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철

 




'''김병철의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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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영구결번'''
No.10 김병철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2
(선수)
'''
'''2016
(코치)
'''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수석코치'''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No.10 '''
'''GOYANG ORION ORIONS'''
'''김병철
金昞徹'''
<colbgcolor=#ffffff> ''' 출생 '''
1973년 3월 6일 (51세)
[image] 전라북도 진안군
''' 국적 '''
[image] 대한민국
''' 신체 '''
185cm|체중 85kg
''' 직업 '''
농구선수(슈팅 가드 / 은퇴)
농구감독
''' 종교 '''
개신교
''' 학력 '''
대방초등학교 (졸업)
용산중학교 (졸업)
용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 / 학사)
''' 프로입단 '''
1996년 동양제과 농구단
''' 현역시절 등번호 '''
'''10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 영구결번)'''
''' 병역 '''
[image] 상무 농구단 (1998~2000)
''' 소속 '''
<colbgcolor=#ffffff> ''' 선수 '''
'''[image] 동양제과 농구단 (1996~1997)'''
[image] '''대구 오리온스 (1997~2011)'''
'''감독'''
[image]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2020 / 대행)
'''코치'''
[image]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2013~)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기타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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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 오리온스에서 뛰었던 대한민국의 농구인이자 '''오리온스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로, 현재는 오리온의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여기에 의 유일한 영구결번 선수로 선수와 코치로 모두 오리온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2. 선수 시절


[image]
고려대 1학년 때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맡아 같은 학번의 전희철과 함께 팀을 이끌었으나 공격력은 출중했지만 포인트가드 치고는 부족한 리딩과 패스 능력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신기성이 입학한 이후 슈팅 가드 자리에서 제대로 자신의 공격력을 발휘하며 맹활약, 새로운 고려대 전성 시대의 주축이 되었다. 하지만 허재나 를 상대로는 뭔가 부족한 활약을 보였고 팀을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끄는 데는 실패했다. 물론 김병철이 못했다는 게 아니라 허재와 가 너무 넘사벽이었다...
현주엽이 가세한 1994년에 그 유명한 MBC대회 결승전에서 연세대에 19-37로 뒤지다 대역전극을 펼칠 당시 폭풍 3점을 시전하며 팀의 원톱으로서 미디어에 처음 노출되었다. 문경은/우지원을 최희암이 슛머신 스타일로 키웠다면 김병철은 슛 능력과 더불어 페네트레이션과 점프력까지 겸비한 가드로, 볼 배급은 신기성이 전담하고 김병철은 경기 흐름을 좌우하는 리딩 가드로서 자리 잡았다. 연속선상인 94-95년 농구대잔치에서 고려대는 마지막 경기까지 연세대와 우승을 다툰 끝에 2위로 리그를 마감한다.(모두 기억하다시피 마지막 그 유명한 석주일 터치아웃 후 연대 볼 선언. 용가리가 3점라인 밟고 던진 결승골로 연대가 77-75로 승리한 경기. 일명 황보삼남 사건. 이 경기에서 김병철의 슛감은 대회 최악 수준이었으며 막판 돌파 과정에서 김병철을 막던 이상민은 착지 문제로 종료 1분 남기고 실려 나간다.) 고려대 성적은 전체적으로 전희철-현주엽의 포스트가 받쳐주고 백코트는 컨디션 따라 어떤날은 김병철이 터지고, 어떤날은 양희승/신기성이 터지고 하는 식으로 균형이 맞춰졌지만, 기아 혹은 연세대전같은 큰 경기에서는 김병철이 터지고 안 터지고에 따라 승부가 갈린 경우가 많았다.
고려대학교와 함께 김병철은 이 대회부터 마침내 전국구 스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는데, 속공 상황에서 일부러 바깥으로 나가 3점포를 시전하기, 신장 대비 좋은 러닝점프를 활용한 폭풍 드라이브인 등 과감하면서도 우아한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연세대가 떨어져나간 상황에서 모든 농구팬이 집중한 기아와의 4강전 2차전에서는 3점슛 4개 포함 26점 원맨쇼를 펼치며 당당히 인터뷰의 주인공이 되었고 언론들은 기아의 시대는 끝났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결과는 모두 아시다시피 기아우승) 3차전에서는 김병철의 야투 성공률이 떨어지는 와중에 허동택이 다시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며 아직은 아우들이 안 된다는 걸 재확인했지만 허재, 가 화면상으로 그렇게 당황하는 시리즈는 그 당시만 해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1995-1996 농구대잔치에서는 고려대학교가 최강 전력을 자랑하며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13연승을 기록했다. 이 시즌 김병철은 '''13경기에서 104개의 3점슛을 시도해서 52개를 성공'''시키고 평균 20득점을 넘기는 무시무시한 슈팅 능력을 과시하는 한편 속공, 돌파, 어시스트, 리바운드#s-2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코트 위를 날아다니면서 종횡무진 대활약을 펼쳤...지만 다시한번 플레이오프에서 기아한테 1승 2패로 패퇴했다. 본격적으로 피어오를 시기였지만 그의 용산고 선배 허재는 아직 한창이었고, 피터팬이 뛰어넘기에는 너무 높은 산이었다.(대통령...)
대학시절 김병철의 플레이에 대해 고대 팬들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병철이가 미치면 나머지는 왔다갔다만 해도 된다"'''

