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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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행궁 복원도
1. 개요
2. 역사
3. 건물 구성
4. 현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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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온양행궁 전경
溫陽行宮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에 있던 조선시대행궁이다. 다른 공식 행사나 임시로 머물기 위한 다른 행궁들과는 달리 온천욕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용하는 일종의 요양소라는 점이 특이하다. 다만 이러한 초수행궁은 전국에 어느정도 분포하고 있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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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시기에 지은 혜파정.[1]
일제강점기에 찍힌 온양행궁 영괴대와 회화나무의 모습
조선왕조실록》에는 첫째 임금 태조부터 온천을 자주 찾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는 처음에는 주로 황해도 평산행궁에 있는 평주온천을 이용했으나 도읍을 옮긴 뒤로는 300리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신하들이 자제할 것을 청했다. 태조는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애초에 직접 가는 본인도 멀다고 느꼈으므로(...) 평주온천을 차츰 덜 찾았다.
1396년(태조 5년)에 충청도 온천으로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한 지명을 표기하지는 않았지만 온양온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온양온천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
이후 태종세종평주, 이천 등에 있는 온천을 찾았으나 뛰어난 치료 효능 및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등의 이유로 온양으로 온천욕을 떠나는 횟수가 늘었다.
그래서 세종 때에 온양에 행궁을 세웠다. 당시 세종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비롯한 여러 효험이 있다는 물이 나는 장소들을 찾았으며, 이에 온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초수행궁의 건축을 감독하였다. 세종은 이러한 공사로 백성들이 피해를 받을것에 대한 우려로 인해서 상당히 작은 규모로 행궁을 건립하였다. 이 행궁이 바로 온양행궁의 시작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면서 온양 지역을 급습하였고 이 때 온양행궁도 불에 탔다. 이후 오랫동안 온궁이 있었던 터는 방치되었고, 결국 왕들의 온행도 중단되었다.
임금이 다시 온양을 찾은 것은 현종 때 였다. 당시 현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폐허가 온양온천을 선택하고[3], 이후 무려 5차례나 온행을 하였다.[4] 이때 온양행궁을 복구하였다.
현종 이후 숙종, 영조를 거쳐 사도세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95년간 왕과 세자가 온양행궁을 활발하게 이용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자신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추억이 깃든 장소인 온양행궁에 영괴대라는 단을 설치하고 사도세자가 직접 심었던 3그루의 회화나무를 정비하였으며[5]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후 비록 행궁은 많이 퇴락하였지만, 순조가 즉위하고 1834년에 온양에 온 조수삼의 《온정기》에 의하면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무렵까지 행궁의 건물은 관리를 받으며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고종 시대인 1871년(고종 8년)에는 국왕이 정무를 보던 내정전이 퇴락하여 사라졌지만, 이 무렵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과 혜파정을 지었고, 흥선대원군이 온양행궁을 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여전히 왕실의 행궁으로 활발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년)부터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정부에게서 온양행궁의 소유권을 가져오면서 행궁 내부에 있었던 대부분의 건물들을 헐고 그 터에 대중탕과 여관을 겸비한 '신정관'과 '온양관'이라는 이름의 온천숙박업소를 지었다. 이후 탕실이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바뀌었다. # 이렇게 온양행궁은 점차 옛 모습을 잃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행궁에 불이 붙어 온양행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임금이 찾지 않는 비수기에는, 왕의 전용 공간과 세자궁 침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 백성들도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재상사대부가의 부녀 또한 남쪽 탕에 한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여 일반인들도 온천욕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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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지리조사에서 나오는 온양행궁
일제강점기 온양관으로 사용당시의 모습

3. 건물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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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행궁전도
정조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그 자취를 기록한 책인 《영괴대기(靈槐臺記)》[6]라는 책 속에 《온양행궁전도》가 실려있다. 이 그림에 따르면, 2중의 담장이 온양행궁을 둘러쌓았다. 당시 안쪽 궁장의 가운데에는 왕의 침소인 내정전(內正殿)과 집무실인 외정전(外正殿)이 있었고 옆에는 국왕의 치료와 휴양을 위한 시설인 탕실이 있었다.
내정전은 정면 4칸, 측면 4칸의 16칸이고, 외정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12칸이며, 탕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12칸이라고 적혀있다. 그 외에도 여러 관청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안쪽 궁장과 바깥 궁장 사이에는 초가지붕 또는 기와지붕으로 된 홍문관, 승정원, 상서원, 사간원, 수문장청 등의 건물들과 수라간이 있었다. 수라간은 단순히 음식만 만드는 게 아니라 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대거 머문 곳이었기에 임금의 처소를 제외하고 제일 규모가 컸다.
중앙에 12칸짜리 욕실과 양방, 협실 등이 갖춰진 온천당이 있고 그 건물에 바로 천연 온천 탕실이 있었다. 탕실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통로로 보이는 협루가 있고, 찬바람을 쐴 수 있는 이 남북으로 하나씩 있었다. 온돌을 깐 욕실은 동, 서 양쪽에 있었다. 이중에서 온정은 옥돌로 함 가운데를 빙 둘러 붙여 만들었다. 중국의 온천과 달리 화려한 장식물 및 치장은 없었다. 하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만든 솜씨가 굉장히 세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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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괴대

4.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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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행궁 자리에 들어선 온양관광호텔
지금도 천연 그대로의 온천이 나오며 현재는 온양관광호텔이 들어서있다. 입장료는 온천만 따졌을 경우 대인은 7,000원, 소인은 3,500원(24개월~초등학생 미만), 65세 이상은 경로 우대로 5,500원이며, 30매 이용권은 135,000원이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참조.

[1] 이 건물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2] 충청도에 온양온천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아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온양군'의 '온천'에 대해,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우리 '''태조''', 세종,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후략)'라고 쓰인 것을 보아 충분히 온양온천으로 유추가 가능하다.[3]현종실록》을 보면 '평산 온천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해 온양으로 정한다.' 고 젹혀있다.[4] 왜 무려라는 말을 쓰는지 의문이 들수는 있겠지만, 당시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의 간청으로 온행을 많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온행을 5번이나 갔다는 것은 꽤 많이 간 것이다.[5] 이 회화나무들 중 2그루의 회화나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살아남는다. 현재는 한그루만이 살아남아 옛 행궁터를 지키고 있다.[6] '영괴대'란 신령스러운 느티나무 옆에 설치한 사대(射臺)라는 뜻. 1760년(영조 34년) 사도세자가 행차에 활을 쏘던 자리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어 영괴대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현재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