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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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忠武公全書. 조선 정조 19년인 1795년, 정조의 왕명에 따라 유득공, 윤행임 등이 편찬, 간행한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 총 14권 8책이며, 현재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1795년에 정조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물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보존 상태 또한 나쁜 것에 한탄하며 왕명을 내려 그동안 전해내려오던 이순신의 문적들을 모아 유고집으로 간행하여 제대로 관리하도록 한 것으로, 규장각검서 유득공과 교서관의 윤행임 등이 14권 8책으로 정리하여 간행한 것이다. 정조의 실록에도 전서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링크1 링크2
충무공 이순신이 남긴 문적들은 1598년에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직후부터 참전 군병들과 지방 유생들에 의해 소중히 보호되어 왔으며[1] 1707년 이순신의 생가에 현충사를 세우면서 유물의 보존 체계를 더욱 체계적으로 세우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보존 상태가 안 좋아지고 훼손될 위험성도 점차 커졌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명을 내렸던 것이다.[2]
이순신 장군이 직접 붓으로 써내려간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이순신 난중일기 원문을 필사한 내용, 충무공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들이 남긴 기록인 동의록(同義錄), 기타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이나 이순신이 남긴 장계, 편지, 시문 등의 자료들을 모두 모았다.
구성은 크게 책 서문에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이순신의 큰 덕과 우국충정, 그리고 업적을 찬양하며 직접 올린 윤음과 어제 등을 실었고, 이후 권1에 이순신의 시와 잡문들, 권2 ~ 권4에 이순신이 지었던 장계문들, 권5 ~ 권8은 난중일기의 내용들, 권9 ~ 권14는 나머지 부록과 부설들을 실었다. 완성 후에는 정조가 내탕금으로 인쇄비용을 내렸다.
3. 의의
일제강점기와 근현대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상당수의 이순신 장군 문적들이 전해내려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이충무공전서는 단순한 한 인물의 문적이 아니라 일종의 왕실 유물로 취급받았고, 이순신의 유물과 문적들을 탄압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일본인들도 이왕직 조선 왕실 인물들의 필사적인 가드질에 이를 함부로 건들 수가 없었다.
이충무공전서는 이왕직의 비호 아래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출판까지 될 수 있었고, 이에 분격한 일제 측에서 왜추(倭酋), 왜적(倭賊)과 같은 비하글들을 검열하고 탄압하려 했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네이버 뉴스 : 이충무공전서, 일제 때 검열 피해 펴낸 진실 밝혀져. 양승률 대전시 문화재종무과 학예연구사, 1795년 간행된 것과 일제 때 나온 전서 대조·교정 분석…“오·탈자 아니라 검열 피하기 위해 삭제된 글자 초서 등으로 숨기는 방법으로 발간”
아마 1795년 당시 정조의 혜안으로 조선 왕실이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지 않았다면 일제강점기 시절 이순신 장군의 유물들 또한 상당수가 보호받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현재 이순신 장군이 직접 친필로 지은 난중일기 원본 중 1권은 분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난중일기는 1592년의 '임진일기'부터 1598년의 '무술일기'까지 총 8권이어야 하나 이 중에 1595년의 일기인 '을미일기'의 행방이 묘연해 7권만 남아있는 상황.[3] 하지만 1795년 당시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될 당시에는 난중일기가 단 1권의 분실도 없이 완벽한 상태였고, 이 덕분에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 파트에는 분실된 '을미일기'의 내용 또한 적용되어 있다.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충무공전서를 통해 분실된 1권의 내용 또한 유추, 복원하고 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종가에서 난중일기의 초고본을 빌려 난중일기초를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을미년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일찌감치 만들어진 이충무공전서가 없었다면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현대에는 영영 알 길이 없을 뻔 했다.
간찰 역시 마찬가지로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의 서간첩에는 이순신이 조카와 인척인 현건, 현덕승 등에게 보낸 친필 편지 6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충무공전서에는 9통의 편지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사라진 이순신의 친필 편지 3통의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물론 여기에 실린 편지 가운데 하나인 상모숙서(上某叔書)[4] 의 경우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건[5] 등을 볼 때 이순신이 쓴 편지가 아니라 후대에 어떤 이유로 이순신의 편지인 것처럼 잘못 삽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
마지막으로 이충무공전서 통제영귀선과 이충무공전서 전라좌수영귀선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북선 그림이며 거북선의 실체를 밝히는 가장 권위있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4. 관련 영상
5. 바깥고리
[1] 무관을 무척 천시하던 사대부, 그것도 지방 유생들이 무관의 기록을 보호하고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경우다.[2] 다만 난중일기의 내용과 이충무공전서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데 이것은 이 책이 왕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고 따라서 왕에게 누가 될 수 있는 부분과 이순신의 개인적 입장이 담긴 일부 내용등을 편찬자들이 정치적인 입장에서 각색하는 등 걸러냈을 가능성이 높다.[3] 1597년의 정유일기는 정유일기와 속정유일기 2권으로 나뉘어있다.[4] 어느 숙부한테 보내는 편지[5] 예를 들어 "서울에서는 호차(胡差)가 성(城)으로 들어왔고, 호장(胡將) 능거리(能巨里)는 1만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하는 일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의주 건너편 구련성(九連城)에 있습니다"며 "도적의 모략을 예측하기 어려워 아주 걱정이 됩니다"라고 썼는데, 이순신이 살아있었을 때 서울에는 호병 즉 청나라(만주족) 병사들이 들어 온 적이 없고, 편지에서 언급된 '능거리'의 경우는 <승정원일기> 인조 9년(1631년) 6월 12일자와 조경남의 <속잡록(續雜錄)> 인조 11년(1633년) 5월 6일 기록에서 언급되는 청나라의 장군이다. 여기서 두 기록 모두 이순신이 전사하고 30년 뒤에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