국인 에이스인 캐디 라렌 또한 누적된 발가락 부상으로 인해 1달 결장하였다. 조성원호의 위기관리능력은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오래된 골수 팬들은 전임 감독의 폐허 속에 또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 조성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작전타임을 안 부른다는 것. 팀이 10점차 이상 끌려가고 있으면 작전타임을 불러서 뭔가 새로운 전술을 써야 하는데 그대로 끌고 가는게 지적된다. 오죽하면 중계하던 해설진들도 이런 상황에서 작전타임을 한 번쯤은 불러줘야 한다고 얘기를 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작전타임을 부를 때만큼은 어지간한 감독들이 많이 저지르는 출첵 작전타임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것. 특히 1월 1일 경기에서는 서민수에게 '''"아 좀 자신있게 하라니깐."''' 하면서 독려를 해 줬는데, 이 독려가 통했는지 서민수의 활약에 힘입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월 19일 자신의 친정팀인 KCC 이지스와의 전주 어웨이에서 창단 이후 최다 점수차인 38점차의 대패를 당하면서 비판을 받았다. 이 게임에서 타임아웃을 불렀으나 1개가 남았는데 팬들은 감독이 경기를 포기한 모습을 꼬집었다.
추가로 부상자들도 도미노처럼 나오면서 구단도 일정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주장 강병현을 시작으로 김시래도 다치면서 결장하더니 서민수와 박정현에 이어 캐디 라렌까지 종협병원신세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테리코 화이트를 데리고 왔으나, 오히려 높이와 제공권 열세로 인해 리드하고도 반대로 점수만 더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어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어왔다. 바로 트레이드로 전자 라이벌인 삼성 썬더스와 KBL 출범 25년만에 사상 처음으로 2대2 트레이드를 추진한 것이다. 이유는 이상민 감독이 있어서 도와줄 생각이라는데, 골수 팬들은 구단 SNS에 테러를 포함해서 성토를 냈다. 모교 제자나 다름이 없는 김시래 대신 FA 단축 1년 계약 이후 잡기도 애매한 이관희를 받아온 것 때문에 골수 LG 팬들은 김시래에 대한 이별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28]
이로 인해 LG 팬을 떠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구단 프런트를 모두 교체하라는 시위까지 이어졌고, 별명 또한 돌성원 혹은 관성원 등의 별명들로 놀림을 받았다. 아무리 성적을 내기 어려워도 LG의 슈퍼스타이자 준 프랜차이즈 스타를 떠나서 모교 제자 하나도 못 지킨 조성원에 대해 실망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전자 라이벌을 퍼준 사실이라는 충격 속에 LG 팬을 그만두기까지에 이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2월 3일, 삼성전 패배로 인하여 DB를 제치고 꼴찌로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최악일 경우 구단 역대 최저승인 17승도 어려울꺼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하게 된다. 김시래 트레이드 이전 12승인걸 보면 험난해보인다. 변수는 그나마 부상중인 캐디 라렌이다.
다만, 후속 트레이드가 시즌 종료 이후인 6월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보고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들도 있다.
4. 여담
- KBL 감독으로 데뷔를 해 라이벌이 많이 있다. 일단 유형은 다르지만 같은 슈터로 이름을 날린 동갑내기 문경은 감독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수 있으며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에 이르기까지 맞붙었던 같은 학번의 김승기 감독과의 맞대결이 기대되고 마지막으로 홍대부고 1년 선후배 사이로 현대,KCC에서 이·조·추 트리오중 ~ 한명으로 이름을 날린 이상민 감독과의 맞대결이 기대된다.
