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친왕

 

칭호
화석이현친왕(和碩怡賢親王) 윤상(胤祥)
한자
애신각라 윤상(愛新覺羅 胤祥)
만주어
아이신기오르 인시양(Aisin Gioro In Siyang)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믹스


1. 개요


1686~1730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의 13번째 황자(皇子)이다.

2. 생애


어머니는 경민황귀비 장가씨로 윤상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고 옹정제의 어머니인 효공인황후 우야씨에 의해 자랐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줄곧 옹친왕(옹정제의 황자 시절 왕호) 윤진의 세력이었으나, 강희제 말년에는 다소 의문스러운 이유로 10년을 감금된 채 지냈다. 시기상으로는 폐태자 윤잉이 유폐된 때와 겹치기 때문에 망나니 둘째형 윤잉을 옹호하다 미움을 사서 유폐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옹정황제> 등 강희 말년을 묘사한 각종 매체에서도 대개 그렇게 묘사되며, 몸을 사리던 옹친왕 대신 궂은 일을 맡는 행동대장 노릇을 하다 고생을 했다고 설정되기도 한다.
옹정제는 자신의 동복 형제였던 14번째 황자 순근군왕 윤제(恂勤郡王 胤禵)와도 사이가 무척 안 좋아서, 순근군왕 윤제는 자신의 친형을 따르지 않고 8황자였던 염친왕 윤사(廉親王 胤禩)와 행동을 같이 했다. 군사적으로 재능이 있었던 윤제는 1720년 강희제에게 대장군왕으로 임명되어 체왕아라푸탄 정벌로 후계자 중 가장 두각을 보였다.
그리고 강희제가 죽으면서 옹친왕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유조를 남겼고 옹정제가 즉위하게 된다.(1723년) 그 후 피휘로 인해 윤상(允祥)으로 개명되었으나, 윤상 사후 그의 충성심에 감동한 옹정제가 윤상(胤祥)으로 다시 바꿔주었다.
옹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윤상을 풀어줬고, 심지어 모든 작위을 박탈당한 신분이었던 윤상에게 화석이친왕(和硕怡亲王)이라는 최고의 작위를 내린다. 심지어 이 작위는 세습을 허락함으로써 청나라에서 세습이 가능했던 12개 철모자왕(鐵帽子王) 중 9번째로 받은 철모자왕이다. 이것을 세습망체라고 한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옹정제가 황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설치한 군기처에 들어감으로써 청나라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옹정제의 다른 형제들이 모두 옹정제에게 비참하게 숙청을 당할 때도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군기처에서 악명 높은 일 중독자 옹정제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다 안그래도 유폐생활로 해친 건강을 더욱 망쳐서 1730년 45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9남 5녀의 자식을 남겼다. 이 중 4번째 딸이었던 화석화혜공주는 옹정제가 직접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죽은 후 이친왕의 작위는 7남인 홍효에게 이어졌다.
정실인 적복진 조가씨를 총애한 것으로 유명하다. 14명의 자녀들 중 7명이 조가씨 소생으로 다른 황족들이 정략혼을 통해 맺어진 적복진이 아닌 측복진이나 서복진 사이에서 자녀를 많이 낳은 것과 대조적인데, 아무래도 반세기 전 조선의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처럼 힘든 유폐생활을 함께 버티며 정신적으로 큰 위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복진인 조가씨의 나이는 이친왕과 동갑으로, 부군과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자식농사는 전부 망했다. 어려서 죽은 아들들을 빼면 대부분 멍청하고 성격도 나빴다고 한다. 심지어 이친왕의 아들 중 몇몇은 백부인 옹정제와 사촌인 건륭제는 후궁 소생의 서자니까[1] 폐태자[2]의 아들이 더 정통성 있다는 헛소리를 해대다가 분노한 옹정제에 의해 전부 쫒겨나거나 죽었다. 그나마 당시에 나이도 어리고 권력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이친왕의 7남 홍효가 이친왕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홍효 역시 자기 형들과 똑같이 멍청하고 성격도 더러워서 건륭제도 그를 싫어했지만 이친왕의 유일한 후계자라 싫어하면서도 살려두었다고 한다.

3. 미디어믹스


<보보경심> - 원홍
<몽회> - 왕안우

[1] 옹정제강희제의 후궁 덕비 우야씨의 소생이고, 건륭제는 옹정제의 후궁 희비 니오후루씨의 소생이다.[2] 정황상 강희제의 차남이자 유일한 적자였던 폐태자 애신각라 윤잉을 말하는 듯 하다.