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행궁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소실
3.2. 정비
3.3. 복원계획
4. 위치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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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행궁의 부속건물이자 후원에 위치하였던 애련정의 모습
1872년 지방지도에 나타난 이천행궁의 모습

1. 개요


지금의 이천시 온천공원과 이천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하였던 조선왕조의 초수행궁이자 능행용 행궁.

2. 상세


세종 때에 지어져서 헌종 때까지 사용되었던 행궁으로 만약에 남아있었다면 청주 초정행궁온양행궁과 같이 조선의 초수행궁으로 이름을 알렸을 행궁이다. 세종24년에 세워졌으며 이후 세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가 이곳을 다녀갔다.

3. 역사


세종24년 건설되었다, 이때에는 행궁의 규모가 크지 않았을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크게 고쳐지어 행궁의 규모는 애련정 북쪽부터 이천초등학교 일대를 포함하는 거대한 행궁으로 변하였다. 이후로 많은 왕들이 다녀갔으며 구한 말까지도 존속하였다.
행궁은 다른 초수행궁들처럼 탕실과 정전,내행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970년대에 정비 당시 80대 할아버지의 증언으로 행궁의 전각들의 위치와 형태가 확인되었다.[1]

3.1. 소실


1907년 정미의병으로 일본군이 불을질러 행궁을 불태웠다. 이후로는 재건되거나 쓰이지 않았다.[2] 이 사건 이후 행궁의 본궐이 있던 지역에 이천초등학교를 건설하였고, 탕실이 있었던 지역의 일대를 공원화 하여 공원으로 쓰였으며 지금까지 공원이 되어있다. 사실 이때는 이미 대한제국은 망국의 길로 가고있었고 행궁이 소실된 년도가 한일합병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었던 1907년, 즉3년 망국 바로 직전이라서 이천행궁을 재건할 여지는 대한제국 측에서도 없었을 것이다.

3.2. 정비


본래의 이천행궁이 있던 자리는 초등학교로 변하였고, 탕실이 있었던 부지는 1972년 온천공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때 이 일대에 있었던 행궁의 탕실 초석들과 일부 남아있던 담장들을 모조리 없에고 행궁이 있던 부지에다가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시민공원으로 만들어놓았다.

3.3. 복원계획


현재 행궁의 복원계획은 없다. 2002년 당시 설문조사를 통해서 높은 지지율을 보였던 이천행궁과 관아의 복원은, 이후 이천시의 부지활용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면서 타결을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거기다가 현재 18년이 지나면서 시민의식 또한 변해버렸고, 이천시에서 적극적으로 밀어 붙이지도 않는데다가 "현재 온양행궁에 비해 존재감도 떨어지는 이천행궁을 굳이 복원해야 하나?"라는 시민들의 인식이 행궁을 복원하거나 재현하려는 움직임을 멈추고있다.
한때 행궁과 관아가 복원될 기미가 보였으나 이후 묻히고 말았다.
한편 2020년에 청주에 있는 초정행궁은 복원이 완료되어 관광지가 되었다. 또한 재현된 최초의 초수행궁이 되었다.

4. 위치와 형태


이천 이천초등학교와 동쪽에 위치한 온천공원 주차장에서부터 잔디광장 일대가 모두 행궁과 관아터 였을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추정하는 바로는 애련정 북쪽부터 계단식으로 행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다만 행궁의 탕실은 산에 붙어있기 때문에 조사만 한다면 나올 가능성도 있으나 이천시는 관심이 없으므로 추후 복원계획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1] 당시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행궁이 이천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일부 경사진 지역 부분에 탕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쪽, 행궁 중앙에 정전이 있었다고..[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