졸업 후 전희철과 함께 오리온스의 전신이 되는 동양제과 실업 팀에 입단해 슈팅 가드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고, KBL 출범 후에도 팀의 슈팅 가드로서 KBL 전체 슈팅 가드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공격력을 보였다. 상무에 입대했을 때는 팀 속공의 선봉장이 되어 팀을 이끌었다.
김병철과 전희철의 부재 상태 동안 32연패 등으로 막장 성적을 올렸던 오리온스에 복귀하여 다른 괜찮은 포인트가드가 없는 팀 상황상 포인트가드를 맡았는데, '''포인트가드로서는 김병철이 여러 모로 안 맞다는 걸 다시금 보여주며''' 팀을 두 자릿수 승수도 못 올리게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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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000-2001 시즌 후 신인 가드 김승현이 입단하고 김승현과 당시 팀의 1옵션이던 마르커스 힉스를 지원사격하며 팀 우승의 공신 중 한 명이 되었고, 전희철이 팀을 떠난 다음 시즌에는 전희철의 빈 자리만큼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창단 시절부터 코치로 함께하면서 내부승진을 했던 김진 감독님은 그에게 주장직을 주면서 수비와 속공부터 책임감을 가지도록 유도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열게했고 2002-2003 시즌 정규리그 MVP와 함께 대구 동양의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공헌하게 된다.
그러나, 동양의 신화를 이끌었던 스승이자 명장인 김진 감독이 11년 정들었던 팀을 떠난 이후 대구 오리온스는 극심한 부진과 함께 양궁순위(10-9-10-10)이라는 시련을 겪게 된다.
후임 감독이었던 이충희 감독과 김상식 수석코치 겸 감독이 왔지만 전성기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는 김승현이 멀쩡한 동안에는 슈팅 가드로서 조금씩 하락세 속에서도 평 균 두 자릿수의 득점을 올리며 팀의 주축이 되었으나, 김진 감독이 떠난 이후 07-08 시즌부터는 한 자릿수로 평균 득점이 추락하며 팀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0 - 2011 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했다. 오리온스의 창단 때부터 해서 데뷔와 은퇴까지 오리온스와 함께 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구단의 삽질로 인해 은퇴식은 대구가 아닌, 본인은 한 번도 뛴 적이 없는 고양에서 치르게 되었다. 그저 지못미!
플라잉 피터팬이란 별명에 걸맞는 스피드와 운동능력, 그것들을 이용한 돌파와 속공 가담, 좋은 3점 슛까지 겸비했던 선수. 전성기 때는 경기 중에 덩크를 넣은 일도 있다. 그런 한편 감각적인 플레이도 곧잘 했고 2 대 2 플레이에도 능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득점을 해주는 에이스라는 이미지는 그다지 없는 편. 대학 시절이나 프로 시절이나 1인자로서 팀을 이끌기보다는 2인자로서 에이스를 지원사격해 주는 역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물론 한국 농구사에서도 손꼽힐만한 훌륭한 슈팅 가드임에는 분명한 선수. 김병철 이후로 '''퓨어 슈팅 가드의 계보는 사실상 끊겨버린지 오래다.''' 오랜 대학 후배인 김지후16-17시즌에 약간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17-18시즌 두경민이 커리어 하이를 찍으면서 슈팅 가드의 계보를 이어가나 싶었지만[1] 군입대 크리로 다시 중단..... 여하튼 김병철처럼 수 시즌간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슈팅 가드는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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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유소년팀 코치로 있다가 2013년 2월 18일 팀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서동철 수석코치가 KB 스타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른 인사로, 지도자 데뷔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자리 역시 서동철 수석코치가 맡았던 수석코치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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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로 선임된 이래 현역시절 본인의 장점이었던 3점슛을 포지션을 불문하고 선수들에게 장착시켜 엄청난 효과를 보고 있다. 그 중 백미는 2014-15 시즌으로, 3점 성공률이 무려 39.38%로 거의 40%대에 육박하는 성공률을 보여주며, 2위인 인천 전자랜드와 거의 5%P 정도 차이나는 압도적인 3점 성공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가드진들의 3점슛이 몰라볼 정도로 안정되어서, 슛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한호빈, 정재홍, 김강선 등의 선수들도 오픈 찬스에서는 성공률이 월등하게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5-16시즌에는 플레이는 화려하지만 외곽 공격옵션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 잭슨을 전담지도하여 3점 성공률을 엄청나게 끌어올려 상대편의 새깅 디펜스를 무력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리온스의 우승이었고, 김병철 코치는 선수와 코치로 모두 우승을 경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2017-2018 시즌에는 추일승 감독이 요로결석으로 인해 결장할 때 사실상 감독대행으로서 침착한 운영을 보였고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2018-2019 시즌부터 추일승 감독은 사실상 차기 감독으로 수석코치인 김병철에게 감독으로서의 전권을 양보하게 되었다.
그해 10연패 이후 극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서 많은 지시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9-20 시즌에는 팀이 최하위로 처지게 된다. 그러면서 추일승 감독이 김병철 코치에게 작전타임 때마다 작전 지시를 대신 시키는 횟수가 늘어났었는데, 이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후임 감독으로 김병철이 확정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이후 2020년 2월 19일에 국가대표팀 아시안컵 경기로 인한 리그 휴식기인 상황에서 추일승 감독이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를 하자 눈물을 흘렸으며 결국 남은 시즌은 김병철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승격되어 맡게 되었다.
2월 26일 울산 현대모비스와의 홈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경기는 승리했지만 아쉽게도 코로나 사태로 인한 무관중 경기로 치뤄졌기 때문에 홈팬들과 기쁨을 나누지는 못했다.
이후 2020년 3월 24일, 연맹이 코로나 19 때문에 시즌 종료를 선언하면서 감독대행으로 2경기에 그쳤으나 오리온의 최종 성적은 10위가 되었다.
시즌 종료 이후 감독으로 승격할 것이라고 팬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팀은 강을준 감독을 선임하며 다시 수석코치 신분으로 돌아갔다. 웹상에서는 왜 김병철을 정식 감독으로 선임하지 않느냐며 성토 중이지만, 강을준 감독의 계약 기간이 2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모험보다 안정을 택했고 그동안 김병철 코치에게 시간을 더 벌어주겠다는 방침이라고 봐야 할 듯 싶다.
그래도, 수석코치로서 훌륭한 성과를 냈다. 추일승호의 오리온에서 대구 시절의 영광과 아픔을 뒤로하고 이미 추일승 감독은 부임 전 오리온스라는 이름을 제외하고 모두를 바꾸기로 했는데 팀의 유니폼 색깔과 충격적인 대구에서 고양으로의 연고이전 속에 팀컬러도 가드 농구에서 빅 포워드 농구로 개편까지 하면서 어려운 오리온을 9년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서동철 코치가 있었지만 김병철은 자신도 기다리면서 남겨둔 이후 수석코치직을 통해 의견을 잘 나누면서 고양 시절 재건과 성장 그리고 정상을 함께했다.
추일승 감독의 수석코치 시절 서동철 전 수석코치의 스타일 그대로 런앤건을 유지하면서 슈터 코치로서 팀의 외곽슈팅을 끌어올렸다.
오리온의 또 다른 레전드인 허일영의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에 공헌했고 이승현에게 캐치앤샷을 장착하게 하면서 공격력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최진수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

