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탕금

 



1. 개요
2. 역사
3. 운용
4. 사용
5. 비슷한 사례


1. 개요


內帑金. 조선 시대 왕실의 사유재산을 말한다. 내수사에서 관리했다. 사실 존재 자체가 비밀인건 아니기 때문에 '비자금'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조선 조정과 관료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왕실 재산이기 때문에 지금 식으로 치면 비자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조선에서만 존재했던건 당연히 아니다. 어느 나라든 왕의 개인 재산이 따로 존재한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역사


조선 시대 왕의 사유 재산은 태조 이성계의 개인 재산에서 비롯되었다. 이성계는 고려에 임관하기 전부터 동북면(함경도)에 막대한 재산을 가진 대호족이었다. 따라서 고려 말의 무공으로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기까지 하며 이성계가 형성한 재산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함경도 전체 면적의 1/3에 해당하는 봉토를 이성계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봉토란 게 그냥 땅이 아니라 농경과 목축이 가능한 토지임을 생각하면 사실상 함흥평야를 통째로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외에 이성계가 소유한 노비의 수도 적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개인 재산을 국유로 할지 아니면 사유로 할지 의론이 분분했다. 정도전은 이를 국유 재산으로 하여 회수할 것을 주장했으나, 정도전이 제거된 다음 태종이성계의 재산을 사유로 하고 이를 왕실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했다. 이것이 내탕금의 원천이 되었다. 세종 시기 일시적으로 합쳐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세조 이후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지속된다.
고종 시기 내수사를 내장원으로 승격하면서 내탕금은 더욱 무지막지하게 늘어났으며, 광무개혁의 자금원으로 쓰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대한 제국 황제가 이왕으로 격하된 뒤에도 이 재산은 어디 안 갔다. 오히려 일본 제국이 한국 황실을 달래기 위해 돈을 더 찔러 넣어줬다. 한일합방조약 중에 "대일본제국 천황 폐하는 대한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전황이 불리한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도 이왕가에 꾸준히 품위유지비를 주었다. 가끔 "일제와 매국노가 횡령해 숨긴 조선 왕조의 비자금" 운운하는 음모론이나 사기극이 돌기도 하지만 대부분 거짓. 일본이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상하이 독일 은행의 내탕금 52만 마르크(당시 통화로 환산하면 5만원 상당)를 가짜 증서로 가로챈 적은 있으나, 이는 고종의 저항을 무산시키려는 공작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미 반항의 여지가 없이 모든 것이 끝났고, 이왕의 지위는 모든 일본 귀족보다 높으며 천황 바로 아래인 '''일본 황실의 일부'''였기 때문에 당시 일반인이 이왕가 내탕금에다 손댄다는 건 "나 죽여줍쇼"라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일본 군경이 물고문하러 쫓아왔을 일. 여하튼 그렇게 쓰고 날렸으면서도 일본 귀족들이 이왕가의 막대한 재산을 부러워 할 지경이었단 소리까지 있었으니, 일제 강점기에도 내탕금의 거대함은 여전했던 셈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혼란을 거치면서 일부는 1950년에 만들어진 구왕궁 재산 처분법과 뒤를 이은 구황실 재산법에 의해 국고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온갖 사정과 모략 끝에 모두 흩어져 소멸한다.

3. 운용


내탕금은 완전히 임금의 사유 재산이었다. 내탕금은 조정 회계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의 관리들은 내탕금이 얼마나 되는지, 대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내탕금의 사용 역시 왕이 임의로 처리했으므로 왕실이 내탕금을 어떻게 쓰건 말건 간섭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왕이 나랏돈도 아니고 '''자기 돈 쓰겠다는데''' 신하들이 뭐라 할 수가 있겠는가. 실록에서 가끔 내탕금을 어떻게 썼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액수나 사안이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니다. 다만 아주 없던건 아니고 경복궁 중건 당시 조 대비가 내탕금 10만냥을 내놓았다는 기록 등이 있다. 그 누구든 어떻게 보아도 떳떳한 일에 내놓는 돈이기에 액수를 공개해도 전혀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내탕금은 내수사에서 관리했으며, 내수사를 관리하는 이들은 왕실과 직결되는 내시들이었다. 내수사의 자금은 토지와 노비 등 다양한 경로로 구성되었다. 내수사에서 운영하는 토지는 다른 지주들의 땅에 비해 소작료가 쌌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토지를 바치고 내수사 휘하에 들어가려 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내수사의 권한이 강력하다며 신료들이 항의하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여기엔 내수사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함도 있었다.
또 몇몇 연구자들은 내탕금의 일부를 일수 사채로 운용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론 왕실이 직접 사채에 나서는 것은 아니고, 돈주로서 몇 단계 거쳐서 최종적으로 왕실과 연계된 일수 사채업자가 시장 상인들에게 영업을 하는 형식이 아니었겠냐는 것. 실제로 성종이 내탕금을 사채를 돌리기는 하는데 이자율은 30% 정도이며 시중 '''일반 사채'''의 50% '''보다는 싸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사실 내수사의 소작료나 사채 이자가 저렴한 건 왕실의 체면 문제와 실질적인 이득이 어우러진 면이 더 컸다. '주상 전하의 땅/돈'이니만큼 시중의 그것보다 지나치게 높으면 왕실이 일반 지주 및 대금업자보다 더한 착취를 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명색이 국민을 잘 보살피겠다며 건국한 조선의 명분에도 먹칠을 하고. 따라서 시중보다 적당히 적게 잡아서 더 많은 소작인과 대출을 유도하는 것이 왕실의 체면도 유지하고 내수사의 수익도 끌어모으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4. 사용