- 2017년 03월 11일 수원대 여자대학부 감독 재임 및 KBS & KBS N SPORTS 해설위원 시절 자신의 절정을 만들어주었던 LG 세이커스의 창단 20주년 기념경기에서 스승이었던 김태환 감독과 신선우 감독과 함께 영상에 나왔다. '농구 광역시' LG, 창원 팬들과 함께한 20년
- 사실상의 삼각 코칭스텝 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명지대 감독이 창원 LG 감독이 되고 창원 LG 수석코치가 전자랜드의 수석코치가 되고 전자랜드 수석코치가 명지대 감독이 되었다.[29]
- 이조추 트리오를 형성했던 이상민과는 그닥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연습할 때나 경기할 때나 서로 호흡은 잘 맞았다고(...) 조성원의 말에 따르면 나중에는 그냥 내가 저기쯤까지 죽어라 달리고 있다 자리잡으면 이상민이 저쪽에서 패스하겠지 싶어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그랬다는데 딱 정말 그러더란다... 약속된 플레이나 연습한 전술도 아니었음에도. 이상민도 나중엔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눈치는 척척맞아 새삼 신기했다고. 반면 이조추의 또다른 일원인 후배 추승균과는 그래도 친한 편이다. 비록 조니 맥도웰의 근황 시절 KCC 감독 재임으로 인해 연락이 닿지 못했지만 그리워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대외적으로 180㎝이지만 실제로는 179㎝라고 한다[2] 현대 다이냇/걸리버스, LG 세이커스, KCC 이지스 시절[3] SK 나이츠 시절[4] 감독대행 포함[5] 지상파 프로농구 겸 여자프로농구 및 대학농구를 모두 생방송 및 심야 스포츠 하이라이트 녹화 중계경기[6] 여자프로농구 및 여자대학농구와 남자대학농구[7] 남들보다 농구를 늦게 시작한 조성원은 부족한 개인기를 보충하기 위해 당시 강동구의 집에서 먼 학교까지 등교하기 전 새벽에 인근 빠이롯트 농구단 (대웅제약 농구단의 전신) 연습장에서 여자 실업팀 선수들과 같이 연습했다고...[8] 경기종료 12초를 남기고 100대 100 의 동점이 된 상황에서 종료 3초전 극적인 결승골을 넣은 전휘 선수 역시 조성원과 같은 배재중 동기로 둘다 친구따라 꼽사리껴서 진학한 같은 신세의 선수였다. 정말 만화같은 일...[9]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학특기자 입학을 위해서는 전국대회 4강이상의 성적이 입학요건이 되기 때문에, 그 경기로 조성원의 대학진학이 가능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당시의 홍대부고는 용산고, 경복고 등의 강호들이 빠진 마이너급 대회인 동국대 총장기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지만 메이저급 대회 4강에 오른 것이 더 큰 성과.[10] 동국대 총장기 준우승은 이후 조성원이 현대에 입단해서 우승을 경험하기 이전에 경험한 가장 좋은 성적이다. 고교와 대학을 모두 약체팀으로 다녔기에...[11] 최강팀 용산고를 꺽고 올라간 4강에서는 용산고 다음으로 강했던 경복고를 만나 88-82로 석패했다. 당시 경복고에는 1학년 슈퍼신인 전희철과 우지원이 버티고 있었던...경복고는 그 대회에서 결국 우승...[12]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의 농구명문이 아닌 명지대를 택한 이유 중에, 동기들 동반진학 문제외에도 농구 입문초기에 2년 넘게 겪었던, 만년 후보선수의 경험도 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수층이 두터운 팀에서 주전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위험성보다는 중위권팀에서 에이스로서 많은 출전시간을 보장받기 위한...단신으로서 느끼는 핸디캡도 컸을 것이고..[13] 같이 운동한 동기생들의 동반진학이 선수들의 학교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흔하다. 조성원과 비슷한 연배의 마산고 출신 김영만도 원래 고려대에서 스카우트 했지만, 고려대는 동기생 동반진학을 4명까지만 받아주겠다 했고, 중앙대측이 김영만의 동기생 6명을 모두 받아준다고 해서 중앙대로 입학했다고...[14] 당시 중앙대 멤버는 김승기, 홍사붕, 김희선, 김영만, 조동기 등.[15] 당시 멤버 전희철과 김병철[16] 다만 이는 과대평가 됐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kbl에서 역대 4쿼터의 나쁜기록(4쿼터 한정 턴오버가 많고, 야투율 꼴찌, 3점슛율 꼴찌, 실패 횟수 1위등) 대다수의 기록을 조성원이 가지고 있으며, 4쿼터의 사나이라는 별명 때문인지 유달리 많이 쏘고 상당부분 실패했다. 