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牙山 李忠武公 遺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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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48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순절지
'''면적'''
586,992.8㎡
'''지정연도'''
1967년 3월 18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위치'''


[image]
'''顯忠祠'''
'''Hyeonchungsa'''
1. 개요
2. 역사
2.1. 숙종의 현충사 중건
2.2.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시대의 수난
3. 관리
4. 박정희 현판 논란
5. 시설
5.1. 충무문(忠武門)
5.2. 충의문(忠義門)
5.3. 홍살문
5.4. 본전(本殿)
5.5. 구(舊) 본전
5.6. 고택(古宅)
5.7. 활터
5.8. 충무정(忠武井)
5.9. 舊 유물 전시관
5.10.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1. 개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 1967년 사적 제155호 '아산(牙山) 이충무공 유허(李忠武公遺虛)'로 지정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충사'''로 잘 알려져 있다.
본래 충청남도 아산군에 속해있던 곳이었으나, 1995년 옛 온양시와 아산군이 지금의 아산시로 통합되면서 현재 행정 소재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다.
참고로 이순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현충사 외에도 전국의 여러 곳에 위치해 있다. 전라 좌수영이 있던 전남 여수시의 충민사, 통제영이 있던 경남 통영 한산도의 충무사 등이 그 예이다. 현충사는 그 중 대표격인 형태.[1]

2. 역사



2.1. 숙종의 현충사 중건


1592년 임진왜란 이후 1598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戰死)하게 되면서 1706년(숙종 32년)에 지방 유생들이 충무공의 숭고한 호국 정신과 애민 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 사당을 세울 것을 조선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듬해인 1707년 숙종의 어명하에 지금의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생가에 충무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리고 나타낸다는 뜻에서 '현충(顯忠)' 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워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충무공의 공로와 업적을 기리는 성역(聖域)으로 거듭났다. 참고로 현충사라는 현판은 숙종이 직접 내린 것.

2.2.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시대의 수난


1865년(고종 2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왕 섭정을 맡았던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 철폐 명령을 내리게 됨에 따라 현충사도 철폐되어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유생들이 충무공의 충성심에 대한 모독과 패륜 행위를 흥선대원군이 저지르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지만 대원군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원 철폐를 강화함에 따라 현충사는 이를 계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한때 사라지기도 했었다.[2]
일제 치하에 충무공 종손(13대 종손 이종옥)이 가난해서 고택과 묘소가 포함된 임야, 현충사 부지가 경매에 넘어갔는데 1931년 5월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뜻 있는 인사들이 이 충무공 유적 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 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 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3] 이후 봉안식을 하고 현충사 사적비를 건립한다.

2.3. 8.15 광복 이후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이순신 장군의 성역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1962년에는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다는 유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유물 전시관' 이 개장되었고, 1966년에는 현충사의 경역(敬域)을 확장하여 1967년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본전(本殿)과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봤던 시절 지냈었던 가옥과 활터가 개장되기도 했다.
다만 이 때 건축 양식과 현충사 내 내부 구조 등이 일본식으로 구성되어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특히 원래 숙종 때 지어진 본전이 중심에서 밀려나, 측면에 화장실과 같이 있는 것처럼 조성된 것도 이 때 현충사 경내의 설계를 그런 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후엔 2011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기념하여 현충사 안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 개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관리


현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 사무소가 관리 및 운영을 하고 있으며 전국민 무료입장이다. 2014년까지는 매주 화요일에 휴관했지만, 2015년 1월 1일부터는 매주 월요일에 휴관한다.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4. 박정희 현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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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현충사가 세워질 당시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이 직접 사액한 현판
1967년, 박정희가 써서 건 현판[4]
현충사는 정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있어[5]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늘어난 것이 반영되어 종부 최순선[6]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을 철거하고 이전의 숙종 사액 현판을 걸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난중일기의 전시를 중단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 사무소 관계자는 "역사가 더 깊은 왕실 현판으로 교체하는 것에 공감한다"면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숙종 현판의 규격이 현재 현판보다 작아 교체할 경우 잘 안 보일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
그런데 이 말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2018년까지도 50년 이상을 박정희가 쓴 현충사 현판을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쭉 걸어오고 있었다는 소리다. 현충사가 성역화된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와 같은 현충사를 조성한 인물은 박정희이다. 박정희 정부가 이순신과 현충사를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했다는 비판이 항상 따라다니기도 했다.
또한 난중일기는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고 원본은 수장고에 있을뿐 아니라, 종부에게는 유물을 옮길 권리가 없다. 법원이 유물을 팔아먹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충무공파 종중[7]이 제기한 유물 이동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누가 쓴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와 "친일행각을 저지른 박정희가 쓴 현판을 현충사에 걸어놓을 수는 없다"라로 나뉘었다.
이와별개로 충무공파 종중에서는 '박정희 현판 철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기사 참조 그러나, 숙종의 현판은 본전의 박정희 현판 교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현충사 '구 본관'에 원래부터 걸려 있었다. 즉, 박정희 현판이 숙종 현판을 떼어내고 대신 걸려있는게 아니다.
한마디로 국가 관리하에 두지 않은 후폭풍이 전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다. 물론 국가가 온전히 관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2018년 2월 21일에 문화재청은 신 본전(1967년 건축)의 '박정희 친필 현판'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관련 기사) 문화재청은 숙종 친필 현판은 1932년 중건된 舊 본전에 그대로 걸려 있는 만큼 박정희의 현판이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며, 거꾸로 신 현충사가 박정희 정부의 작품인 만큼 오히려 현판 철거가 역사성과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무엇보다 현판을 함부로 떼는 과정에서 실수라도 한 번 났다간 건물에 손상이 가 버린다.