내탕금은 왕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통치자금'이었다. 당연히 왕이 마음대로 썼는데, 용도는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불사 등 왕실의 행사를 지탱하기도 했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쓰기도 했다. 특히 불사는 대부분 내탕금에서 충당했다. 숭유억불이 국시인 조선에선 아무리 왕실이라고 해도 국고를 마음대로 불사에 사용하려 했다간 신료들의 무지막지한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불사 자체에도 반대하긴 했지만 내탕금을 불사에 사용하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정조사도세자 묘를 이장할 때 부근에 살던 백성들에게 땅값의 4배를 쳐주고 이사 자금까지 주었으며, 열렬한 이순신 추종자로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는 인쇄비용을 내탕금에서 내렸다. 영조는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내탕금을 털어서 도움을 주었다. 마음에 드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릴 때도 내탕금을 썼다.
대군이나 공주가 결혼할 때 국고를 쓰지 않고 내탕금에서 꺼내서 집을 사주거나 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5. 비슷한 사례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집권 세력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많은 공기업들을 메이지 덴노의 명의로 옮긴 바 있다. 그리고 천황 본인이 받는 연봉 역시 막대한 편이어서 이것이 개인금고 역할을 했다. 쇼와 덴노는 시점이 애매하지만, 대략 패전 이전 1930년대의 연봉이 약 180억 엔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질적인 국가 원수인 당시 '''수상''' 연봉이 약 2억 엔이었는데! 이것을 탈탈 털어 뽑은게 시키시마급 전함. 패전 이후 일본 황실의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고, 일본 국회에서 의결한 대로 일본 정부에서 천황가에 생활비를 준다.
중국 대하 사극인 강산풍우정에 보면 숭정제가 내탕고에서 돈을 꺼내 쓰는거에 인색해서 북경성 방위가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명나라의 재정이 엉망이라 군사를 모집하는데 내탕금을 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숭정제가 아까워서 돈을 풀지 않은 것. 하지만 실제로는 '''아까워서 돈을 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 돈이 없어서 못 풀었을'''가능성이 더 높다. 선대 세 명이 너무 넘사벽급으로 돈을 탕진했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태합입지전 5에 보면 성주 이상이 되었을때 내탕고와 국고가 따로 분리되어 있다. 내탕고의 돈은 수련비나 장사 자금 등 개인적인 용도로 쓰며 국고는 토지 개발이나 관개, 성벽 보수 등 공적인 자금으로 쓴다. 이런 거 보면 당시의 일본 영주들도 국고와 개인 자금은 따로 관리했던 모양이다.
로마 제국이 막 시작될 무렵에는 실제 통치는 황제가 혼자 하더라도 형식상으로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통치한다는 개념이 남아 있었는데, 이집트는 통치자를 신으로 추앙하는 전통이 있어 원로원과 시민이 통치하는 땅이라고 선언할 수 없었으므로 실질적인 측면은 물론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온전한 황제의 소유였다. 따라서 이집트 통치를 대리하는 장관은 황제 한 사람만 묵인해준다면 다른 속주의 총독들보다 훨씬 자유롭게 떡고물을 받아먹을 수 있었다. 물론 당시 로마 황제는 아직 원로원과 시민들을 상당히 신경써야 하는 입장이었고, 이집트는 로마의 집정관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 의결을 받고 정복한 것을 지역 특성 때문에 황제 개인의 땅으로 취급했을 뿐이라 황제라고 해도 이집트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재화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부군이었던 프란츠 1세 또한 막대한 자산을 형성했다. 7년 전쟁 당시에 적국인 프로이센에 식량이나 말 먹이 등을 파는 과정에서 폭리를 취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지위에서 비롯된 신용을 담보로 각지에 은행 같은 기관을 만들어서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덕분에 합스부르크 왕실 사람들은 별도의 왕실 예산이 없었음에도 프란츠 1세가 축적한 재산의 이자만으로도 충분히 기존의 생활 수준을 누렸다고 한다. 얼마나 돈 관리를 잘 했는지, 7년 전쟁 직후 오스트리아가 자금난에 시달리자 프란츠 1세는 본인의 신용을 이용해서 국채를 발행할 수 있었다. 즉 아무리 왕실의 부군이라지만 일개 개인이 강대국인 오스트리아의 국채를 발행할 수 있을 정도로 신용, 그리고 자산 관리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왕정이 아니지만 왕정국가나 다름없는 북한조선로동당 39호실에서 김정은 일가의 비자금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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