그러나 워낙 많이 쏘다보니 어쨌든 들어간 골도 많아서 미화된 측면이 많다. 특히 4쿼터 3점슛율은 25프로도 되지 않는다.[17] 이는 창원 LG의 최초의 시즌 MVP이다.[18] 이미 신선우 감독의 높이 강화 전력은 양희승과 전희철로 대실패를 거두면서 최고명장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결국 예전의 초심으로 돌아간 격이다. 하지만 조성원은 이미 LG 팬들과 SK 팬들에게 미안해했고 친정과 같은 현대의 후신인 KCC에서 유종의 미로 최선을 다짐했다.[19] 런앤건 스타일의 조성원은 이미 슈퍼스타였지만 희생정신을 알기 시작했으나 낮은 키와 나이에 따른 줄어든 속도는 세월의 영향인지 예전의 그 모습과는 다르게 된다.[20] 고질적인 왼쪽 무릎 부상 때문에 퇴행성 관절염을 앓았던 데다 연골이 찢어져 물이 차고 심한 통증까지 왔다고 한다.[21] 조성원은 2006년 5월에 만취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잘 없어서 넘어갔다.[22] 허재도 조성원에게 박수칠 때 떠나라는 애정어린 조언이 있었다. 사실 조성원은 무릎수술로 인해 더 이상 예전의 점프력과 스피드를 내세우기 어려웠다. 결과론으로 서로 큰 갈등없이 끝난 격이었다.[23] 대학농구 여자부는 광주대학교가 넘사벽인데다 2017년 또한 무패행진이라 어쩔 수 없었다.[24] 다만, 셋 다 감독으로써는 평가가 좋지 못한 편들인데, 이상민의 경우 삼성 부임 초기에는 김상준이 망친 게 컸고, 모기업까지 제일기획으로 바뀌면서 투자가 줄어들게 되자 잦은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리빌딩으로 다음 시즌 6강, 다다음 시즌 준우승까지 했지만, 그 뒤로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18~19 시즌에는 또다시 최하위를 기록했다. 조성원은 남자농구는 아니지만 이미 여자농구에서 실패 경험이 있으며, 추승균 역시 정식 감독 부임 후 정규리그 우승을 했지만, 에밋빨의 한계가 챔프전에서 드러나면서 무기력하게 준우승을 했고, 다음 시즌 주전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다. 그 다음 시즌 천적이라 불리는 SK에게 지면서 4강 직행에 실패했고, 그 4강 플레이오프에서도 SK에게 1승 3패로 탈락하였으며, 다음 시즌에도 성적부진은 계속되면서 시즌 초에 경질된다.[25] 자신도 친정인 KCC 이지스지만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26] 다만 이 점은 후술되어있는 강을준 감독과 유사한 면이기도 했다. 강을준은 이게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자신있게 던져!"''' 라고 할 정도였으니까...[27] 즉시 전력감이 점점 찾기 어려운 한국 농구의 현실이 있으나 농구 기자들과 농구 팬들은 이근휘 대신 윤원상을 선택한 조성원 감독에 물음표를 달았는데, 이미 팀에는 김시래, 이원대, 박경상, 정성우 등 포인트 가드들 즉 땅꼬마들만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이 나올 만했다. 그러다 보니 잘 지도하면 성장가능성이 높은 드래프트 최고 슈터인 이근휘를 외면한 점에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심지어 고향도 창원으로 알려지면서 연고 팬들은 한숨을 내쉬게 된 것.[28] 결국 이 트레이드는 감독 조성원의 위상만 추락시키게 되었다. 트레이드는 본인이 먼저 구단에 추진했던 걸로 나와서 팬들의 실망감을 불렀다. 참고로 조성민-김영환 트레이드 역시 김진 감독이 먼저 요청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29] 이들 셋은 각자 친정팀으로 돌아가게 된것인데 조성원은 2000~2001시즌 이후 20년만에 강혁은 2012~2013시즌 이후 8년만에 김태진은 1993년이후 27년만에 돌아갔다.[30] 사실 운동 쪽 감독들 대다수는 욕설은 기본에 구타까지 하는 감독이 많다. 프로 감독들 중에서는 일부 있고 아마추어 쪽은 정말 많다. 최근 최숙현, 고유민 선수의 비극을 보면 전부 감독과의 관계가 큰 원인이다. 사실 폭언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전임 감독들에게 그렇게 배워온 측면이 크고, 군기가 매우 센 쪽이 스포츠계 특징이기 때문이다. 군기가 심한 셰프계만 보더라도 고든 램지, 에드워드 권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아주 폭언을 대놓고 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