5. 시설


일제 강점기 ~ 광복 이후에 지은 건물들이라 문화재적 가치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물들이다.

5.1. 충무문(忠武門)



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한옥 모습의 문으로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지시에 따라 세워진 관문이다.

5.2. 충의문(忠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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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본전의 정문으로 1932년 현충사 중건 때 세워졌다가 1967년 본전이 확장 이전하게 되면서 새로 개축하여 지어진 관문이다.

5.3. 홍살문


본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관문.

5.4. 본전(本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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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현충사 성역화에 따라 확장이전하여 신축된 '''콘크리트 건물'''[8][9]로 안에는 충무공의 영정과 조선시대 때 사용했던 영기(令旗)가 보존되어 있다. 옛 본전 위의 자리에 지금의 본전을 신축하여 넓고 웅장한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옥의 티가 있다면 사당의 기능을 하는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짓는 것이 보통이나 새로 만든 본전은 팔짝지붕이다. 당연하게도 구 본전은 맞배지붕이다.
참고로 현재 내걸려 있는 한글 현판은 성역화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현판으로 예전에 걸려있는 현판은 구(舊) 본전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다. 舊 본전은 현충사 한켠에 따로 배치되어 있는데 동아일보가 현충사를 새로 중건하며, 숙종이 내려준 현판을 걸고 다시 세운 것이 舊 본전.

5.5. 구(舊) 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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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어명하에 따라 최초로 지어진 본전이자 예전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셨던 사당. 숙종이 직접 하사한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는 영정이 1967년에 새로 지어진 현재의 본전으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만 남아 보존, 전시되고 있다.
과거에는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1910년 일제(日帝)의 탄압 등으로 쇠퇴의 기로 및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가 1932년 중건되었고 1967년 지금의 본전이 신축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규모에 있어서는 처질지 몰라도 역사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 훨씬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재. 논란에서 언급된 현판만 봐도 알 수 있다.
숙종이 하사한 친필 현판이 박정희의 친필 현판에 밀려났다는 이야기가 최근 논란으로 인해 불거졌지만, 이쪽 구 본전이 현충사의 본전임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과거부터 걸려 있었던 현판을 새로 본전을 지을 때 따로 옮겨 달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제대로 논의하자면 친일행각을 저지른 박정희가 지은 현 현충사 본전이 옛 본전을 밀어내버린 점 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5.6. 고택(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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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살아온 집으로 원래는 충무공의 부인이 살던 집이었는데 충무공이 데릴사위로 오게 되면서 사실상 충무공의 집으로 바뀌었고 이후 종손이 대대로 살아오다가 지금의 현충사로 이전되어 보존 가옥으로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상술한 종부의 만행 때문에 경매에 넘어갔다가 덕수 이씨 풍암공파[10]에게 낙찰받았다(기사).

5.7. 활터


충무공이 무과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사용해 왔던 활터로 이 곳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수령 약 500년. 두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가 있고 충무공이 늘 사용했다는 과녁판이 전시되어 있다.

5.8. 충무정(忠武井)


충무공과 가족들이 고택에 살던 시절에 사용했던 우물가로 원래는 이름이 없는 우물가였으나 충무공이 전사하고 '충무(忠武)' 라는 시호(屍號)가 내려지면서 그의 시호를 본따 충무정이라 불렀다.
현재는 관람객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고 있다.

5.9. 舊 유물 전시관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물 및 유품들을 전시했던 곳으로 1962년에 세워졌으며 2011년에 철거되었다. 거북선을 비롯해 충무공이 사용했던 여러가지 유물 및 유품들이 전시되었다가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건립 이후에 철거되어 그 흔적만 구 본전 옆에 남아있다. (가리기 위해 나무를 심은 듯...)

5.10.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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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공식 개장했다.

[1] 우리 나라에서 충무공의 위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대다수의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은 박정희 시절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다.[2] 다만 똑같이 이순신을 모신 사당인 고성충렬사는 서원 철폐령을 면했다.[3] 청전 이상범 화백이 그렸던 영정으로 종가에서 보관중 없어졌다는 것이 2009년 확인되었다. 당시 종부가 암시장에 팔았던 유물을 회수하고 대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 #[4] 본전에 걸려 있다.[5] 박정희는 현충사뿐만 아니라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국립서울현충원,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 다양한 곳에 서예를 써서 보냈다. 이들은 모두 논란없이 유지되고 있다.[6] 이 사람도 문제가 많은게 충무공의 15대 종부로 유물을 암시장에 팔아먹고, 종가 재산으로 사업하다 말아먹고 고택까지 경매에 넘긴 전력이 있다. 현재 충무공 고택은 경매로 넘어가 충무공파가 소유하고 있지 않다.[7] 이쪽도 박정희는 임금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한 탓에 비판받고 있다.[8] 당시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전통 건축물을 복원하는 관행이 흔했는데, 지금은 없어진 옛 광화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9] 이런 방식의 복원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는데,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웃 일본에서 1950~60년대에 시텐노지를 복원했을 때도 전통 방식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다.[10] 풍암공파는 충무공의 할아버지인 풍암공 이백록의 후손이며, 충무공파는 풍암공파의 분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