4. 기타


일정이 없을 때는 KBO 리그 관전도 하러 오는데, 키움 히어로즈의 열혈 팬으로, 홍원기 코치와는 고려대 동문이자 동갑내기 친구로 친분이 깊다.
대구 오리온스 선수 시절에도 비시즌이면 대구광역시까지 와서 삼성 라이온즈 경기를 관전하기도 했다. 당시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한 시즌에 한 번 이상은 전광판 화면에 잡히곤 했으며, 양준혁이 은퇴식을 할 때 참석해서 양준혁에게 꽃다발과 사인볼을 증정하기도 했다. # 참고로, 김병철과 양준혁 둘 다 등번호가 10번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추일승 감독이 2019-2020 시즌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수석코치로서 활동했던 김병철 코치의 내부승격이 점쳐졌으나, 뜬금없이 야인 생활을 하던 강을준 전 명지대-LG 감독이 KBL 감독으로 떠난지 무려 9년만에 감독 자리에 부임하게 되었다. 선수 시절 동안 보여줬던 활약상이나 코치로서 보여줬던 역량을 생각하면 다소 파격적이면서도 어이없는 인사. 김병철 코치는 계속 수석코치로서 팀을 이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교 대선배인 강을준 감독은 김병철 수석코치를 위로하면서도 같이 잘해보는 의미로 의기투합을 했다. 사실 강을준 감독은 고려대 농구부의 선수였지만 명지대 농구부의 감독 겸 교수였다.
과거 자신을 빛내주었던 창단멤버로 코치 겸 감독이었지만 고려대 농구 대선배이신 김진 감독님의 일화를 공개하면서 책임감을 배웠다.
이충희 감독님과도 슈팅내기를 하는 승부욕도 보였다.

5. 관련 문서


[1]두경민은 퓨어 슈팅 가드라기보단 듀얼 가드 성향이고 무엇보다 저 시즌에는 4쿼터 막바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번 포지션으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